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0화
위지불이는 눈을 뜬 채 어둠 속 희미한 그림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스레 설움이 밀려왔다. 고작해야 십 대인 그녀가 이런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곳엔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슬프고 무서운 마음에 자꾸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정말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족장과 형제자매들도 전부 다.
“불이.”
뒤에서 갑자기 남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위지불이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 좀 이리 내어 보거라.”
“왜요?”
그녀가 물었다.
“또 잠이 안 오세요?”
“응.”
그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위지불이는 몸을 돌려 가운데 놓인 베개 위에 손을 올렸다.
남제화가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젖어 있었다. 눈물이라는 건 그도 알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천천히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밖엔.
사내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그 따뜻한 기운이 손끝을 따라 그녀의 몸에 퍼졌다. 서글펐던 마음에도 천천히 온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위지불이는 베개 옆으로 몸을 가까이 옮겼다. 따뜻한 온기를 좀 더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폐하, 절 꼭 지켜 주셔야 해요. 전 죽기 싫어요.”
“꼭 지켜 주마.”
남제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전해졌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살아 있을 것이다.”
위지불이가 재빨리 물었다.
“폐하가 죽으면요?”
그녀는 물어보자마자 곧장 후회했다.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고 있었다. 만약 동월에서 황제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 천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그녀가 서둘러 말을 번복했다.
“그냥 헛소리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난 그런 말에 마음 쓰지 않는다. 사람은 언젠간 다 죽으니까.”
남제화가 잠시 한숨을 쉬다 말했다.
“죽는다 한들… 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위지불이는 그의 말에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폐하…….”
남제화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거라. 난 황제니까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네가 내 옆에 있어 준다면 우린 오래오래 살 거다.”
위지불이는 그의 마지막 말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괴로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한 것도 아닌… 대추탕에 설탕 한 숟갈 탄 기분이랄까. 앞으로 남은 여생을 그와 함께 보내야 한다면…….
“불이, 날 죽이지 않을 게지?”
“폐하는 여제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안 죽이죠.”
위지불이가 말했다.
“여제가 폐하의 어머니라고 해도, 여제는 여제고 폐하는 폐하예요. 똑같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폐하도 여제랑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니까요.”
남제화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앞으로 늘 내 곁에 있거라. 날 황제가 아닌 친구라고 여기며 말이다.”
“네. 우린 제일 좋은 친구예요.”
남제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일 좋은 친구?”
위지불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일 좋은 친구!”
* * *
이튿날, 위지불이는 늦잠을 잤다. 장막 밖에서 궁녀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께선 아직도 주무시나?”
누군가 쉿 소리를 내며 소곤소곤 말했다.
“조용히 하거라, 그러다 깨겠다. 어서 나가거라.”
궁녀들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전부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밖으로 내보낸 건 다름 아닌 남제화였다. 평소였다면 남제화는 정전에 갔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침전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몸을 바닥에 붙인 채 고양이처럼 장막을 뚫고 나가니 남제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폭신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조용히 다가가 그를 놀라게 할 생각이었지만 남제화가 더 빨랐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걸을 줄도 모르는 것이냐, 어찌 기어 나오는 것이야?”
위지불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움직인 건 어찌 알았지? 그녀가 장막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폐하는 쥐띠예요? 귀가 왜 이렇게 밝아요?”
남제화는 일부러 얼굴을 굳혔다.
“무엄하다, 어찌 짐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위지불이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황제가 아닌 친구로 생각해 달라면서요!”
친구 앞에서는 당연히 격식을 차리지 않는 법이거늘. 그 말에 남제화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자고 일어나면 네가 잊을 줄 알았다. 잊지 않았구나.”
그는 이곳에서 계속 위지불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혹여 잠에서 깨고 난 뒤, 어젯밤 일을 떠올려 속상해할까 봐. 하지만 위지불이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여전히 격식을 차리지 않은 말투에 그는 한시름 놓았다.
햇살이 창문을 내리쬐며 찬란한 빛을 뿌렸다. 환한 금빛 줄기는 커다란 침전을 반으로 갈랐다. 빛을 사이에 둔 채 위지불이와 남제화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리 오거라.”
남제화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위지불이는 앞으로 두 발짝 걸어 나갔다. 그녀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햇살 안에 서자 꼭 불 속에 있는 봉황 같았다. 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투명하리만큼 새하얀 얼굴… 유리처럼 빛나는 까만 눈동자까지. 그녀의 움직임에 너른 장포는 가볍게 바람을 일으켰고 옷깃 사이로 고운 쇄골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제화는 순간 입안이 바싹 타는 기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위지불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먼저 그녀를 불러 놓고 갑자기 밖으로 나가 버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제왕은 워낙 괴짜들이 많은 법. 더 깊게 생각하기도 성가셨던 위지불이는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가 세수부터 했다. 너무 늦게 일어난 탓에 위지불이는 곧장 점심부터 먹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남제화와 강암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물으니 남제화는 의사당議事堂에서 장로들과 논의 중이라고 했다.
의사당은 남원 황제가 정무를 보는 궁전이었다. 황제답지 않은 황제는 이곳에 이따금 한 번씩 들릴 뿐, 대부분 장로들끼리만 일을 처리했다.
남제화가 없어도 궁녀들은 평소처럼 예를 갖추고 위지불이의 식사를 챙겼다. 한창 밥을 먹던 중, 갑자기 그 벌레가 생각난 위지불이는 왼쪽 소매를 걷고 제 팔뚝을 유심히 살폈다. 남제화는 고충이 휴면 상태라고 했지만, 그래도 음식은 먹어야 할 것 아닌가. 그녀가 먹는 음식이 혹 고충의 먹이가 되진 않을까?
그녀는 남제화를 흉내 내며 두 손가락을 펼쳐 팔을 몇 차례 때렸다. 하지만 고충은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있던 궁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공자, 무얼 하시는 것인지요?”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은 모르기에 위지불이는 말을 아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을 다 먹은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 산책을 했다. 그때 보리수나무 뒤에 선 두 궁녀가 무어라 속닥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위지불이의 귀가 쫑긋거렸다.
“괜히 이 일에 끼어들지 마. 폐하께서 얼마나 격노하셨니? 그래도 그 애들 목숨은 살려 주셨잖아. 혀를 자르고 죄인罪印만 새기신다니… 폐하께서도 이미 많이 봐주신 거야.”
다른 궁녀가 탄식을 내뱉었다.
“옥향玉香이는 내 친동생이라고. 말도 못 하고 얼굴에 죄인까지 찍히면 앞으로 시집은 어떻게 가란 말이야?”
“말을 못 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죄인이 문제이긴 해. 평생 업신여김당할 텐데.”
“내 말이. 혼자 업신여김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까지 모욕을 당해야 한다고. 온 식구들이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거야.”
말을 내뱉은 궁녀는 훌쩍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옥엽玉葉아, 울지 마.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한번 사정을 드려 볼게. 들어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울음을 터뜨린 궁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 일은 위지 공자 때문에 일어난 거니까 위지 공자한테 부탁을 드려 보면 어떨까?”
위지불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뒷짐을 진 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한테 무슨 부탁을 한단 말이에요?”
깜짝 놀란 두 궁녀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공자,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제게 무릎을 꿇는 게 어색했던 위지불이는 재빨리 그들을 일으켰다.
“몰래 엿들은 게 아니라… 마침 이 옆을 지나가는 참이었어요. 말해 봐요. 무슨 부탁인데요?”
두 궁녀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 옥엽이라는 궁녀가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알고 보니 위지불이가 어제 꽃밭에서 마주친 두 궁녀 중 한 사람이 옥엽의 여동생이었다. 두 궁녀 때문에 위지불이가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남제화는 격노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두 궁녀의 혀를 자르게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얼굴에 죄인을 새기라 명했다는 것이다.
위지불이는 깜짝 놀랐다. 남제화가 두 궁녀에게 엄벌을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혀를 자르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이미 잘랐대요?”
옥엽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답했다.
“소인은 아직 모릅니다. 둘 다 옥에 갇혀 있는데 아무도 들여보내 주지 않습니다.”
“나도 데려가 줘요.”
두 궁녀는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재촉했다.
“어서 앞장서요. 늦으면 혀가 잘릴지도 모른다고요.”
옥엽은 눈물을 흘리며 위지불이를 데리고 갔다. 옆에 있던 궁녀는 여전히 주저했지만 결국 두 사람의 뒤를 쫓아왔다.
궁 안의 서북쪽. 인적 드문 그곳엔 범인들이 갇혀 있었다. 세 사람이 다가가자 곧장 검을 찬 시위가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죄당罪堂이오. 상관없는 자들은 어서 돌아가시오.”
위지불이가 말했다.
“난 들어가야겠네.”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 못 들었소? 다들 죄가 있어 이곳으로 들어가려는 것이오?”
위지불이가 옥엽을 가리켰다.
“이 궁녀의 여동생이 안에 있네. 들어가서 좀 봐야겠어.”
“폐하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소.”
같이 온 궁녀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불이 공자이십니다. 폐하 곁에 계신 분이시지요. 그래도 들어갈 수 없단 말입니까?”
위지불이가 고개를 치켜세우고 당당히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궁 안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도 좋다고. 날 가로막는 자가 있거든 폐하께 고하겠네.”
궁 안에서 위지불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 두 궁녀가 지하 감옥에 갇힌 이유도 모두 이 위지불이 때문이 아니던가. 하지만 규율은 규율이었기에 시위는 차마 위지불이를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때, 안에서 갑자기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위지불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 또다시 참혹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