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2화
차를 마시는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세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지난번과 달라진 점은 이번에 칼을 쥔 사람은 강암룡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태연한 얼굴을 한 채 탁자 밑에서 칼을 움직였다. 그때 누군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때렸다. 손이 마비될 정도의 엄청난 강도였다. 결국 그가 들고 있던 칼은 두꺼운 양탄자 위에 톡 떨어졌다.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탁자 밑의 비밀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강암룡은 고개를 돌려 남제화를 바라봤다. 황제는 위지불이와 대화하고 있어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방금 암기로 그를 때린 사람은 분명 남제화였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분명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그가 손을 쓰자마자 황제가 나서서 제지한단 말인가?
차를 다 마신 위지불이는 낮잠을 자기 위해 일어났다. 그가 자리를 뜨자 강암룡은 다급하게 남제화에게 물었다.
“폐하, 지난번에 소인과 위지불이를 편애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어째서…….”
남제화는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왜냐하면 그는 짐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상께서 소인도 곁에 있는 사람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다. 너는 짐 곁에 있는 사람이지만, 불이는 짐의 사람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
그는 그제야 상황을 정확하게 깨달았다. 그는 위지불이와 싸울 수는 있지만, 위지불이를 다치게 할 수 없다. 즉, 위지불이를 다치게 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 싸워야 했다. 근심에 싸인 그는 몹시 괴로웠다.
* * *
위지불이가 강암룡을 칼로 찔렀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강암룡은 그녀에게 보복하지 않았고 남제화는 이 일을 함구했다. 오히려 아무도 책망하지 않아 위지불이는 조금 불편하기까지 했다.
밤새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자객의 도량이 아닌 듯했다. 유치한 방법으로 적을 괴롭히려고 자객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자객이라면 강암룡과 정식으로 겨뤄야 했다. 오양조봉도법을 제대로 펼쳐서 강암룡에게 진짜 실력을 보여 줄 테다. 계속 황제의 뒤에 숨는다면 다들 황제의 등골을 빨아먹는 기생오라비로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강암룡을 찾았다. 마침 그는 자신의 책상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한 그는 곧장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위지불이가 말했다.
“강 총관, 우리 정식으로 대결해요. 당신이 지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침대에 뱀을 풀지 마세요.”
강암룡이 물었다.
“내가 이기면?”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위지불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기면… 다음 대결을 약속해요. 언젠간 내가 이기고 말 테니까.”
강암룡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결은 원래 한판승으로 승부를 가르는 것이거늘. 어디 말해 보거라. 내가 이기면 어찌할 것이냐?”
“강 총관이 말해 봐요. 내가 어찌하면 좋겠는지.”
“이곳을 떠나거라. 폐하의 곁을 떠나.”
위지불이는 그의 제안을 바로 거절했다.
“그건 안 돼요.”
“어째서 안 된단 말이냐?”
맞아. 왜 안 된다는 거지? 위지불이는 속으로 자문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원수를 죽이기 전엔 절대 떠날 수 없어요.”
강암룡은 그녀의 논리에 웃음만 나왔다.
“지금도 폐하를 죽이고 싶다? 위지불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독을 타도 안 돼, 싸움도 못 이겨……. 그저 매일 폐하와 함께 먹고 자는 사이면서…….”
위지불이가 화를 내며 그의 말을 끊었다.
“누가 폐하랑 먹고 잤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
“아니긴? 아침에 네가 폐하의 침대에서 내려오는 걸 다들 봤다.”
“당신이 내 침대에 뱀을 풀어놨으니까. 갈 곳이 없어서 폐하의 방으로 도망친 거라고.”
“이런, 이런. 부끄럽지도 않으냐. 자객이란 놈이 뱀을 무서워하다니.”
“뱀을 무서워하는 게 뭐 어때서? 자객은 뱀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다른 건 몰라도 위지불이는 말다툼에 자신이 있었다. 목소리는 걸걸했지만 허리에 손까지 얹고 떠드니 꼭 여인네 같았다. 강암룡은 더는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졌다. 저런 놈과 다투면 저만 채신없어 보일 테다.
“되었다.”
그가 말했다.
“네가 떠나지 않겠다니 다른 걸 요구하마. 네가 지거든 더는 내 피를 보는 짓은 하지 말거라.”
위지불이는 조금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칼날 끝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그건 제어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강암룡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위지불이는 그의 피를 보는 게 쉬운 일인 양 말하고 있었다. 기가 막혀서 원.
“그럼 네가 한번 말해 보아라. 어찌하면 좋겠느냐?”
한참 고민하던 위지불이는 자신의 보물들이 떠올랐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내가 지면 당신한테 아주 좋은 향을 한 병 주는 것으로.”
다 큰 사내가 향을 어디에 쓴다고…….
“싫어요?”
강암룡의 얼굴이 어둡게 굳자 위지불이는 그가 향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비싼 향인데요. 다른 사람한테 주는 것도 아까울 정도인데. 혹시 향을 안 발라요? 우리 동월 황궁의 공공들은 다들 향을 바르는데.”
감히 자신을 동월의 태감과 비교하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난 강암룡은 결국 검을 뽑아 들었다.
“나와 대결을 하자고 하지 않았느냐?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법! 지금 하자.”
“지금?”
갑작스러운 대결에 위지불이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자신의 단도를 뽑았다.
“좋아요. 그럼 지금 해요.”
강암룡이 말했다.
“여기서 대결했다간 난장판이 될 테니 죽림으로 가지.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황제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속셈을 모르는 듯 위지불이가 통쾌하게 답했다.
“가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꽃밭. 그 너머에 대나무들이 빼곡한 죽림이 보였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암룡은 마음이 약간 동요되었다. 어둡고 컴컴한 대나무숲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위지불이를 죽여 버린다면…….
공상하던 그의 몸이 덜덜 떨렸다. 위지불이를 죽인다면 황제의 분노가 그의 목숨까지 앗아갈 것이다.
음산하고 어두운 대나무 숲. 사방은 온통 대나무로 빽빽했다. 이곳에서 위지불이는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강암룡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장소를 바꾸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칼을 손에 쥐고 천천히 가슴 앞에 가져갔다. 그리곤 다른 손을 앞으로 곧게 뻗어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강암룡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오히려 검을 검집에 꽂더니 손을 축 늘어뜨린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위지불이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를 무시하는 건가? 제 주인과 똑같이 저를 무시하다니.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손목을 움직였다. 굽은 칼이 허공에 호선을 그리며 강암룡에게 뻗어 갔다. 강암룡은 자연스레 칼을 피했지만 위지불이가 눈속임을 썼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그를 찌르지는 못했지만 위지불이의 곧게 뻗은 손은 강암룡의 어깨를 아주 세게 내리쳤다. 자신의 수가 먹히자 위지불이는 자신감이 붙었다. 남제화가 그녀에게 강암룡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보니 다 헛소리였다. 실력도 없는 자가 무슨.
위지불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이자 강암룡도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 거지? 위지불이는 겉으로는 느긋해 보였지만 사실 아주 긴장한 상태였다. 강암룡의 웃음 또한 여유로워 보이기 위한 눈속임일 것이다. 일전에 티격태격 다투던 것과는 다른 싸움이었다. 이번엔 서로 칼을 뽑아 들고 겨루는 것이니, 목숨을 건 결투였다.
그녀는 칼을 다시 가까이 가져와 화려한 검무를 췄다. 새하얀 칼날에 반사된 햇빛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분명 매우 기이하게 보일 테다. 그녀는 강암룡이 자신의 기교에 놀랐으리라 생각하고 더욱 크게 움직였다.
그런데 웬걸.
그 순간, 그녀의 단도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손목이 그대로 마비되었다. 칼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강암룡의 손에 떨어졌다. 남제화가 그녀의 검을 빼앗던 일이 떠올랐다. 강암룡은 손가락 사이에 칼날을 끼운 채 그녀를 비웃었다.
“고작 이런 수준으로 감히 나에게 도전하고, 폐하를 암살하려 했단 말이냐? 위지불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위지불이는 남에게 모욕을 당하는 게 가장 끔찍했다. 그녀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말했다.
“내가 졌다. 날 죽이든 살리든 당신이 알아서 해.”
강암룡이 웃음을 터뜨렸다.
“위지불이, 비록 넌 무공도 형편없고 머리도 나쁘지만, 기개 하나는 제법 그럴싸하다. 폐하께서 널 감싸 주시니 나도 널 죽일 수는 없다.”
그가 칼을 위지불이에게 던졌다.
“가거라.”
다시 제 손에 칼이 쥐이자 오히려 위지불이는 당황했다. 강암룡의 원한이 적지 않으니, 죽이진 않더라도 쉽게 보내 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날 보내 준다고?”
“어서 가래도.”
“하지만… 오늘날 풀어 준다 해도 언젠가 내가 또다시…….”
“나도 안다.”
강암룡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내가 이기면 다음 대결을 기약하자고 하지 않았느냐. 언젠간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면서.”
결국 위지불이도 검집에 단도를 꽂았다. 그녀가 공수하며 그에게 예를 갖춰 말했다.
“강 총관, 그럼 다음을 기약합시다!”
강암룡은 제법 진지한 위지불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위지불이는 아직 털도 나지 않은 아기 새 같았다. 그런데도 기어코 세상 물정에 닳고 닳은 고수 흉내를 내다니… 재미있는 놈이긴 했다.
* * *
강암룡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위지불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번 대결은 그녀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남제화뿐만 아니라 그의 수하에게도 지다니. 남원에서 그녀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있긴 한 걸까?
자신만만하게 남원에 왔으나 자신의 기량은 한참 부족했다. 황제야 일국의 군주니 고수라고 해도, 위지불이는 그의 시종조차 이기지 못했다. 위지불이는 제 부족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큰 좌절감에 사로잡히자 그녀는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남제화는 친히 위지불이를 직접 찾아갔다. 천천히 위지불이의 침대 앞에 다가간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찌 된 것이냐? 어찌 이리 기운이 없는 것이야?”
위지불이는 고개를 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작 강암룡과의 대결에서 진 것뿐이거늘.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넌 강암룡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위지불이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건만……. 황제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