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3화
“난 황제다. 황제가 모르는 것이 있겠느냐.”
그는 위지불이의 곁에 앉아 아주 자연스럽게 자그마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울해하지 말거라. 내가 술상을 대접하마.”
위지불이는 제 어깨에서 그의 손을 치우고 그와 떨어져 앉았다. 순간 강암룡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제가 남제화와 함께 먹고 자는 사이라니. 궁 안 사람들이 더 오해하기 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나았다. 하지만 남제화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위지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하자. 내가 너에게 몇 수 가르쳐 주지. 분명 다음번엔 네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위지불이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에요?”
“군주는 실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제화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건이 있다. 내게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해.”
또 동월의 황후인 백천범과 홍정상인인 사앵앵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걸까? 그가 왜 그녀들에게 관심을 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알겠어요.”
그녀는 망아지처럼 깡충대며 말했다.
“어서 가요, 어서요. 지금 가르쳐 줘요.”
남제화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나갈 필요 없다. 이곳에서도 알려 줄 수 있어.”
위지불이는 기쁨에 잠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여기서 해요.”
“내 말을 기억하거라. 제일 중요한 원칙이 있다.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너도 움직이지 말고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알겠느냐?”
위지불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 사부님은 불시에 공격을 가하라고 가르쳐 주셨는걸요. 허점을 공격해야 이길 수 있다고요.”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네 사부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네 실력이 부족하니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이길 가능성이 낮아지지. 하지만.”
그가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우린 목표로 삼는 상대가 있으니, 기선 제압을 하지 말고 상대가 먼저 손을 쓰게 하는 것이 네게 유리할 것이다.”
위지불이는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에는요?”
“조급해하지 말래도.”
남제화가 갑자기 공격을 한 수 넣더니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어디 한번 공격을 풀어 보아라.”
위지불이는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수인데도 사방이 막혀 손도 쓰지 못하고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못하겠느냐?”
위지불이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남제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다. 네 머리로는 날이 저물어도 생각해 내지 못할 것 같구나.”
위지불이가 얼굴을 붉혔다.
“…….”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네가 해 보거라.”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조금 전 초식을 보여 주었다.
“내가 하는 것처럼 이렇게… 잘 보거라.”
그는 손바닥을 뒤집고 장심을 앞으로 쭉 밀며 주먹을 쥐는가 싶더니, 곧장 그녀의 턱을 틀어쥐었다. 뒤이어 그녀 쪽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다른 쪽 주먹으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타격했다.
만약 여기서 힘까지 주었다면 그녀는 완전히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남제화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녀의 턱을 틀어쥐고 허리를 살짝 쳤다. 눈빛은 또 어찌나 부드러운지… 위지불이는 까닭 없이 숨이 가빠졌다. 남제화가 가볍게 웃었다.
“긴장할 것 없다. 내가 너와 싸울 리도 없는데.”
위지불이는 팔로 코를 마구 문질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불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권법을 하는 거예요, 춤을 추는 거예요? 여인같이 꾸물대기나 하고.”
남제화가 해명했다.
“빠르게 보여 주었다간 힘을 주체하지 못해 정말 널 때릴 수도 있다.”
위지불이가 말했다.
“나도 무술하는 사람이에요. 조금 맞는 걸로 끄떡없어요. 괜찮으니까 어서 다시 해 봐요.”
결국 남제화는 다시 한번 움직였다. 이번엔 남제화도 속도를 붙이긴 했지만 위지불이 눈에는 여전히 힘없고 물렁물렁한 동작이었다. 그녀가 불만을 표출했다.
“내가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면 강암룡을 이길 수 있겠어요?”
남제화가 말했다.
“우선 내 동작을 자세히 배운 뒤에 연습하면 될 것 아니냐?”
하지만 위지불이는 직접 그 공격의 위력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말했다.
“우선은 빠르게 한번 보여 주세요. 안 그럼 이야기 안 해 줄 거예요.”
남제화가 말했다.
“알겠다. 조심하거라. 힘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위지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작 주먹으로 한 대 맞는 게 뭐 어떻다고. 그녀도 무술을 연마할 줄 아는데 고작 그 한 방을 견디지 못할까!
또 위지불이는 머리를 굴렸다. 남제화가 두 차례나 시범을 보였으니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공격을 피한다면 아무리 황제라도 그녀를 업신여기진 않겠지.
이번에 남제화는 속도를 제대로 붙였다. 얼마나 빠른지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의 공격에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 저 멀찍한 곳에 서 있는 사내는 재미있는 놀잇감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제때 힘을 거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힘을 끝까지 주었다면 미끄러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허공을 날아 바닥에 세게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 피를 왈칵 토했겠지. 남제화는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위지불이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거라.”
남제화……. 온화하고 고상한데,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기량을 가진 사내였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 옅은 빛을 뿜어내는 금색 고리가 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림 속 부처님처럼.
그 순간, 그녀는 별안간 그에 대한 일종의 숭배심이 생겨났다. 물론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어찌 원수를 숭배할 수 있을까? 공자가 알았다간 무덤을 뚫고 나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 마음속에 남제화는 이미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낮추려 해도 낮출 수 없었다. 남제화의 손을 잡고 일어난 위지불이가 입을 열었다.
“나도 가르쳐 줘요. 제대로 배울게요.”
남제화가 말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동작이다. 적과 싸워 빠르게 이길 수 있으니 잘 연습해 두거라. 다 익히거든 다시 강암룡을 찾아가 겨뤄 보고.”
위지불이가 말했다.
“겨우 이 초식 하나만요?”
“그래.”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연습하기에는 이 한 수면 충분하다.”
* * *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가르쳐 준 수를 부지런히 익혔다. 또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강암룡이 그녀의 수를 읽을까 봐 방 안에 틀어박혀 연습했다. 그녀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남제화가 알려 준 초식이 묘하게 느껴졌다. 한 동작만 반복하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제화는 심심할 때마다 방으로 찾아와 그녀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올 때마다 자세를 지적하고 몇 마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술 연습에 상당히 진심이었던 위지불이는 그의 농담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위지불이는 제법 그럴듯한 자세를 갖추게 됐다. 이제 그가 지적할 것도 거의 없었다.
남제화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방을 나섰다. 문 앞에 서서 진지하게 연습하는 위지불이를 보니 어쩐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위지불이가 바쁠수록 그는 더 무료해졌다. 마치 고양이가 그의 가슴을 긁는 것처럼 편치 않은 기분이었다. 강암룡조차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곤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폐하, 요 며칠 불이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왜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걸까요? 혹시 이상한 계략을 짜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몰래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가 담담히 대꾸했다.
“내버려 두거라. 신경 쓸 필요 없다.”
황제의 말에 강암룡도 더는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사흘째 되던 날 밤, 남제화는 참지 못하고 위지불이의 방을 찾아갔다. 위지불이는 헐렁한 장포를 입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물기가 촉촉한 걸 보니 이제 막 목욕을 하고 나온 듯했다. 그를 발견한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서 침대에 놓여 있던 베개를 껴안더니 당황한 말투로 물었다.
“폐하, 이렇게 늦은 밤에 어쩐 일이에요?”
불빛에 반사된 위지불이의 얼굴은 유독 더 새하얬다. 거기에 물로 씻어낸 듯 촉촉한 두 눈망울이 위지불이를 숲속의 어린 사슴처럼 보이게 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위지불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폐하, 왜 그렇게 절 빤히 쳐다보시는 거예요?”
남제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위지불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무술을 알려 주면, 네가 내게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오늘 밤에 해 주어라.”
“아, 지금은… 좀 피곤한데…….”
“하면 더 잘되었구나. 함께 자자. 잠이 들 때까지 짐에게 이야기를 들려 다오.”
“그건…….”
위지불이는 조금 난처했다. 이전에도 함께 잔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땐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부적절한 행실인 것 같았다.
“꾸물댈 것 없다. 네가 여인도 아니고. 자, 어서 가자.”
남제화는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위지불이는 별수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갔다. 그녀는 익숙한 듯 커다란 베개를 침대 가운데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제 몸만 한 베개를 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규칙은 그대로예요. 이 선 절대 넘으면 안 돼요.”
남제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규칙은 규칙이지.”
남제화는 위지불이 쪽으로 몸을 틀고 누웠다. 그리곤 턱을 괸 채 그녀의 이야기만을 기다렸다. 얼굴이 빨개진 위지불이는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말 못 해요.”
“아?”
남제화가 웃으며 물었다.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신은 황제가 아니라…….”
위지불이도 여인인지라 낯 뜨거운 단어를 말하기 부끄러웠다. 남제화가 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날 황제가 아니라 뭐라고 여긴단 말이냐?”
위지불이는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서 말해 보거라. 여인처럼 우물쭈물하지 말고.”
남제화의 말에 위지불이는 제가 남장을 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일깨웠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기루 알아요?”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물론 알고말고. 짐은 기녀들과 술도 마셔봤는걸.”
“어쩐지.”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방금 그 눈빛, 기녀들과 술 마시는 손님 같았어요……. 그것도 단골손님.”
기루에서 사내들이 어떤 모습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남제화의 눈빛은 그만큼 자극적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릴 만큼. 남제화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위지불이와 함께 있으면 그는 이상하리만치 즐거웠다. 녀석이 어떤 말을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좋다. 안 볼 테니 어서 말해 보거라.”
그는 똑바로 누워 장막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누구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