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0화
남원의 하루는 언제나 일찍 밝았다. 창살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지만 겹겹이 쳐진 휘장 때문에 침대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눈을 뜬 위지불이는 아직도 남제화가 제 손을 잡고 있는 걸 바라봤다.
그녀는 왜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려고 했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남색의 기질이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아니라면 왜 그녀의 손을 잡았을까?
또 자신을 암살하러 온 자객을 수행원으로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잘해 주는 바람에 그녀 역시 제 직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지금은 좋은 기회였다. 그녀가 완도彎刀(구부러진 칼)로 그의 심장을 찌른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가문의 자랑이 될 것이고 당당하게 부모님을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남제화는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해 준 은인이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제 생명의 은인을 죽여야 했다. 이건 천벌을 받을 일이었다.
하지만 공자를 생각하면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는 위지 가문을 다시 일으켰고, 그녀의 가족과 같은 방계 친족도 함께 도성에 있는 큰 저택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공자는 온 위지 가문의 은인이었다. 그녀는 사적인 이유로 복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거야말로 천벌을 받을 짓이었다.
그래도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는 용모가 멋지고 성격도 좋았다. 공자와 무슨 원한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보기엔 그는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최소한 그녀에게는 잘해 주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시시각각 생각이 바뀌었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한참 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다. 남제화는 곧장 그녀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위지불이는 그가 잠에서 깬 줄 알고 놀랐지만, 그의 호흡이 여전히 규칙적인 게 깊게 잠들어 있는 듯했다. 분명히 잠이 들었는데도 어떻게 그녀의 손을 꽉 잡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녀가 손을 빼려고 하자 남제화가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이번에는 그도 잠에서 깨 눈을 떴다. 그는 아직 몽롱한 눈빛으로 위지불이를 바라봤다. 아마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위지불이는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내 손 좀 놔줘요.”
“어?”
그가 맞잡은 손을 보고 깜짝 놀란 듯 즉시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도 빨개졌다.
“아직도 잡고 있었느냐?”
“그건 제가 폐하께 물을 말이죠.”
위지불이가 말을 이었다.
“제가 손을 빼내려고 하면 폐하께서 꽉 움켜쥐고 놓지 않으셨어요.”
“그래?”
남제화는 모른 체했다.
“짐은 잠들어서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남제화는 제가 밤새 남자의 손을 잡고 잤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분명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래, 생각났다.”
남제화는 해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짐이 어젯밤에 잠이 통 안 오는 바람에 네 손을 잡았지.”
“효과가 있었나요?”
“약간 효과가 있었다.”
위지불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손이 무슨 수면제라도 되는 거예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울리는 맑은 웃음소리는 쉽게 심금을 건드렸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남제화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너도 일어나겠느냐?”
위지불이가 답했다.
“일어나야죠.”
침대에서 내려온 남제화는 궁녀가 미리 준비해 둔 세면도구 앞으로 갔다. 위지불이가 침상에서 나오는 걸 본 궁녀는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위지불이는 자기 거처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남제화가 말했다.
“여기서 같이 씻자.”
그의 말에 궁녀들은 황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위지불이에게도 양칫물을 건넸다.
“공자, 양칫물입니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남총男寵(남자 후궁)이 된 것 같아 불편했다. 붉어진 얼굴로 그녀는 잔을 받아 들었다. 남제화의 시종으로 들어왔건만 지금은 주인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곤혹스러웠다. 남제화가 그녀를 남자로 보든 여자로 보든… 밤새 손을 잡고 자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침을 먹고 그를 피해 혼자 밖으로 나갔다. 햇살도 좋았고 도처에 꽃도 만발했다. 으리으리한 궁전이 햇빛 아래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남원의 황궁은 금빛이 도는 찬란한 곳이었다. 남제화의 말에 의하면 한 층 한 층의 금빛 지붕과 비첨飛簷에 진짜 금이 섞여 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곧장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금빛 지붕이 다 금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금이 들어간 거람? 이제 보니 남원은 정말 부유한 곳 같았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걷던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길을 잃은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만치에 강암룡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강암룡은 그녀를 보자마자 발길을 돌려 도망갔다. 의심스러운 그의 행동에 위지불이는 즉각 그의 뒤를 쫓았다.
“강 총관. 거기 서요. 그렇게 빨리 가서 뭘 하시려고? 엉덩이에 난 상처는 다 나으셨나요?”
강암룡은 멈추지 않고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 계속 도망가? 거기 서!”
위지불이는 재빨리 뒤쫓았다. 신발을 신고 있어 그녀도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강암룡이 멈춰 섰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위지불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거대한 맹수 두 마리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달아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폐하, 구해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웃기 바빴다. 어떤 이는 허리를 굽히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목숨 걸고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큰 맹수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황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했다.
대전에 앉아 있던 그는 위지불이의 비명을 듣고 곧장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내 경공을 펼쳐 몇 걸음 만에 위지불이를 발견했다.
위지불이는 혼비백산이었다. 머리를 감쌌던 천이 풀어져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허둥지둥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재빨리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동시에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맹수 두 마리가 순순히 땅에 엎드렸다.
위지불이는 너무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소매를 꼭 붙잡은 그녀가 숨을 헐떡거렸다. 마치 풀무질하는 것처럼 내뿜는 뜨거운 열기에 그의 목이 간질거렸다. 가까스로 숨을 고른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 거지 같은 곳에 더 이상 못 있겠어. 나 집에 갈 거야…….”
집으로 돌아간다는 위지불이의 말에 남제화는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좋은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겁내지 말거라. 저 녀석들은 사람을 물지 않는다. 내가 짐승 두 마리를 기른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호랑이 한 마리와 표범 한 마리. 잊었느냐?”
위지불이는 눈물을 훔치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그래도 너무 무서워서 그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저리 가라고 해요.”
남제화는 호랑이와 표범을 향해 일갈했다.
“돌아가거라! 얼른 돌아가!”
맹수 두 마리는 순순히 가 버렸다. 위지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잡아당겨 눈물을 훔쳤다.
“울음까지 터뜨릴 것은 또 뭐냐?”
남제화가 말했다.
“남자는 눈물을 가벼이 흘리지 않아야 한다. 짐승 두 마리에 놀라 울다니……. 이래서 어떻게 자객이 되었느냐? 누가 너를 자객으로 골랐지? 다른 사람들은 네가 계집이라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 위지불이는 그제야 수치심을 느꼈다. 거기에 강암룡에 대한 분노가 끓었다. 만약 그에게도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위지’라는 성씨를 쓸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강암룡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독에 관해서라면 남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앙심을 잘 품는 성격이었다. 어릴 때, 뜰에서 어떤 아이와 싸우다 진 적이 있었다. 패배했음에도 그녀는 상대의 팔을 이빨로 물어뜯어 놓았다. 그래야 위지 가문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었으니까!
난간에 기대어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멀리서 강암룡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강암룡도 눈을 치켜뜨고 경멸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은 그녀를 더욱더 분노하게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쪽의 대전 입구를 바라보더니 눈알을 굴리며 계략을 세웠다.
조용히 대전 입구 뒤에 숨어든 그녀는 문틈으로 훔쳐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강암룡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문을 잠그고 숨어 있다가 강암룡이 다가오자 맹렬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강암룡은 문짝에 세게 들이받았고 코를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위지불이는 이제야 그를 발견한 척했다.
“아이고, 강 총관, 뒤에 서 계신 줄 몰랐네요. 왜 그렇게 기척도 없이 다니십니까?”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강암룡은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문에 붙는 순간 완전히 넋을 놓았다. 그리고 위지불이가 그 앞에 나타나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분명 지난번 일에 대한 보복일 테지.
대전 깊숙한 곳, 남제화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의자에 앉아서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강암룡은 코를 막고 성큼성큼 다가와 고했다.
“황상, 보셨죠? 위지불이는 황상의 면전에서도 감히 흉포한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황상께서 이 일을 주관하여 판단해 주십시오.”
위지불이도 서둘러 변명했다.
“황상, 전 의도한 게 아니에요. 저도 뒤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면 왜 굳이 문을 닫았느냐? 대전 문이 언제 닫힌 적 있더냐?”
“문은 애당초 여닫으라고 만든 건데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건 분명 억지다.”
“제가 보기엔 강 총관이 오히려 절 중상모략하는 거거든요!”
“황상, 소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황상, 저도 억울해요!”
남제화는 그들이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것을 보고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조정에서 신하들과 장로들이 다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가 손짓으로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남제화는 먼저 강암룡에게 말했다.
“손을 내려 봐라. 짐이 네 코가 납작하게 눌렀는지 봐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