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2화
그녀는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궁전은 다른 궁전과 달리 크지 않았지만 매우 정교했다. 뾰족한 금빛 지붕에 예쁜 비첨이 높게 솟아 있었다. 보기엔 그런 정교한 건물들은 일고여덟 채나 되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금빛 비첨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 그녀가 본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반소매의 상의를 입은 사내들이 궁전 사이를 바삐 오갔다. 어떤 이는 목재를 옮기고, 어떤 이는 사다리를 타고 벽에 색을 칠했다. 또 어떤 이는 무언가를 열심히 두드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일꾼들이 궁전을 새로 단장하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위지불이는 의아했다. 궁 안에는 남제화 말고 다른 왕족은 없는데, 누가 이곳에 묵는단 말인가? 그녀는 밖에서 물을 떠 온 궁녀를 붙잡고 물었다.
“이 궁전을 수리하고 나면 누가 와서 산대요?”
그 궁녀는 위지불이를 알아보고 예를 갖춰 말했다.
“공자, 아직 모르십니까? 폐하께서 곧 비를 들이십니다.”
위지불이는 흠칫 놀랐다.
“…왜 난 몰랐죠?”
궁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폐하께서 너무 바쁘셔서 공자께 말씀을 못 드리셨을 수도 있지요.”
위지불이는 조금 화가 났다. 자신은 그의 제일 좋은 친구가 아니던가? 이렇게 큰일을 알려 주지도 않다니?
“공자, 괜찮으시지요?”
궁녀가 친절하게 물었다.
“물 좀 드시겠어요?”
위지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바쁠 텐데 어서 가서 볼일 봐요.”
궁녀는 물병을 이고 자리를 떴다. 위지불이는 궁녀가 꼭 강암룡과 비슷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민이 담긴 눈빛. 강암룡은 그녀가 중독되었기 때문에 가엽게 바라보는 것이지만, 저 궁녀는 대체 왜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란 말인가?
위지불이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공문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다시 궁전을 바라본 그녀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이곳은 남원 황제의 후궁이었던 것이다. 예전엔 비가 없었기에 이곳을 봉쇄해 두었지만 이젠 이곳의 주인이 생기기에 제대로 단장하는 것이겠지. 남제화의 황후와 비……. 위지불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왔던 길을 돌아왔다.
남제화가 비를 들인다는 소식에 그녀의 가슴은 메말라 버렸다. 만약 비를 들이면 그와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계속 함께 잘 수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위지불이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절대 그런 의미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가 혼인하면 예전처럼 깊은 우정을 나누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뿐이었다. 뭐랄까? 마치… 좋아하는 물건을 누군가 빼앗아간 것처럼 짜증이 났다.
그녀는 어깨가 축 처진 채 천천히 풀 위를 걸어갔다. 공작 몇 마리가 그녀를 보더니 하나둘 몰려들었다. 위지불이가 매일 먹이를 준 덕분에 서로 제법 가까워진 탓이었다. 먹이가 없더라도 위지불이는 공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오늘 위지불이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난 통에 공작들이 팔을 쪼아 대니 벌컥 화가 났다. 그녀는 발로 공작들을 휙 차 버렸다. 깜짝 놀란 공작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나무 위로 도망쳤다. 자그마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위지불이는 계속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그녀의 시야에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 들어왔다. 신발엔 반짝이는 흑요석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신발에서부터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개를 드니 미소를 짓고 있는 남제화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그가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위지불이는 입꼬리를 올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폐하께서 비를 들이신다면서요. 축하드려요!”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불이, 이 일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위지불이가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뻐도 모자랄 판국에 기분이 나쁘다니요. 폐하께서 드디어 남색을 밝힌다는 혐의를 벗으셨잖아요!”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좋은 일이구나.”
“당연히 좋은 일이고말고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하지만 줄곧 비를 들이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연유가 궁금하네요.”
남제화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미소이기도, 또 조금은 씁쓸한 미소이기도 했다. 그라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었겠는가.
‘그러게 왜 마음대로 지하 감옥에 들어가 여제를 건드려서는. 여제가 네 목숨을 담보로 짐을 위협하는데, 짐이 어찌 네가 죽는 걸 보고만 있겠느냐? 불이, 짐이 이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다면 넌 죽었을 것이다.’
* * *
그간 위지불이는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남제화를 찾아갔지만, 지금은 달랐다. 우선 남제화가 바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항상 늘어져 있던 과거와는 달리 그는 매일 의사당에 나가거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진 것도 한몫했다. 남제화는 예전과 똑같이 그녀에게 다정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의도적으로 위지불이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위지불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제화 앞에선 거리낌 없던 위지불이도 점차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요즘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강암룡을 찾았다. 과거의 원수가 지금은 사이좋은 동반자가 되었다. 강암룡에게 들은 바로는 이번에 궁에 들이는 비는 총 세 명이며 전부 다 어느 부족의 공주라고 했다.
남원엔 부족이 아주 많다고 했다. 대다수 남원인들을 제외하고도 소수로 구성된 부족들도 여럿이었다. 이 부족들은 남원 국경에 영토와 군대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비록 인구는 적지만 용맹스럽기로 소문이 자자한 부족들이었다.
부족의 공주가 남원 황궁으로 시집을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한 번에 세 명이나 오게 된 것이니 그야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 공주는 각각 파목岜木 부족의 아운소阿雲蘇 공주, 마온극摩溫剋 부족의 고여아古麗婭 공주, 혁흑철赫黑哲 부족의 나사那莎 공주였다. 위지불이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강암룡의 말을 중간에 끊어 버렸다.
“폐하께서는 공주들을 다 만나 보셨어요?”
“물론 아니지.”
강암룡이 말했다.
“황궁에 오시는 건 세 분이지만 황후의 자리엔 한 분만 올라가실 수 있지 않으냐? 그 일로 폐하께서 아마 머리가 아프실 게다. 셋 중 누구를 황후로 맞이해야 좋을지 모르실 테니까.”
위지불이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비뽑기로 하면 되죠. 황후라고 적힌 표찰을 뽑은 사람이 황후가 되는 거예요.”
강암룡은 위지불이를 보며 혀를 찼다.
“이게 무슨 장난인 줄 아느냐. 폐하께서 황후를 맞이하시는 일이니 그 무엇보다 진지해야 한다.”
위지불이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니면 제일 예쁜 공주를 고르면 되죠.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 황후니까요.”
강암룡은 또다시 반대했다.
“우리 폐하께선 그렇게 가벼운 분이 아니시다.”
위지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폐하께선 어찌하신대요?”
“석 달.”
강암룡이 말했다.
“석 달 동안 세 공주를 시험할 거라고 하시더구나. 폐하의 시험을 통과한 공주는 황후가 되고 나머지 둘은 비가 되는 것이지.”
위지불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남원에서 황후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네요. 시험이라니… 악기 연주나 그림 실력을 확인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자수나 요리 실력이요?”
“그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세 공주를 시험할 거라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세 공주가 황궁으로 오는 게 기다려졌다.
기다리는 시간은 조금 길게 느껴졌다. 남제화는 점점 더 바빠져서 요즘은 함께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여전히 같은 곳에서 지내긴 했지만, 위지불이는 며칠 동안이나 남제화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심심할 때면 남제화가 가르쳐 준 무술을 다시 연습했다. 하지만 연습 도중 넋을 놓기 일쑤였다.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무술을 알려 주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그녀의 허리를 비틀고, 엉덩이를 때리는 등 누구보다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아무래도 혼사를 앞둔 사람이니 머릿속에 온통 세 공주 생각뿐일 테지.
그날 밤, 그녀는 방에 앉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제화가 돌아오는 발소리를 들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전은 너무 컸고 다들 맨발로 걸어 다녔기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데 어찌 인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조용히 탄식을 내뱉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여제에게 중독을 당했으니 예전보다 더 잘 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무런 관심도 없을 줄이야. 그녀는 꼭 버려진 강아지처럼 괜스레 씁쓸하고 괴로웠다.
“불이.”
그때, 사내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문 앞에서 전해졌다. 위지불이는 재빨리 베개를 껴안았다. 절망적이던 얼굴엔 어느새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녀는 둥글게 휜 눈매로 자신에게 걸어오는 남제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폐하, 오셨어요.”
“이렇게 늦었는데 왜 아직 자지 않고?”
위지불이는 맨발로 갈색 나무판 위에 내려왔다. 하얀색 장포를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베개를 품에 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등불이 위지불이를 은은하게 밝히니 정말이지 성별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남제화는 마음이 조금 동요되었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베개를 안고 있다는 건… 내 침전에서 자고 싶다는 뜻이더냐?”
위지불이는 입을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묵인한 것 같았다.
“가자.”
그가 손짓했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침대에는 뱀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무서울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따라갔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안심시켰다. 남제화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남자로 알며 좋은 친구로 여기고 있다고 말이다! 좋은 벗끼리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아닌가! 이번에는 위지불이가 먼저 나서기도 전에 남제화가 직접 베개를 꺼내와 침대 가운데에 올려 두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오랜 규율 아니더냐.”
위지불이는 얼굴을 붉힌 채 침대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