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7화
이튿날 아침, 남제화는 일어나자마자 복도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금빛 태양은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그녀 얼굴에 난 가는 솜털이 햇살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는 속으로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집을 그리워하지 않는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아무리 좋은 집에 있더라도 초가삼간인 내 집만 못한 법.
그 후, 위지불이는 아침마다 복도에 서서 태양이 솟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는 결국 이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동월이 그리운 것이라면 짐이 널 바래다줄 사람을 붙여 주마.”
위지불이는 잠시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이곳에 폐하를 암살하러 온 것인데, 폐하가 붙여 준 호위병과 돌아간다면 우리 위지 가문의 체면이 어떻겠어요? 오히려 절 물 먹이시는 거예요.”
남제화가 말했다.
“그럼 대놓고 호위하지 않고 암암리에 보호하라고 하마. 어떠하냐?”
“절 여기에 계속 두고 싶으신 거 아니셨어요?”
남제화가 붉은 해를 바라보았다. 영준한 그의 얼굴에 서글픔이 묻어났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는 법이지. 불이, 난 네가 계속 이곳에서 지내면 좋겠지만, 동월이 네 집 아니더냐. 네 부모와 친구들도 모두 동월에 있으니 그곳이 그립겠지.”
위지불이는 혼란스러웠다. 집이 그리운 만큼 남원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막상 이곳을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밀려왔다. 게다가 아직 임무를 완수하지도 못했는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전…….”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남제화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든 돌아가고 싶을 땐 말만 하거라. 널 데려다줄 사람을 구해 줄 테니.”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어내리자 온기가 느껴졌다. 위지불이는 가슴이 조금 시큰거렸다. 만약 이곳을 떠난다면 앞으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겠지. 남원에 온 후로 그녀는 그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분명 남제화에게 복수를 하려고 찾아온 것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의 시종과 겨루고 있지 않은가. 남제화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자객인 걸 알면서도 무술을 가르쳐 주다니. 원수가 사부가 되고, 함께 먹고 자며 이따금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들기도 했다…….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녀는 더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떠나자. 이곳을 떠나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터.
위지불이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짐을 정리하던 그녀는 그간 남제화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선물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매번 선물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음에 드는 건 곁에 두고 며칠씩 가지고 놀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상자에 휙 던져 놓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그녀의 방에 상자가 한 개뿐이었지만, 지금은 네 개나 놓여 있었고 안에는 그녀의 물건이 가득했다.
그녀는 쇠뿔 모양의 나팔을 집어 들었다. 나팔의 몸체엔 정교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나팔을 가볍게 불어 보자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듣자니 양쪽 군대가 대치할 때 이런 나팔을 분다고 했다. 원래는 남제화의 서재에 놓여 있던 것인데, 그녀가 호기심에 만지작거리니 남제화가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또 단도를 꺼내 보았다. 남제화는 그녀에게 첫 단도를 시작으로 이미 네 개의 단도를 선물했다. 모든 단도가 다 정교하고 예리했다. 칼집에는 각종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언젠가 단도를 차고 궁 밖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광장에서 한창 구경을 하는데 누군가 금 백 냥과 그녀의 단도를 바꾸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녀도 자신의 칼이 매우 귀한 물건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황금 백 냥의 가치와 맞먹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도든 검이든 남제화의 말에 의하면 모두 명검이었다. 다만 키가 작았던 그녀는 검을 차고 다니는 게 불편해서 거의 쓰지 않았다. 하지만 동월에 가져갈 수는 있으니 잘 챙겨 두기로 했다. 아마 집안 형제들이 다들 눈독을 들일 테지.
그녀는 검은 바탕에 금색 꽃이 그려진 육각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진홍색 구슬 한 꿰미가 들어 있었다. 낮에는 평범한 구슬처럼 보였지만, 밤에 등불을 비추면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구슬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그 모습에 한참을 웃으며 놀렸다.
“어찌 여인들의 장신구에 그리 관심을 보이는 것이냐?”
그녀가 대꾸했다.
“우리 여동생한테 걸어 주면 정말 예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남제화는 구슬을 선물로 주었다.
“그럼 여동생에게 선물로 주거라.”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구슬은 희귀한 보석을 연마해 만든 것으로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남제화에게도 한 개밖에 없던 것인데 그녀의 말 한마디에 곧장 상으로 준 것이다.
이렇듯 그는 그녀에게 정말 잘해 주었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보다 더 잘해 주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들어 주었고, 그녀를 때리거나 혼내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구슬을 바라보며 천천히 넋을 놓았다. 어찌 된 일인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결심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건을 도로 넣어 두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 옆에 놓인 다른 세 상자를 훑어보았지만,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혹 이 물건을 전부 가지고 돌아가면, 날마다 남제화가 생각나진 않을까?
그녀는 남제화가 있는 전전前殿에 가지 않고 편전에서 바로 내려와 산책했다. 마음이 허공에 붕 뜬 것처럼 산란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도 없었다.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드넓은 꽃밭이 펼쳐졌다. 그녀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꽃밭 안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꽃이 더욱더 빽빽했고 키도 컸다. 코끝을 찌르는 꽃내음에 취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꽃밭 한가운데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꽃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어서 가자. 늦으면 태황께서 또 성질을 부리실 거야.”
“알겠어. 재촉하지 좀 마. 국물이 넘치지 않게 조심하고.”
“에휴, 요즘 태황께서 점점 더 포악해지신다니까. 어젠 황상과 또 대판 싸우셨잖아.”
위지불이는 그들의 대화에 흠칫 놀랐다. 황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황상이 아니던가. 어찌 또 태황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꽃줄기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두 궁녀가 찬합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찬합을 머리에 이고 춤을 추듯 사뿐히 걷고 있었다.
“두 누이들.”
그녀가 예를 갖춰 그들을 불렀다. 두 궁녀는 위지불이를 바라보고 흠칫 놀랐다. 남원의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피부가 새하얗고 얼굴도 곱상한 게 남원 사람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한 궁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다른 궁녀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위지 공자이시죠?”
“네. 위지불이예요.”
두 궁녀는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한결 따뜻한 태도로 말했다.
“불이 공자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길을 잃으셨습니까?”
위지불이가 말했다.
“방금 누이들이 태황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태황이 누구죠?”
한 궁녀가 재빨리 말했다.
“예전의 여제께서 지금의 태황이십니다! 황상의 어머니요.”
그때 옆에 있던 궁녀가 헛기침을 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불이 공자, 저희는 태황께 음식을 가져다드려야 해서 그만 가 보겠습니다.”
위지불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요. 어서 가 보세요.”
그녀는 오솔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는 두 궁녀를 몰래 뒤쫓았다. 위지불이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두 사람을 미행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해준 말 때문이었다.
여제가 다른 사람이었다니. 그녀는 애당초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이다. 남제화는 여제가 아니었다. 공자를 죽인 원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탁 트이면서 비로소 마음의 짐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남제화는 원수와 한패가 아니었다. 그러니 위지 공자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여제라는 작자만 죽인다면 공자의 복수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잠깐… 여제가 남제화의 어머니라고? 만약 그녀가 여제를 죽이면, 그녀는 남제화에게 어머니를 죽인 원수가 될 터. 남제화는 분명 그녀에게 복수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지는 듯했다. 위지불이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용히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외진 곳에 다다른 두 궁녀는 별안간 사라지고 없었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두 눈을 비볐다. 분명 멀쩡히 시야에 있던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녀는 더 앞으로 다가가서야 지면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지하로 곧게 계단이 나 있었는데 아마 궁녀들도 이곳으로 내려간 것 같았다.
위지불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길고 음침한 계단을 내려가니 철문이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행히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마 두 궁녀가 닫지 않은 덕에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따로 문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녀는 수월하게 철문을 통과해 마침내 넓은 공간에 다다랐다.
커다란 야광주가 네 귀퉁이를 비추고 있었고, 높은 기둥에 유리 등잔도 걸려 있었다. 바닥엔 보드라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발등이 기다란 융털에 파묻히니 솜을 밟는 것보다 더 보드라웠다. 위지불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 하는 곳이람?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거야?”
분위기가 음산한 것이 지하 감옥인 것 같기도 했고, 화려한 장식을 봐선 꼭 궁전 같기도 했다. 설마 여제가 이곳에서 지내는 것인가?
그때 누군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화려한 의상에 머리 가득 장신구를 꽂은 농염하고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긴 치맛자락을 바닥에 끌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그녀는 위지불이와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네가 위지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