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5화
대나무 숲은 워낙 음침한 탓에 오래 머무르면 답답할 정도였다. 강암룡은 그녀가 어떻게 손을 쓸지 한참 지켜보기만 하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결하자면서? 어찌 가만히 있는 것이냐?”
위지불이는 손가락을 들고 그를 향해 까딱거렸다.
“먼저 덤벼요.”
강암룡은 흠칫 놀랐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그에게 먼저 공격하라니.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우스웠다.
“내가 먼저 공격해도 괜찮단 말이지?”
그가 먼저 손을 쓰면 위지불이는 지난번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동작조차 보여줄 기회가 없을 터. 강암룡이 움직이지 않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떠들고 어서 덤비라니까.”
덤비라면 덤벼야지. 강암룡은 손쉽게 그녀를 제압하고는 기를 팍 꺾어 놓았다. 그가 웃으며 턱을 들어 올렸다.
“자, 어디 한번 반격해 보거라.”
그는 고수였다. 고수의 동작은 밋밋해 보여도 제법 절묘했다. 이 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었다. 그는 곧 자신 앞에 넘어져 곤혹스러워할 위지불이의 모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틀렸다. 바닥에 넘어진 사람은 위지불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위지불이는 그의 수를 받아 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교묘하게 빠져나가 반격까지 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단숨에 그를 제압하여 바닥에 넘어뜨렸다. 위지불이는 강암룡이 바닥에 고꾸라지자 기뻐서 깡충깡충 날뛰었다.
“와, 내가 이겼다. 내가 총관리를 이겼다. 내가 고수를 이기다니, 와아!”
“…….”
강암룡의 얼굴이 돼지 간만큼이나 붉게 상기되었다.
“패배를 인정하시죠.”
위지불이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는 어색하고 우습기만 했다.
“앞으로 내 침대에 뱀을 풀어놓으면 안 돼요.”
강암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남원의 사내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 법. 오늘부터 다시는 네 침대에 뱀을 풀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음번에 내가 이기거든 이 협의는 없던 일로 하겠다.”
“…아, 다음이 또 있다고요?”
“물론이지.”
강암룡이 말했다.
“우리 남원 사내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번엔 필승할 것이다.”
위지불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끝마다 남원의 사내라고 하는데, 당신은 궁의… 시종…이잖아요…….”
우물쭈물 말했지만 그 뜻은 아주 분명했다. 지난 대결 때도 그녀는 그와 동월의 태감을 비교했다. 게다가 그에게 향 따위를 준다고까지 했으니. 강암룡은 화가 나서 삿대질했다.
“두고 보아라. 다음번엔 내가 아주 본때를 보여줄 테니!”
말을 마친 그는 식식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위지불이는 조금 궁금했다.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저리 화가 났단 말인가? 그의 머리에서 조만간 김이 날 것만 같았다. 어쨌든 고수를 이겼다는 생각에 그녀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대나무숲을 빠져나온 그녀는 껑충껑충 뛰어 남제화가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공작 몇 마리가 복도 아래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쏜살같이 복도를 가로질렀고 깜짝 놀란 공작들은 우르르 나무 위로 날아갔다. 남제화가 가느다랗게 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겼느냐?”
“이겼어요!”
위지불이는 손을 들고 알 수 없는 춤을 몇 차례 추더니 신이 나서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기쁨과 감격스러운 마음을 함께 나눌 상대가 절실히 필요했다. 무술인에게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고수를 이긴다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흥분되는 일이었다.
남제화는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정처럼 밝게 빛나는 눈에 상기된 얼굴, 진주 반짝이가 묻은 듯 이마에 흩어진 땀자국까지. 그는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위지불이의 땀을 닦아 주었다. 그가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보아라. 이마에 온통 땀이 나지 않았느냐. 대결이 끝나고 곧장 이곳으로 뛰어온 것이냐?”
“네. 여기로 곧장 왔죠.”
한껏 흥분한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자신의 땀을 닦아 주는 게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라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두 궁녀는 몰래 입을 가리고 웃었다.
“폐하께서 계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제가 어떻게 때려눕혔는지 직접 보셨을 테니까요.”
말하고 나니 또 조금 아쉬웠다.
“강 총관이 너무 빨리 쓰러져서 좀 아쉬워요. 안 그랬음 제가 몇 수 더 공격해 보는 건데 말이에요.”
남제화가 웃으며 그녀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되었다. 한 수면 족하다. 더 덤볐다간 대응도 못 했을 테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탓에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닐 걸요. 아무튼 다음에 다시 겨루자고 했으니까 두고 보세요. 제가 오늘이랑 똑같이 때려눕힐 테니까요.”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
“겁이 없는 자는 용기가 넘치는 법이지!”
위지불이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전 원래부터 용감했다고요.”
하지만 용감한 게 꼭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위지불이는 강암룡의 화려한 발차기로 족히 삼 장은 미끄러져 날아갔다. 도중에 대나무를 잇달아 몇 개나 부러뜨릴 정도였다. ‘두둑’ 하고 대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에 위지불이는 자신의 허리도 함께 부러지는 것 같았다.
바닥에 고꾸라진 그녀는 대나무에 기댄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강암룡이 느긋하게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어째서 지난번과 같은 초식을 쓴 것이냐? 때에 맞게 대처해야지. 오늘 내가 공격한 초식은 지난번과 다른 것이었다. 알아보지 못하였느냐?”
위지불이가 거친 숨을 내쉬며 대나무를 꼭 쥐었다. 잘린 대나무에 긁힌 손등에는 핏자국이 생겼다.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지긴 했지만… 굴복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내가 졌어요. 하지만 다음번엔 반드시 이길 거예요.”
강암룡이 코웃음을 쳤다.
“황상께서 널 도와주신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더냐. 황상께서 지난번 그 초식을 알려 주지 않으셨다면… 네가 날 이길 수나 있었겠느냐?”
“내가 어떻게 이겼든, 이긴 건 이긴 거라고요.”
위지불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번엔 당신도 삼 장 밖으로 내던져질 테니 두고 봐요!”
강암룡은 대단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황제가 공격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한들 자신을 삼 장 밖으로 내던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지불이, 내게 얻어맞아서 멍청해진 것은 아니더냐?”
강암룡은 그녀를 조롱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똑똑히 알려 주마. 난 다음번에도 오늘 이 초식을 쓸 것이다. 그때 날 삼 장 밖으로 던지지 못하면 네가 진 것이다.”
위지불이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좋아요!”
그녀는 허황된 자신감으로 대답한 게 아닌 진정 남제화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고수니까 분명 그녀가 강암룡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 * *
위지불이가 터덜터덜 걸으며 대전으로 돌아왔다. 남제화는 굳이 듣지 않아도 위지불이가 강암룡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찢긴 옷과 팔뚝에 난 상처… 여기에 시무룩한 얼굴까지. 모든 상황이 그녀의 패배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남제화는 이미 알고 있기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위지불이의 팔뚝에 생긴 핏자국을 발견했을 땐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위지불이가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오늘 강 총관이 이런 초식을 썼어요. 어떻게 반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 말거라. 다음번엔 네가 이길 것이다.”
위지불이는 남제화의 말에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한시가 급한 모양인지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빨리요, 빨리. 지금 가르쳐 주세요.”
남제화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위지불이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탓에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도 자꾸만 잊는 듯했다.
“이 초식을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남제화가 그녀에게 시범을 보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동작을 재빨리 연결해야 한다. 한데 다음번에도 강암룡이 이 초식을 쓸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내가 뒤에서 널 돕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또 똑같은 초식을 쓰면 질 것 아니더냐?”
“하지만 총관이 그랬어요. 다음번에도 똑같은 초식을 쓸 거라고요. 제가 총관을 삼 장 밖으로 걷어차기만 하면 이기는 거예요.”
남제화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삼 장 밖으로 걷어찬다고?”
“네. 오늘 제가 총관한테 걷어차여서 삼 장 밖으로 내쳐졌거든요. 다음번엔 제가 총관을 삼 장 밖으로 걷어찰 거예요.”
남제화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초식을 푸는 건 어렵지 않지만 강암룡을 삼 장 밖으로 걷어차는 것은 내력이 필요했다. 기초 체력도 약해 내력도 없는 위지불이가 어떻게 그를 걷어찰 수 있겠는가?
“못 해요?”
위지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폐하같이 대단한 분도 못 한단 말이에요?”
남제화는 사실대로 말해 주려다가 위지불이의 말에 바로 입이 닫혔다. 위지불이가 자신을 저리 생각하는데…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어야지!
“할 수 있다.”
그가 대번에 승낙했다.
“문제없고말고.”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보다 남제화를 더 신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후, 위지불이는 방 안에 숨어 열심히 무술을 연마했다. 강암룡이 삼 장 밖으로 내쳐지는 모습을 떠올리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강얌룡과의 대결에선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수련했다.
힘든 수련 끝에 위지불이는 남제화에게 검증까지 끝냈다. 이제 강암룡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 시간이었다. 위지불이는 자그마한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히 그를 찾아갔다.
* * *
이번에도 대결 장소는 대나무 숲이었다. 위지불이와 강암룡은 아무 말 없이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무림의 고수인 양 위지불이에게선 위엄이 넘쳤다. 조금 차가우면서도 무신경한 듯이. 이번엔 분명 남제화도 이길 수 있다고 했으니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강암룡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기괴했다. 어쩐지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눈엔 원망이 가득했다. 좀처럼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위지불이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고수는 상대와 겨룰 때 산란한 마음을 가장 금기시해야 하는 법. 오늘은 그녀가 이기게 되어 있으니 곧 강암룡을 아주 멋지게 차 버리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