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8화
위지불이는 조금 뜻밖이었다.
“날 아는가?”
여제가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갇혀 밖을 나가진 못하지만, 알고 싶은 건 다 알 수 있지.”
위지불이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여제인가?”
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여제, 지금은 태황.”
“우리 공자를 네가 죽인 것이냐?”
“위지문우?”
여제는 보석이 박힌 흑단 의자에 앉았다.
“위지문우와 넌 같은 집안 사람일 테지. 그래서 내게 복수를 하려고 찾아온 것이냐?”
위지불이는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 공자를 네가 죽인 것이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여제가 마지못해 답했다.
“그가 어리석었기 때문이지만……. 살 수도 있었는데 기어코 죽음을 택했으니.”
위지불이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알고 보니 여제는 우리 공자를 연모했다가 가질 수 없자 공자를 죽인 듯했다. 애정이 증오로 변한 것이겠지! 그녀는 그간 남제화를 오해했다. 그가 사내를 좋아한다고 말이다. 그럼 그는… 사내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그녀는 다시 여제에게 집중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여제를 죽이고 공자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 주변을 훑어도 지금 이곳에는 여제와 그녀밖에 없었다. 정말 하늘이 그녀를 돕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단도를 뽑아 들고 매섭게 여제를 노려보았다.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여제가 그녀의 칼을 보더니 기괴한 표정으로 웃었다.
“황제가 상으로 내린 칼이냐?”
위지불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제화가 선물한 칼로 그의 어머니를 죽이다니. 아무래도… 이건 조금 아닌 듯했다……. 하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알 바 아니야.”
여제는 계속 그녀의 칼을 응시하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가 너에겐 제법 잘해 주는구나.”
“말 돌리지 마.”
위지불이가 매섭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자꾸 꾸물대면 나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
여제는 별안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넌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위지불이가 칼을 가슴 앞에 가로로 가져다 댔다.
“한번 해 보지.”
여제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곤 꼭 위지불이를 한심하고 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면 위지불이는 무기도 없는 부인을 죽이려니 엄청난 내적 갈등이 일었다. 공자의 원한을 갚아야 했지만 역시나… 남제화에게 미안했다.
잠시 뜸을 들이고 있는데 갑자기 정신없이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두운 복도를 지나 이리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또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남제화가 분명했다. 이제 걷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남제화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동안 그와 너무 가까이 지낸 탓이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그녀는 남제화의 근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물론 걱정스럽겠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려 하니까.
그를 발견한 순간, 위지불이는 자신과 남제화의 사이가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괴로웠다. 그녀는 괴로움에 칼을 거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공자의 복수는 그녀 인생의 목표인데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심장이 가쁘게 뛸수록 위지불이는 손에 쥔 칼을 더 세게 쥐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가락 마디가 새하얘질 정도였다. 그녀가 칼을 휘두르기 전, 남제화는 빠르게 달려와 긴 팔로 그녀를 끌어냈다. 그의 빠른 동작에 위지불이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비틀거리며 발을 내디딘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자신의 어머니라 이렇게 걱정하는구나. 내가 여제를 다치게 할까 봐.’
하지만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샅샅이 살폈다. 그가 근심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제화는 안색을 굳히더니, 분노에 찬 눈빛으로 여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릴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어찌 감히… 어찌……!”
위지불이는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남제화는 응당 여제를 걱정하고 위지불이에게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롭기도 하고, 엄청난 위엄이 느껴지기도 하는 웃음이었다.
“내가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이냐? 화아, 이번엔 모황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테지?”
남제화는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가 몸을 돌려 위지불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겁먹지 말거라. 내가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먼저 바깥에 나가 있거라. 금방 나가마.”
남제화뿐만 아니라 그의 병사들도 위지불이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무리에 있던 강암룡도 언짢은 시선이 아닌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의문을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강암룡은 손짓을 하며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따스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따라가거라. 나도 곧 갈 테니.”
결국 위지불이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강암룡을 따라갔다. 육중한 철문을 지나 어두운 계단을 오른 뒤, 그녀는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다. 위지불이가 강암룡에게 물었다.
“강 총관, 황상께서 제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아셨어요?”
강암룡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것이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황상의 어머니는 왜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저곳은 궁전이에요? 아니면 감옥이에요?”
강암룡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위지불이는 눈을 희번덕였다. 무엇 하나 제대로 대답해 주는 게 없었다. 그녀는 끈기 있게 물었다.
“저 사람이 정말 여제예요? 우리 공자를 죽인 그 여제?”
이번엔 강암룡도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래.”
위지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여기서 지내는 걸 알았으니 다음번에 제대로 준비해서 공자의 복수를 갚아야지.’
하지만 강암룡은 이미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했다.
“앞으로 이곳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거라.”
“왜요?”
“나중에 다 알게 될 것이다.”
“쳇!”
위지불이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몸을 틀었다.
한참 뒤 석양이 질 무렵, 마침내 남제화가 밖으로 올라왔다. 아무 일 없는 척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위지불이는 그의 눈망울에 서린 걱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강암룡이 그를 맞이했다.
“폐하.”
남제화가 손을 내저으며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가 위지불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만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남제화는 그녀를 책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로 남제화가 화가 난 것 같진 않자 위지불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피곤하지? 미리 마차를 준비하라고 분부해 놓았다.”
남제화가 옆에 있는 사인용 마차를 가리켰다.
“타거라, 짐도 함께 타마.”
마차는 두 사람이 앉고도 아주 여유로울 만큼 크고 넓었다. 그녀는 남제화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앉았다. 얇은 옷자락이 팔을 스치며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위지불이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때, 남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이, 오늘 밤은 같이 자자꾸나.”
위지불이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가, 같이 자자고요? 왜요?”
“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렴.”
위지불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황상, 제가 우리 마마와 사 주인장에 대해서 아는 건 고작 그게 다예요. 벌써 몇 번이나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해 드렸잖아요.”
“그럼 너에 대해 이야기해 다오.”
그가 잠시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짐이 네게 이야기를 해 주마.”
남제화에게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위지불이는 쏟아지는 졸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꾸벅꾸벅 졸던 그녀의 몸은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남제화는 그런 위지불이의 모습을 바라보다 제 어깨를 내주었다. 그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지어졌지만, 그 미소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뒤, 그는 손을 들어 위지불이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마 머리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을 때, 깜짝 놀라며 손을 내려놓았으니까.
그는 망연한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태황이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쩌면 그녀는 시기적절한 때를 골라 그런 제안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대전에 도착했지만, 위지불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남제화가 조심스레 깨우자 위지불이는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입에 묻은 침을 닦았다.
“무슨 일이에요?”
“다 왔다. 내리자꾸나.”
“아.”
위지불이는 가마에서 나와 계단을 올랐다. 몇 걸음 걷던 그녀는 자신이 황제보다 앞서가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아래로 내려와 그가 먼저 가길 기다렸다. 남제화가 물었다.
“날 기다린 것이냐?”
“폐하께서 먼저 가시어요.”
남제화가 그녀를 놀렸다.
“제법 철이 들었구나.”
위지불이가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폐하.”
“응?”
“그게… 오늘 일…….”
“오늘 일은 밤에 다시 얘기하고, 우선 밥부터 먹자꾸나.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좀 남았다.”
위지불이는 밥을 먹자는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녀는 아주 배가 고팠다.
저녁 어선은 평소보다 푸짐하게 차려졌다. 위지불이는 한 상 가득 차려진 귀한 음식들을 보다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어서 먹으라고만 했다. 남제화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듣는 그녀는 열심히 식사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맛은 제법 좋았다.
다른 날에 비해 남제화는 유독 적게 먹었다. 위지불이 눈에는 그가 근심에 잠겨 잘 먹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일 때문인가 싶어 말을 꺼내 보려 했지만, 막상 말하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그녀가 남제화의 어머니를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밥을 다 먹은 뒤, 남제화는 서재에 갔다. 위지불이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지만, 밤이 되어도 남제화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그를 기다리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사실 누워만 있을 뿐 잠은 오지 않았다. 의문스러운 점이 너무 많았다.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데 남제화가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불이, 내 침대에서 자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