제796화
위지불이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전 잠시 나갔다 올게요.”
“잠시 뒤에 산책하게 해 줄 테니 이리 오거라.”
위지불이는 아운소에게 미안한 듯 어정쩡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입술을 삐쭉 내밀고 천천히 남제화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왜 부르셨어요?”
“나를 따라 서재로 오너라.”
함께 서재로 들어간 위지불이는 그가 입 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남제화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니 조금 겁이 났다.
“폐하, 저를 왜 그렇게 보세요?”
남제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운소가 좋으냐?”
“네, 좋아요.”
남제화가 안색을 바꾸고 훈계하려 할 때, 그녀가 덧붙였다.
“폐하는 공주가 싫으세요?”
“응?”
“저는 아운소 공주가 황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위지불이는 아운소를 좋아하는데, 아운소가 황후가 되길 원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녀를 짐의 황후로 삼고 싶으냐?”
“네, 저는 폐하도 아운소 공주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운소 공주에게 공작전을 주시지 않았을 거잖아요. 궁녀들 말로는 그곳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던데요.”
“불이, 정말로 아운소가 좋은 것이냐?”
위지불이는 그의 말투가 좀 이상하게 들렸다. 순간 뇌리를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폐하께서 오해하셨어요. 폐하의 여인들에게 제가 어찌 감히 불손한 생각을 품을 수 있겠어요. 아운소 공주는 소탈하고 사랑스러워요.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폐하를 좋아하는 것과 같아요. 친구에 대한 애정이에요.
황권을 거머쥔 사람으로서 남제화는 어떤 계획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정에는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변수가 위지불이가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한끼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 동안 녀석은 아운소와 시시덕거렸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사실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물론 나이대가 비슷한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지만… 아무튼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이렇게나 사리 분별을 못할 줄이야, 감히 짐의 여자를 탐하다니!
녀석을 서재로 부른 것은 따끔하게 혼내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아운소를 친구로 생각하고, 또 그녀를 황후로 삼기 바란다고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순간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불쾌감이 바람에 모두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정말 그냥 친구로 생각한다?”
“물론 정말이죠.”
위지불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여자인데 여자를 좋아하기는. 그럼 나도 남색가나 다를 바 없는데!’
“폐하께서 제가 아운소 공주와 친구가 되는 게 싫으시다면…….”
위지불이가 말했다.
“그럼, 제가 피할게요. 공주와 친구가 되지 않겠습니다.”
남제화는 웃으며 말했다.
“동월의 남녀 사이는 유별하지만, 남원은 민간 풍습이 개방적이어서 그럴 필요는 없다. 너희 나이대가 비슷하니 친구가 되는 건 괜찮지.”
위지불이도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군요. 황상과도 친구로 지내는데, 이제는 공주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네요.”
남제화가 차를 마시며 무심한 척 물었다.
“나와 그녀 모두 너의 친구인데… 혹 차이가 있느냐?
“친구는 공평하게 대해야죠. 어떻게 차별할 수 있겠어요?”
남제화는 미간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짐이 너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지 않았느냐?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을 바꾸는 것이냐?”
위지불이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서는 저의 가장 좋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저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은인이시니 당연히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지요.”
결국 남제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엔 고압적으로 굴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위지불이에게 제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남제화가 또다시 물었다.
“머리가 아직도 아프냐?”
“폐하께서 지압해 주셔서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그래. 너는 술에 약하니 앞으로 조금만 마시도록 해라.”
위지불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전문적인 자객 훈련을 받으면서 그녀는 술을 마시면 일을 그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원에 온 뒤로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저녁엔 술이 무척 마시고 싶어졌다. 세 명의 공주와 남제화가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달콤한 과실주는 제가 술인지도 잊게 했고, 결국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정신이 있어서 제 성별에 대한 비밀은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사실 제가 여자라는 걸 밝히고 싶기도 했다. 남제화는 여제가 아니기에 그를 죽일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고민도 잠시, 그녀는 여제에게 중독되고 말았다.
남제화는 그녀가 남원에 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웠다. 혹여 여제가 사악한 마음을 품고 저를 죽이면 어떡하지. 이렇게 맥없이 죽으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닌데.
날마다 두려움은 커져만 갔고, 그럴수록 그녀는 남제화의 관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히려 남제화는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가 세 명의 공주를 들인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그때, 그녀는 계속 제 비밀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남제화와는 그저 가장 친한 친구로 남는 게 좋을 성싶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앞으로는 술을 안 마시겠어요.”
“그렇다고 전혀 마시지 말라는 건 아니다. 그저 주량이 세지 않으니 천천히 마시란 말이었다.”
“네, 알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두 사람은 모두 조용해졌다. 남제화가 아무 말이 없자 위지불이가 꾸물거렸다.
“폐하, 다른 분부가 없으시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남제화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가 보거라.”
* * *
공작전으로 돌아오자 소상이 아운소에게 걱정스레 말했다.
“공주, 그 동월놈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언짢아하실 수도 있어요.”
아운소는 웃으며 답했다.
“어젯밤 네가 그랬잖아. 위지불이는 폐하와 가까운 사이이니, 그와 친해지라고. 폐하의 측근인 그가 나를 좋게 이야기한다면 황후의 자리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말이야. 다 네가 말했잖니?”
소상은 얼굴을 붉혔다.
“제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폐하께서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불이 공자와 노닥거리는 건 아니죠. 황후가 되든 안 되든 간에… 어쨌든 공주께서는 폐하와 혼인하시는 겁니다.”
“나중 일은 나중에 말하자. 우리 파목 부족 사람들은 당당하게 친구를 사귀니까. 만약 그런 일로 폐하께서 언짢아하신다면… 너무 소심하신 거 아니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자 소상이 입술을 들썩였다.
“어쨌든 공주께서 좀 조심하세요. 여기는 남원의 황궁이지 우리 파목 부족이 아니에요.”
아운소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재채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뒤에서 나를 욕하나?”
그때 한참 고여아가 아운소를 흉보고 있었다.
“아운소는 정말 담력이 대단해. 어떻게 폐하 앞에서 동월인과 눈빛을 주고받을 수 있지? 분명 폐하께서 안색이 안 좋아 보였어. 이 일로 아운소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아졌을 거야.”
옥합이 말했다.
“아운소 공주도 분별없이 행동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녀가 위지불이에게 접근하는 건 다 목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고여아는 물었다.
“무슨 목적이 있겠느냐?”
“공주, 모르시겠어요?”
옥합이 말했다.
“위지불이를 대하는 폐하의 태도가 보통이 아니에요. 그와 함께 식사를 할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 손수 안마까지 해 주셨잖아요. 기억나세요? 그때 위지불이가 폐하의 다리를 베고 누운 것 말이에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고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말은, 위지불이가 폐하의 남총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옥합는 얼른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공주, 이런 말은 함부로 입 밖에 내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 납니다.”
고여아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위지불이가 폐하와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폐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아운소 공주가 그와 좋은 친구가 되려는 건…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우리도 좀…….”
고여아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네 말은… 나보고 그 동월놈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이냐?”
“아운소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인데 공주께서도 당연히 할 수 있죠.”
고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위지불이가 너무 싫어. 사내다운 모습은커녕 빼빼 마른 계집처럼 생겼잖니. 게다가 동월 사람이야. 동월국이 우리 남원을 얼마나 괴롭혔는데! 그에게 복수하지는 못할망정 나더러 비위를 맞추라고?”
“공주, 무사히 황후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늉이라도 해야 해요.”
고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 * *
옥천전에서는 나사가 탁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녀 향미가 입을 열었다.
“공주, 고여아 공주와 폐하께서 식사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시더군요. 또 아운소 공주는 동월의 사내와 화기애애한 담소를 주고받았는데… 이걸 어떻게 보시나요?”
나사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여아는 너무 단순해. 폐하와 말을 많이 한다고 황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운소는… 폐하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름길을 선택한 것이지. 위지불이와 친분을 쌓아서 그가 폐하께 이야기를 잘 해 주길 바란 것이야.”
향미는 초조해하며 말했다.
“공주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시니, 빨리 방법을 강구해야겠네요.”
“급할 게 뭐 있어?”
나사는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렇게 급하진 않다. 천천히 상황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폐하는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야.”
* * *
위지불이는 풀밭에서 공작새에게 먹이를 주다가 이내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산책했다. 이제 남원의 화려한 풍경은 그녀에게 색다름을 주지 못했다. 질리도록 많이 본 탓이었다.
발걸음을 멈춘 그녀가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공작궁이 보였다.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이곳에 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비록 남장을 하고 있는 신세였지만, 위지불이는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동성 친구를 갈망하고 있었다. 고귀한 공주인 아운소가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남제화도 반대하지 않으니, 위지불이는 당연히 바라 마지않을 일이었다.
입구에 서서 잠시 머뭇거린 위지불이는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발견한 아운소는 당연히 기뻐하며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