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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94)화 (793/1,192)

제794화

대나무 피리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지자 무희 몇 명이 튀어나와 허리를 꼬며 대전에 들어왔다. 발목에 달린 금빛 방울은 무희들이 움직일 때마다 청명한 소리를 냈다.

위지불이는 궁중에 있는 동안 가무에 대한 식견이 적지 않게 쌓였다. 하지만 매번 무희들의 공연에 넋을 잃었다. 그들은 마치 뱀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떻게 저렇게 허리가 가녀리지?’

남원의 여인들은 동월의 여인들처럼 피부가 새하얗고 부드럽지는 않지만, 매혹적인 춤사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남원에서는 다들 진심으로 가무를 감상했다. 그러다 흥이 나면, 직접 내려가 함께 춤을 췄다. 동월과는 정말 달랐다. 동월 남자들은 늘 음흉한 눈빛으로 무희의 가슴과 허리를 쳐다보기 바빴다.

모든 부족의 공주들은 가무에 능했다. 잠시 공연을 감상하던 고여아가 일어나 남제화를 향해 허락을 구하자 남제화가 웃으며 손짓했다. 그녀에게 격식을 차릴 필요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고여아는 통치마를 살짝 들고 무희들 틈에 끼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활달한 성격으로 짙은 눈썹에 사슴같이 큰 눈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여러 가닥으로 땋은 머리카락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감탄을 자아냈다.

나사도 빼지 않고 가만히 일어나 남제화를 향해 예를 표했다. 남제화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허락했다. 나사는 고여아처럼 격렬한 춤이 아니라 함축적이고 정적인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 모두 날렵함이 담겨 있었다.

그중 아운소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종 소상이 일어나라고 뒤에서 손가락으로 찔러도 아운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저 춤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곡조는 한 곡 한 곡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제화도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벗고 단 아래로 내려갔다.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남제화가 춤추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입안에 과일을 하나 던져 넣으며 눈을 흘겨 떴다. 역시 공주들이 오니까 다르군.

예전에 강암룡에게 남원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춤을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 있었다. 궁중에서도 궁녀와 시종들이 모여 춤을 추곤 했다. 궁 밖 광장에서는 누가 호로사葫蘆絲(호리병박을 이용한 전통 관악기)만 불어도 금방 젊은 남녀가 모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암룡은 가무가 남원 사람의 혼이라고 말했다. 밥은 안 먹어도 춤은 거를 수 없다는 것이 남원인들의 철학이라 했다.

여자는 매혹적인 춤사위로 남자를 정복하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춤으로 자신을 과시한다. 매년 화령절花翎節은 젊은 남녀가 춤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구애하는 좋은 기회였다. 위지불이는 턱을 받치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남제화는 대체 어느 공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걸까?’

황제가 몸소 무대에서 뛰어들어 춤을 추니 무희들이 난리가 났다. 두 공주도 신이 나서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그녀들은 남제화의 곁을 맴돌며 허리를 비틀고 엉덩이를 내밀었다. 가녀린 팔을 쭉 펴고 머리를 흔들며 마음껏 춤을 즐겼다.

남제화도 그녀들에게 보조를 맞추며 춤을 즐겼다. 그는 고여아와 춤을 추다가도 다시 나사와 춤을 맞췄다. 위지불이는 한 모금씩 과실주를 마시며 그들을 바라봤다.

‘남제화가 여인들 앞에서는 저렇구나.’

그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이 꽃도 따고 저 꽃도 따러 갔다. 이런 그를 남색가라고 착각했다니. 사실은 바람둥이인데 말이다. 반면 소상은 참다못해 아운소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공주, 어서 나가세요. 폐하께 춤추는 모습을 보여 드리세요. 공주께서 나가시면 분명 폐하께서 공주만 에워싸고 춤을 추실 거예요.”

아운소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남원의 황제를 바라봤다. 잠시 망설인 그녀는 결국 일어났다. 그녀는 경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녀에게 어떤 일에도 뒤처지지 말라고 분부하시지 않았는가. 그녀는 지금 파목 부족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부족 사람들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다.

아운소에게 춤은 일종의 본능이었다. 춤에 대한 영성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타고난 재능이었다. 파목 부족 전체에서도 그녀를 따라올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의 춤사위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손끝에서 손목으로, 팔뚝에서 어깨까지…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져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연히 그중에 남제화의 시선도 있었다. 그는 아운소에게 반한 듯 시선을 고정한 채 춤이 끝날 때까지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고여아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하마터면 다른 사람의 발을 밟을 뻔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무리에서 빠져나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나사는 춤사위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얼굴색도 그대로였지만, 다들 아운소만 바라보니 흥이 달아나서 스스로 무대 밖으로 나왔다. 다른 무희들도 사라진 탓에 무대에는 남제화와 아운소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남제화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면 아운소는 넝쿨이 되어 그를 감싸 안았고, 남제화가 한 마리의 독수리가 되어 날개를 펴면 아운소도 독수리가 되어 그를 따라 날아올랐다. 또 남제화가 날렵한 표범이 되어 쫓으면 아운소는 온순한 순록이 되어 도망갔다. 아운소의 눈동자는 남제화를 줄곧 바라보았고, 남제화의 시선 역시 한시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이미 과실주를 두 잔이나 마셨다. 그녀는 턱을 괴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두 남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남제화는 아운소를 좋아하는군. 마침 그녀도 아운소가 마음에 들었다. 만약 아운소가 황후가 된다면 그녀도 기쁠 것이다.

곡조는 마침내 끝이 났다. 남제화와 아운소는 모두 춤을 추느라 땀에 흠뻑 젖었다. 남제화는 직접 아운소의 땀을 닦아 주었다. 다정한 그의 행동에 고여아는 얼굴색이 변했다. 반면, 나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운소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남제화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몸을 비틀어 자리로 돌아왔다.

술기운이 오른 위지불이는 흐릿해진 시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남제화가 그녀의 땀을 닦아 주곤 했었다. 그녀는 줄곧 남제화가 제게만 잘해 준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남제화는 제게만 잘해 주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잘해 주는 것이었다.

연회는 밤늦게 끝났다.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않던 위지불이가 오늘은 웬일로 과음을 했고, 두 궁녀에게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두 궁녀가 세안과 환복을 도우려 했지만 그녀에게 곧장 쫓겨났다. 아무리 취해도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옷을 벗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방심하다간 모든 게 다 들통날 것이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와 정신을 잃었다. 세 명의 공주가 주마등처럼 그녀의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한쪽은 고여아, 또 한쪽은 나사 그리고 마지막은 아운소……. 그녀는 이불을 껴안고 중얼거렸다.

“아운소, 나는… 아운소가… 황후가 되면…….”

* * *

입궁 첫날부터 세 명의 공주가 자신의 춤사위를 뽐냈다. 누구의 춤사위가 가장 빼어난지는 누구든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특히 남원의 황제 남제화가 그녀들의 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세 공주에게 배정한 궁전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제일 춤을 잘 춘 아운소는 가장 아름다운 공작전을, 고여아는 백화전을, 그리고 나사는 옥천전을 각각 배정받았다. 시종이 물러나자 고여아는 탁자를 두드리며 화를 쏟아냈다.

“내가 아운소보다 춤을 못 쳤다는 거야?”

고여아의 몸종 옥합玉鴿이 그녀를 위로했다.

“공주, 노할 필요 없어요. 아운소 공주가 춤은 잘 추지만, 공주만큼 예쁘진 않아요. 연회에서 폐하가 공주를 계속 쳐다보셨잖아요. 배정받은 궁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황제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죠.”

화장대 앞에 앉은 고여아의 머리를 옥합이 빗겨 주었다. 한 가닥씩 땋은 머리를 모두 풀자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곱슬곱슬했다. 고여아가 말했다.

“내일은 이렇게 땋지 않을 거야. 타곤성 여인처럼 해줘.”

옥합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죠. 폐하께 그게 더 친근하니, 공주를 더 가깝게 느끼실 거예요.”

고여아는 구리 거울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두고 봐. 폐하의 마음은 틀림없이 내 것이 될 거야.”

* * *

옥천전. 나사 공주는 목욕 후 화장대 앞에 앉았다. 몸종 향미香彌는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비틀어 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공주를 관찰했다. 언제나 침착한 나사 공주는 얼굴에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향미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공주, 오늘의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사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뭘 어떻게?”

“아운소가 한껏 두각을 드러냈잖아요. 결국 폐하의 환심을 사서 공작전에 들어갔어요. 궁문을 들어올 때는 그녀가 맨 마지막이었지만, 지금은 제일 앞서 나가고 있잖아요.”

“공작전에 들어가 지낸다고 황후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니란다. 이제 시작이니 조급해할 것 없다.”

향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족장님 말씀이 옳아요. 침착한 성격 덕분에 공주님이 꼭 황후가 되실 거예요.”

* * *

공작전 안에서 소상은 신이 나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리 높이의 산호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옥구슬 문발. 벽에는 정교한 자수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푹신한 털 담요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웅장한 전당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공주, 여기가 바로 황후가 사는 궁전이지요?”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소인은 한눈에 알아보겠던 걸요. 오늘 밤 폐하께서는 이미 공주의 아름다운 춤에 푹 빠지셨어요. 황후의 자리엔 분명 공주가 오르게 될 거예요.”

아운소는 탁자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가만히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차는 맛이 좋네.”

소상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공주, 소인이 한 말 들으셨죠?”

“넌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듣든 듣지 않든 그건 내 맘이지.”

“공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배정받았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으세요?”

“이게 뭐가 좋아?”

아운소가 말을 이었다.

“이건 도리어 폐하께서 나를 해치시는 거야. 굳이 우열을 가려서 두 사람이 나를 질투하게 만드신 거라고.”

“질투하려면 하라죠? 이건 폐하께서 내리신 은혜예요. 다른 공주들은 아무리 질투해도 얻을 수 없어요.”

“네가 뭘 안다고 그리 떠드는 것이냐?”

아운소는 눈을 부릅떴다.

“궁에 막 들어와서 아직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 상황 파악도 하지 못했는데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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