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3화
자리에 누운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폐하, 요즘 바쁘세요?”
“그래, 조금 바쁘구나.”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남제화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또다시 물었다.
“공주들 일 때문에 바쁜 거예요?”
“그래.”
“강 총관 말이 세 분 중에 누구를 황후로 들이실지 고민 중이시라면서요?”
“그래, 조금 걱정이구나.”
“직접 만나보고 폐하께서 마음에 드시는 분으로 정하면 안 돼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남제화가 말했다.
“세 부족의 세력은 거의 막상막하다. 어느 부족에게도 미움을 살 수 없지. 누구를 고르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위지불이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는 공주들이 마음에 드실 것 같으세요?”
남제화는 한참 뒤에야 대꾸했다.
“그렇겠지. 짐에게 시집온 짐의 비들이 아니더냐. 짐이 마땅히 좋아해 주어야지.”
위지불이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폐하, 그럼 폐하는 저도 좋으세요?”
“물론이고말고.”
남제화는 바로 답을 주었다.
“짐은 너와의 동침도 윤허하는데,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나중에는 공주들과 함께 주무실 거잖아요.”
“그건 다르지. 그들은 짐의 비고, 넌.”
그가 그녀의 머리를 흩트리며 말했다.
“불이, 넌 나의 제일 좋은 친구지.”
“폐하는 좋은 친구가 몇 명 있어요?”
“몇 명?”
남제화가 실소를 터뜨렸다.
“당연히 너 하나지.”
그 말에 위지불이는 날 듯이 기뻤다. 남제화에게 비는 세 명이나 될 테지만, 제일 좋은 친구는 오직 그녀 하나뿐이니까. 위지불이가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도 저한테 제일 좋은 친구예요. 딱 한 명뿐인 좋은 친구요.”
남제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불이, 내일이면 세 공주가 입궁한다. 이제 예전처럼 너와 자주 시간을 보내진 못할 듯하구나.”
“저도 알아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당연히 공주들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셔야죠. 저 위지불이는 애당초 폐하의 시종…….”
“넌 이미 시종이 아닌지 오래다.”
남제화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넌 내 좋은 벗이라니까. 그새 잊은 것이냐?”
* * *
이튿날, 남원 황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길은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었고 그 옆으로 시종들과 궁녀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세 공주를 위한 환영 행사로 궁은 더없이 시끌벅적했다.
다만 궁문을 들어설 때, 아주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
세 공주는 각각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거의 동시에 궁문 앞에 도착했다. 규율대로라면 궁문 정면으로 오는 대열이 먼저 입궁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왼편에서 오던 이들이 먼저 끼어든 것이다.
또, 오른쪽에서 오던 이들도 지고 싶지 않았는지 마부가 채찍을 찰싹찰싹 휘두르며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궁 앞에서 혼잡한 상황이 펼쳐졌다. 궁 입구에서 대판 싸울 수는 없었기에 인부들은 서로를 밀치며 투덕거렸다. 동작은 크지 않았지만 서로를 슬쩍슬쩍 밀치며 말다툼을 하는 통에 음악 소리도 희미해져 버렸다.
강암룡이 서둘러 다가와 그들을 중재했다. 다행히 궁 안의 길이 널찍해서 두 마차가 나란히 들어설 수 있었다. 결국 정면에서 오던 마차는 오히려 맨 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시녀가 발을 내리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공주, 원래 우리 마차가 가장 앞장서 있었는데 지금은 제일 끝에서 가고 있습니다.”
마차 안에 탄 공주는 파목 부족의 아운소 공주였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뭐 하러 그리 서두른단 말이냐. 먼저 들어가든 나중에 들어가든 입궁하는 것은 매한가진데?”
“공주.”
소상小桑은 그런 공주의 태도가 조금 답답했다.
“출발하기 전에 아포阿布 족장님께서 하신 말씀 잊으셨습니까? 황후가 되지 못한다면 다른 부족들의 비웃음을 살 거라는 말씀 말입니다.”
아운소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설마 일찍 들어갔다고 황후가 될까.”
“저 두 분이 사사건건 선두를 다툰다면, 우리도 뒤처져선 안 됩니다.”
아운소는 조금 성가셨다.
“알겠어, 그만 얘기해.”
그녀는 발을 걷고 밖을 바라보았다. 정전에 도착하자 많은 궁인들이 계단 아래 서서 마차를 흘깃거리고 있었다. 시종들을 훑던 아운소의 시선이 누군가의 얼굴에 멈춰 섰다.
새하얀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피부색이 검은 남원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니 대비를 이루어 유난히 이목을 끌었다. 그자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를 바라보았고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아운소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발을 내렸다.
공주들은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가장 앞에 서 있는 공주는 가장 먼저 입궁한 마온극 부족의 고여아 공주였다. 그다음은 혁흑철 부족의 나사 공주, 마지막으로 파목 부족의 아운소 공주 순이었다. 강암룡의 안내를 받으며 세 공주는 순서대로 나무 계단을 올라 정전에 들어섰다.
오늘 남제화는 한껏 멋지게 차려입었다. 청색 장포를 입고, 그 위에는 하얀색 감견坎肩(소매가 없는 조끼 모양의 상의)을 입었다. 감견에는 금색 공작과 화려한 색채의 꽃무늬가 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여기에 오색 실로 짠 요대에는 한 가닥 한 가닥마다 동그란 옥 조각이 달려 있었다.
또 장포 안에는 검은색 긴 바지를 입었는데, 발목 부근에서 좁게 오므려지는 바짓단에 금색과 은색 실로 구름무늬가 수놓였다. 가장 바깥에는 바닥에 끌릴 만큼 긴 금색 웃옷을 걸쳤다. 대전이 밝지 않았지만 그의 옷은 화려하게 빛나기 바빴다. 여기에 준수한 외모까지 더해지자 그가 꼭 천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위지불이는 다른 시종들과 뒤섞여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옥좌 옆에 서 있는 남제화를 보는 순간, 그녀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남제화가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평소 게으름을 피우며 자신을 진면모를 감추던 그였건만. 오늘은 누구보다 늠름했고 제왕의 면모가 물씬 풍겼다.
세 공주는 감히 남원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없었기에 곧장 무릎을 꿇으며 절을 올렸다. 남제화는 단폐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조용한 대전 안엔 그의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가 가장 앞에 있던 고여아 공주를 부축하며 다정히 말했다.
“공주, 일어나시오.”
수줍게 시선을 올린 고여아 공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남원의 황제가 이렇게 젊고 준수하다니. 그의 모습을 보니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녀는 그가 좋았고, 그의 정실이 되고 싶어졌다.
두 번째로 남제화가 일으킨 사람은 나사 공주였다. 그녀는 온화하고 조용한 여인이었다. 남제화의 잘생긴 얼굴에 그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고여아처럼 화들짝 놀라진 않았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남제화는 마지막으로 아운소 공주를 부축했다. 그녀는 계속 눈꺼풀을 내리깔고 남제화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 덕에 그의 외모에 놀랄 일도 없었다.
남제화가 자리를 권하자 세 공주는 의자에 앉았다. 궁녀들은 곧장 다과를 내어 왔다. 남제화는 궁녀들과 시종들 사이에 서 있는 위지불이를 보곤 손짓했다.
“불이, 이리 와서 앉거라.”
그는 옥좌에 앉아 있었고, 왼쪽에는 고여아 공주, 오른쪽에는 나사 공주가 앉아 있었다. 아운소 공주는 고여아의 아랫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위지불이는 자연스레 나사 공주의 아랫자리이자 아운소 공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위지불이는 까다로운 눈빛으로 세 공주를 유심히 살폈다. 그중 가장 인상이 좋은 공주는 아운소였다. 아운소 공주가 그녀에게 웃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나사 공주였다. 그녀를 보고 웃어 주진 않았지만 고여아 공주와 달리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점잖아 보였다.
반면 고여아 공주는 남제화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채였다. 곧 있으면 그의 얼굴에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남제화는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무례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물었다.
“오마烏摩 족장은 요즘 잘 지내시오?”
“아주 잘 지내십니다. 폐하께서 남산 위의 태양이시라며 눈부시게 빛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훗날 기회가 되거든 꼭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고도 하셨지요.”
“족장께서 과찬을 하셨구려.”
남제화가 고개를 돌려 나사에게 물었다.
“나사 공주,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 많았소.”
“아닙니다.”
나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부족 사회에서 자랐지만, 성격이 매우 차분했다.
“남원 황궁에 와서 폐하를 뵐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남제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아운소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타곤성이 처음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낯설진 않소?”
맞은편의 위지불이를 바라보고 있던 아운소는 남제화의 물음에 곧장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원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그녀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그가 이렇게 젊은 황제일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설마 아버지가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준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놀란 기색을 애써 숨긴 채 어여쁘게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상. 비록 어려서부터 남원에서 자랐지만, 타곤성은 처음입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에 오는 길 내내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는걸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오.”
남제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지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위지불이라고 동월 사람이오.”
세 공주는 다들 깜짝 놀랐다. 동월 사람이 남원 황제의 손님으로 와 있다니. 하지만 곰곰이 곱씹어 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십여 년 전, 동월은 남원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여제를 끌어내리고 남제화의 즉위를 도왔으니, 동월 사람은 남제화에게 귀한 손님일 터.
동월에 패전했을 때, 남원 백성들은 동월 사람들을 증오했다. 그 후 십여 년간, 동월 대군이 국경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딱히 남원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남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웃 국가들을 병풍처럼 막아 주었다.
그간 남원에 정착한 동월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 동월의 많은 상대商隊가 남원을 찾았다. 이제는 남원 백성들도 동월 사람들에게 호감을 보이고, 심지어 그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적잖은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아운소는 남제화의 소개를 듣자 비로소 깨달았다. 어쩐지 피부가 하얗다 했더니 동월인이었다. 그녀는 위지불이에게 미소를 지었고 위지불이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사도 위지불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여아는 곁눈질로 위지불이의 얼굴을 한 번 훑더니 시선을 금방 거두었다. 별로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