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5화
깊은 밤, 정전 서재에서 남제화는 부족에서 보내온 문서를 읽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전각을 배정하고 난 후… 공주들의 반응은 어떠하냐?”
강암룡은 허리를 굽힌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공작전에 배정된 아운소 공주는 당연히 기뻐했고, 옥천전의 나사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했습니다. 다만, 백화전의 고여아 공주만 몇 마디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합니다.”
남제화의 미간이 살짝 풀리며 미소를 지었다.
“고여아는 조급한 성격이지. 투덜거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강암룡이 말했다.
“세 분의 공주께서는 제각기 다른 장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운소 공주는 춤을 잘 추고, 고여아 공주는 용모가 빼어납니다. 그리고 나사 공주는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합니다. 폐하의 의중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남제화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황제를 모실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황제의 심사를 멋대로 짐작하는 것이다. 그 당연한 미덕을 까먹고 강암룡은 쓸데없는 말을 뱉고 만 것이다. 남제화는 세 공주가 가져온 외교 문서를 거두어들인 뒤,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석 달의 기한 중에 겨우 첫날일 뿐이다.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강암룡는 생각했다.
‘무엇을 천천히 진행한다는 거지? 연회석에서 웃는 황제의 모습은 분명 너무 즐거워 본분조차 잊은 듯했는데?’
남제화는 몸을 일으켜 침전으로 가면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불이는 이미 잠들었느냐?”
“불이 공자는 취해서 이미 잠들었을 겁니다.”
강암룡은 말했다.
“사실… 조금 의아했습니다. 평소에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데, 오늘은 어찌 이리 과음을 한 걸까요? 아마 기뻐서 그랬나 봅니다.”
남제화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 애가 왜 기뻐한단 말이냐?”
“드디어 폐하께서 후궁을 맞이하니까 당연히 기뻐해야죠.”
남제화는 가만히 아래턱을 만졌다.
“그래……?”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짐이 가 봐야겠다.”
강암룡은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못 박힌 듯 그대로 서 있었다. 공주들이 오면 위지불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변함이 없는 듯했다. 자러 가기 전에 일부러 보러 갈 정도로.
황제는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그에게는 정말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가장 충실한 수하로서 강암룡은 공주들이 온 것이 기뻤다. 비록 이 모든 것이 태황의 술수였지만, 그럼에도 이 혼사로 황실의 피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생길 게 아닌가. 이건 남원 황실에 있어서도 좋은 일이었다.
이미 방 안은 등불이 꺼져 어두컴컴했다. 남제화는 문 입구에 잠시 서 있다가 어둠에 눈이 적응되자 안으로 들어갔다. 휘장을 걷어 올린 그는 창밖에서 비추는 어스름한 달빛을 빌려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허리에 걸쳐진 이불은 반쯤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불을 주워서 위지불이에게 덮어 주려고 했다. 그때, 위지불이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은은한 술 냄새가 남제화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늘 남제화는 위지불이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래도 기분이 좋은 듯 과음을 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이불을 꼭 여며 주었다. 코끝을 맴도는 술 향기는 갈수록 더 짙어졌고 녀석의 날숨이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뿜어졌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숨결에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머리는 점점 아래로 향했다.
차갑게 식은 코끝이 서로 맞닿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위지불이는 놀라 잠에서 깨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퍽 난감했을 것이다.
말없이 서 있던 그는 휘장 속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복도에서 발걸음을 멈춘 그는 잠시 허공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황궁에서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석 달은 바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공주들이 입궁한 것은 이야기의 서막이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이 이미 황궁 상공에 촘촘히 펼쳐져 있었다. 석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석 달.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 * *
위지불이가 술에 취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처음 느껴보는 취기에 온몸이 다 아팠다. 오빠들은 매일 술을 마시던데. 이 독한 걸 어찌 매일 마시는 걸까? 이마를 부여잡고 느릿느릿 걸어서 방을 나가는데 남제화가 그녀를 불렀다.
“불이, 이리 오거라.”
공주들에게 가지 않고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위지불이는 아침부터 그를 보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맥없이 다가가서 짤막하게 폐하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어디가 아픈 것이냐?”
“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제대로 못 잤느냐?”
남제화는 그제야 어제 일이 떠올랐다.
“취해서 잠이 들었으니 당연히 머리가 아플 것이다. 이리 와 보거라. 내가 주물러 주마.”
위지불이는 발을 마룻바닥에 문지르며 꾸물거릴 뿐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괜찮아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
위지불이가 다가오지 않자 남제화가 휙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위지불이를 푹신한 방석에 앉히곤 관자놀이를 안마해 주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던 위지불이는 반항하기도 귀찮아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몸은 축 늘어졌고 눈을 감은 채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남제화는 그런 그녀를 제 무릎에 눕게 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위지불이가 황급히 일어나려고 하자 남제화가 지그시 머리를 눌렀다.
“가만히 있거라.”
그는 크고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혈 자리를 힘 있게 문질렀다. 그의 손이 닿으니 마법처럼 온몸이 편안해졌다. 그때, 강암룡이 들어와 아뢰었다.
“폐하, 공주 세 분께서 오셨습니다.”
남제화는 대답을 하고서도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 위지불이의 시각에서는 세 쌍의 수려한 옥족, 가느다란 종아리 그리고 고운 통치마만 보였다. 위지불이가 일어나려 했지만 남제화가 다시 그녀를 손으로 눌렀다. 그가 웃으며 공주들에게 말했다.
“불이가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셔 머리가 아프다고 하길래 짐이 주물러 주는 중이오.”
앞에 펼쳐진 광경은 무엇인가. 공주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분명 조금 이상한 상황이었다. 감히 황제에게 안마를 받다니… 대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 것이란 말인가!
고여아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쭉 뺐다. 그 옆에 있던 나사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직 아운소만이 웅크리고 앉아 위지불이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술에 취해 봤어요. 확실히 머리가 몹시 아프죠. 이렇게 안마를 받고 꿀물을 좀 마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남제화는 목소리를 높여서 분부를 내렸다.
“불이에게 꿀물을 주거라.”
궁녀는 응수하며 물러갔다. 위지불이의 얼굴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처녀가 대낮에 남자 다리를 베고 있다니, 이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만약 아버지가 봤다면 그녀의 다리와 사내의 다리 모두 부러뜨렸을 것이다. 이건 너무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폐하, 이제 됐어요.”
그녀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남제화는 시선을 내려 녀석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걸 바라봤다. 귓불에서 목덜미까지… 옷 밖으로 드러난 곳은 전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여전히 위지불이를 놀리는 것이 즐거웠다. 그녀가 예전처럼 성질을 부리니 기분까지 좋아져 마침내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생겼다. 제 방으로 도망가려던 위지불이는 남제화에게 또 붙잡혔다.
“아침 식사를 해야 하는데 어딜 가느냐?”
위지불이는 그제야 긴 탁자에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남제화가 세 공주와 함께 아침을 함께 먹을 모양이었다. 위지불이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남제화는 그녀를 자기 곁에 앉혔다. 고여아는 얼른 남제화의 반대편에 앉았다. 아운소는 위지불이 옆에 앉았고, 나사는 고여아 옆에 앉았다.
식탁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크고 작은 접시엔 평소보다 더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탁자 위에 놓인 꽃도 더 많아졌다. 어떤 꽃은 관상용이었지만 또 어떤 꽃은 식용이었다.
조금 전 일로 민망하고 화가 났던 위지불이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때 곁에 앉은 아운소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불이 공자, 남원의 요리에 적응되셨어요?”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지내시는 건 어떠세요? 우리 남원은 동월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여름만 있죠. 겨울이 없어요.”
“좀 덥긴 해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솜옷을 입을 필요가 없는 건 그래도 좋은 것 같아요.”
“공자는 매일 무엇을 하시나요?”
“할 일이 없어서 매일 한가합니다.”
“그럼… 공자는 언제 동월로 돌아가세요?”
“…….”
이 질문에 위지불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남제화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남제화는 고여아에게 붙잡혀 있어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가 조금 의기소침한 걸 알아차린 아운소가 덧붙여 말했다.
“제가 말이 좀 많아요.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전 여기 있으면 심심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저도 좋아요.”
이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남제화 말고는 다른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담소 상대가 생기길 간절히 바라던 참이었다. 아운소가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저는 공자를 친구로 여기겠어요.”
위지불이는 자신이 사내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깜빡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가 절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좋아요.”
천성적으로 소탈한 부족 공주들은 사내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기에 그 말을 엿듣고 있던 남제화도 슬쩍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사는 의미심장하게 위지불이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고여아도 아운소와 위지불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주시하며 경멸 섞인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면전에서 다른 남자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니……. 황제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수작인가 혹은 본디 지조가 없는 여인인가? 아무리 춤을 잘 춘다고 한들 저렇게 지조 없는 여인이 황후가 될 자격이 있는 걸까.
아운소가 먼저 다가오자 위지불이는 무척 기뻤다. 그녀는 의자를 끌어 아운소와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리곤 그녀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식사 후, 남제화는 서재로 가야 했기에 세 명의 공주는 예를 갖춘 후 물러갔다. 위지불이는 새로운 친구 아운소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남제화가 기침을 두 번이나 했지만, 위지불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위지불이를 불렀다.
“불이, 이리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