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9화
그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위지불이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베개를 껴안은 채 그를 따라나섰다. 남제화는 순순히 따라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니더냐?”
“맞아요.”
하품하던 위지불이는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더니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오래 기다렸다고요.”
남제화는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기다리지 말거라. 무슨 일이 있거든 나를 찾아와 하인들에게 고해 달라고 하면 된다.”
위지불이가 그를 흘기며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는 황제잖아요!”
“황제?”
남제화가 그녀의 말을 따라 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세상에 나같은 황제가 어디 있겠느냐?”
지켜 주고 싶은 사람도 지켜 주지 못하는 황제가…….
“맞아요. 폐하는 전혀 황제 같지 않아요.”
“그래서 줄곧 넌 날 황제로 여기지 않았잖느냐.”
위지불이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앞으로는 안 그럴 거예요.”
이제 남제화가 여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그를 존중하기로 했다. 위지불이는 여느 때처럼 그와 자신 사이에 베개를 하나 두었고, 품에도 베개를 하나 꼭 껴안았다. 남제화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하러 늘 그리 베개를 끌어안는 것이냐?”
위지불이는 조금 뒤가 켕겼다.
“그냥 습관이에요.”
사실 이곳에 온 뒤에 생긴 습관이다. 그와 처음 밤을 보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베개를 안고 자기 시작했다. 오늘은 미리 가슴을 동여매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여전히 습관적으로 품에 베개를 안았다. 이렇게 하는 편이 조금 더 안심이었기 때문이다.
“폐하, 오늘 밤엔 이야기해 주는 대신… 우리 둘이 대화 좀 나누면 안 될까요?”
남제화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위지불이는 서둘러 첫 번째 질문을 건넸다.
“폐하는 여제가 아닌데 왜 절 속인 거예요?”
“그건…….”
남제화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위지불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째서 강암룡이나 그나 똑같은 말만 해 댄단 말인가? 역시 그 주인에 그 노비였다.
“폐하, 오늘 일 때문에 화나셨어요?”
“그래, 화났다.”
“제가 여제를 죽이려 해서요?”
“네가 독단적으로 그곳에 찾아가서.”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독단적으로 여제를 찾아가 화가 났다는 건 그녀가 여제를 죽이려 해서 화가 났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닌가?
“제가 여제를 죽이려 했는데 화 안 나세요?”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네가 이곳을 찾은 목적이라는 거 안다.”
“폐하께서 제가 여제를 죽이게 내버려 두실까요?”
“아니, 어쨌든 여제는 내 어머니니까.”
“그러니까 폐하는 절 막으실 거란 말이에요?”
“그래.”
그녀 역시 남제화처럼 움직일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면 필사적으로 그자와 싸우겠지. 하지만 이상했다. 남제화의 표정엔 어떤 분노도 찾을 수 없었다. 제 어머니를 죽인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맞는 걸까. 그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에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
“폐하는 여제와 사이가 안 좋으세요?”
“그래, 안 좋다.”
남제화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여제는 그곳에 감금된 거예요?”
“그래, 그곳은 지하 감옥이다.”
남제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제를 완전히 감금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폐하는 여제한테 신경을 많이 쓰시잖아요. 지하 감옥이라고 해도 아주 크고 화려하던 걸요.”
잠시 침묵하던 남제화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푸대접할 수는 없었다.”
위지불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슬쩍 그를 떠보듯 물었다.
“어쨌든 폐하는 여제가 아니니까… 혹시 우리… 친구로 지낼 수 있어요?”
남제화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정말 된다고요?”
위지불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제가 폐하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저랑 친구를 하겠다고요?”
“난 네가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거든.”
“왜요? 실력이 그렇게 대단해요?”
“독을 아주 잘 쓰신다.”
“강암룡보다요?”
“강암룡보다 더 대단한 실력이지.”
위지불이는 탄성을 질렀다.
“여제는 몇 위인데요?”
“1위.”
그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 1위라는 말에 위지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말로요?”
“그래, 정말로. 그런 실력이 없었더라면 어찌 너희 공자에게 독을 썼겠느냐?”
위지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제화 앞에서 하기엔 도리에 어긋난 말이었지만 그녀는 도무지 화를 속으로 삼킬 수 없었다.
“여제는 분명 우리 공자를 연모했던 거예요.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애정이 증오로 바뀐 거죠. 그래서 공자를 죽인 거예요.”
여제가 정식 혼인을 통해 들인 황부는 세 명뿐이었지만, 염문설은 적지 않게 들려왔다. 위지문우의 외모라면 여제의 마음이 동요했을지도…….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우리 공자는 잘생겼으니까요.”
위지불이가 부끄럽다는 듯 코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처음에는 폐하가 우리 공자에게 흑심을 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제화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 남색에는 관심 없다니까.”
위지불이가 멋쩍게 웃었다.
“지금은 폐하를 믿어요.”
“또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위지불이가 고민 끝에 답했다.
“없어요.”
“이제 내 차례다.”
남제화가 팔꿈치를 괴고 그윽한 눈망울로 위지불이를 응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널 돌려보내려 했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불이, 넌 이곳에 남아야 해.”
위지불이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돌아갈 수 없게 됐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제화가 말했다.
“넌 지금 중독되었다. 돌아가면 목숨을 잃을 거야.”
“그럴 리가요. 제가 중독됐다고요?”
위지불이는 서둘러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기를 모았다. 어디가 잘못된 느낌은 없었다.
“전 멀쩡한데요.”
그때 남제화가 그녀의 왼쪽 팔을 잡아끌어 와 옷소매를 걷어 보였다. 그가 두 손가락으로 팔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팔 한곳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더니 콩알만 한 덩어리가 볼록 튀어나왔다. 위지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고충蠱蟲.”
“충이요? 벌레?”
위지불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벌레를 무서워하진 않지만, 몸에 벌레가 들어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가 손톱으로 볼록한 부분을 꼬집었다.
“이렇게 죽이면 안 돼요?”
“꼬집어도 죽지 않는다.”
“그럼 제가 칼로 살을 베서 꺼낼 테니까, 폐하가 벌레 좀 잘 지켜봐 주세요.”
기상천외한 그녀의 말에 남제화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상기하고 입꼬리를 내렸다.
“소용없다. 이미 도망쳐서 잡을 수도 없어.”
“그럼 어떡해요?”
위지불이가 울상을 지었다.
“전 몸속에서 벌레 키우기 싫어요. 너무 징그럽단 말이에요.”
“걱정 말거라. 평소에는 이렇게 튀어나오지 않으니까 있는 줄도 모를 거야. 방금은 내가 나오게 한 것이다.”
남제화가 그녀의 팔을 놓자 자그마한 덩어리는 금세 사라졌다. 애당초 그녀의 몸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위지불이는 제 팔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어요?”
“고충은 신경 쓰지 말거라. 없다고 여기는 것이 좋을 거다.”
“하지만 분명히 있잖아요.”
위지불이는 무서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벌레가 제 몸을 갉아 먹는 거 아니에요? 제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남제화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내 곁에 있는 한… 무사할 거라고 약속하마.”
“그럼 전 이제 동월로 못 돌아가요?”
“…당장은 못 간다.”
위지불이는 제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부모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뚝 떨어졌다. 침대 맡에 놓인 연꽃 모양의 유리 등잔이 밝은 빛을 내뿜었다. 남제화는 영롱한 구슬을 닮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그의 가슴을 쥐어짜듯 저릿했다.
“불이.”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내 탓이다. 널 진작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위지불이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폐하 탓 아니에요. 이곳에 남아야 한다면 남으면 그만이죠. 사실 나쁠 것도 없고요.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옷도 입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잖아요. 게다가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으니 복에 겨운 삶이죠.”
그래, 동월로 돌아가겠다고는 했지만 사실 남원에 미련이 가득한 참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며칠 전까지 그녀를 사로잡던 불안하고 막막한 마음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가 돌아가기 싫은 게 아니라 돌아갈 수 없으니까!
“제가 뭐 주의해야 할 거라도 있어요?”
“평소처럼 지내면 된다. 이 고충은 네 몸속에서 휴면 상태로 있을 것이다. 고충의 주인이 불러내야 명을 받을 수 있지.”
위지불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제가 이 고충을 제어한단 말이에요? 제 목숨을 거두고 싶을 땐 언제든 거둘 수도 있고요?”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있으면 널 함부로 죽이지 못할 테니까.”
“정말 비열해요!”
위지불이가 물었다.
“여제가 우리 공자에게도 이런 독을 쓴 거예요?”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 제가 여제를 죽이면요?”
남제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제가 죽으면 너도 죽을 것이다.”
“…….”
앞으로 여제를 죽일 수도, 공자의 원한을 갚을 수도 없다니……. 게다가 몸 안에서 여제의 고충을 키워야 하는 신세가 됐다니… 정말 속상했다.
“늦었다. 어서 자자, 불이.”
위지불이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몸 안에 벌레가 있는데……. 하지만 영영 자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탄식을 내뱉고는 옆으로 몸을 틀어 누웠다.
남제화는 입김을 불어 침대 맡의 등불을 껐다. 두 눈이 어둠에 적응되자 등을 지고 누운 위지불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으로 보이는 녀석의 허리는 너무도 얇았다. 이불 밑에서 쌕쌕 숨소리가 들렸지만,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 안에 벌레가 있다는데 누가 편히 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