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9화
저녁 무렵이 되자 강암룡이 대전에 찾아왔다. 남제화는 그의 걸음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냐?”
“괜찮습니다.”
“괜찮다면서 걷는 게 왜 그 모양이냐?”
위지불이가 옆에서 일부러 물었다.
“맞아요. 걷는 게 왜 그래요? 강 총관, 엉덩이가 아픕니까? 아니면 다리가 아픕니까?”
강암룡은 그녀를 보니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폐하, 소인이 부주의해서 넘어졌사옵니다. 별일 아닙니다.”
“걸을 땐 조심해야죠.”
위지불이가 말했다.
“몇 살인데 아직도 덜렁거려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겠어요?”
강암룡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위지 공자,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네. 요즘 공자의 처소에 자꾸 뱀이 찾아온다고? 뱀이 자꾸 꼬이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네.”
“그건 강 총관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황상께서 저를 보호해 주실 거예요.”
강암룡은 남제화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들의 언쟁을 바라보자 머릿속이 번뜩였다. 황상의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뱀을 풀어준 날 밤, 위지불이는 황상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러니 황상께서 계속 위지불이를 겁주라고 격려하신 뜻은…….
그는 위지불이를 노려보며 분개했다. 정말 요물이 따로 없다. 황상을 이렇게 현혹하다니. 황상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니, 지금 그를 죽이기는 쉽지 않다. 방법을 강구해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위지불이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강암룡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자가 또 흉계를 꾸미느라 자신을 저렇게 주시하고 있는 걸까.
“강 총관.”
그녀가 그의 주의를 환기했다.
“엉덩이에 약은 바르셨어요? 약을 발라야 빨리 나을 겁니다. 황상을 모시는 데 어떤 문제도 있어선 안 되니 시간을 지체하지 마세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상처가 나았다고 아픔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핵심은 마지막 말에 있다는 걸 강암룡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가 남제화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폐하, 안심하십시오.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니 폐하를 모시는 데 어떤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음, 괜찮으면 되었다.”
남제화는 손을 내저었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
강암룡이 자리를 떠나자 남제화가 말했다.
“암룡을 조롱하고 싶더라도 너무 티를 내지는 말아라. 그는 부드럽게 나오면 제법 잘 받아주지만, 강하게 나오면 반발하는 성향이지. 분명 오늘 밤에도 네 침대에 뱀을 풀어놓을 거다.”
위지불이는 말했다.
“풀어놓고 싶으면 풀어놓으라고 해요.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저자가 뱀을 풀어놓으면 황상의 침대에서 자면 되잖아요.”
남제화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대가 크니 나는 상관 없지만… 다만 네가 불편해할까 봐 그게 걱정이구나.”
* * *
불편한 잠자리라고 한들 잠은 자야 했다. 며칠째 위지불이는 계속 남제화의 침대에서 잤다. 위지불이는 혹여 제가 여자란 게 들킬까 봐 가슴을 싸매고 잤다. 이렇게 하면 굳이 베개를 껴안고 잘 필요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남제화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또 남원의 개라고 욕하지도 않았다. 사이가 좀 좋아진 것 같았다. 남제화가 그녀를 바라봤다.
“불이, 너희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거라.”
위지불이가 의아해했다.
“왜 우리 황후 마마께 관심을 가지세요?”
“아주 예쁘다고 들었다.”
“아무리 예뻐도 우리 동월의 황후이십니다.”
위지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는 남원의 군주인데 어떻게 동월의 황후에게 관심을 가져요?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 동월의 황제는 부인인 황후 마마를 목숨처럼 아끼세요. 폐하가 황후 마마께 가당치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걸 알면 동월의 황제께서 군대를 이끌고 오실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묻지 마세요.”
“가당치 않은 생각이라니. 그냥 한번 물어 봤을 뿐이다.”
남제화가 말을 이었다.
“동월의 백성들이 황후를 아주 좋아하나 보지?”
“당연하죠. 황후 마마는 진실한 사람이세요. 백성들이 모두 마마를 경애하죠. 저도 마마를 좋아하고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임안성에는 두 명의 여인이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어요. 한 명은 황후 마마이고 다른 한 명은 우리 동월에 사앵앵이라는 큰 장사꾼이에요. 그녀는 동월에서 큰 장시를 해요. 시원시원한 사람인데 뭐랄까……. 음, 여자지만 남자 못지않아요. 몇 번 만나 봤는데, 참 유능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이 끊겼다. 남제화의 표정이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지불이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으론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동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낙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괴이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폐하, 듣고 계세요?”
“듣고 있다.”
남제화는 정신을 차렸다.
“계속 얘기 좀 해 봐라. 듣고 싶구나.”
시간은 정말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사앵앵이 큰 상인이 되었다니.
사앵앵이 서북에 있었을 때, 그는 몇 번이나 몰래 찾아가 그녀를 지켜보았다. 혹여나 그녀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 보고 또 보았다. 그녀가 서북을 떠난 뒤론 그 얼굴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런데 오늘 위지불이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또렷하게 생각났다.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게 그녀의 매력이었다.
“임안성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 그녀를 사 주인장이라고 불러요. 사 주인장은 임안에만 삼십여 개의 점포를 냈죠. 그녀의 가게에는 팔지 않는 물건이 없어요. 주루와 객잔, 포목, 목재 집, 가구 집도 있어요. 쌀집, 장아찌 집, 그리고 간식 가게까지……. 전부 다 있어요.
참, 사 주인장은 장사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악질 사업주를 잡아냈죠.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 가게들은 원래 악질 사업주의 것이었는데, 황실에 몰수되었다가 나중에 황제가 그 가게들을 모두 상으로 내렸어요.
저는 정말 그녀를 존경해요. 한 번은 사 주인장을 만나 보고 싶어서 일부러 사가상점에 물건을 사러 갔을 정도죠. 직접 보니 사 주인장은 눈썹이 짙고 눈이 크고 아주 예뻤어요. 황후 마마와 조금 다른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마마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용모라면, 사 주인장은 누구보다 뛰어난 영특함을 가졌어요. 그때 생각했죠. 사 주인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위지불이는 서둘러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여자라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 하지만 남제화는 넋을 놓느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폐하, 폐하…….”
연거푸 부르니 그제야 남제화는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느냐?”
위지불이는 조금 언짢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폐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 전 잠이나 자야겠어요.”
“듣고 있었다. 계속 말해 보거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아직도 정신이 돌아온 것 같지 않았다. 화가 난 위지불이는 몸을 돌려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피곤해요. 얼른 주무세요.”
“그래, 자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위지불이는 이제 남제화의 곁에서도 금방 잠들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깼다. 그때는 이미 등불도 다 꺼진 한밤이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방엔 남제화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동안 몇 번이나 뒤집는지 셀 수도 없었다. 잠에서 깨 화가 난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잘 거예요? 안 잘 거예요? 안 잘 거면 내려가요.”
남제화는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사앵앵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위지불이의 말에 지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를 설레게 했던 그 여자,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역참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름다운 시절. 그의 청춘, 그의 사랑 그리고 그의 즐거움…….
그 장면들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들은 이제껏 기억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그는 여태껏 감히 들여다볼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대한 기세로 그를 덮쳐 왔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역시 즐거웠던 한때가 있었다는 걸.
위지불이의 태도는 불손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깊은 밤, 위지불이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그는 위지불이의 말에 그만 정신을 차렸다.
“불이.”
그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왜요?”
그녀는 여전히 불손한 태도였다.
“네 손 좀 이리 내어 보거라.”
“뭘 하려고요?”
“잠이 안 와서 네 손을 잡고 싶구나.”
위지불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잠이 안 오는데 왜 내 손을 잡아요?”
“그냥, 나도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고 싶구나. 혹시 잠이 들지도 모르니.”
그 역시 효과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한번 잡아 보고 싶었다. 전당에 앉아 있을 때, 까닭 없이 공허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위지불이가 다가오면 그의 공허했던 마음이 안정을 찾곤 했다. 위지불이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잡아 보세요. 잠들면 놓아줘야 해요.”
남제화는 피식 웃었다. 이미 잠들었는데 어떻게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래, 그러지.”
그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녀의 작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남자 손 같지 않게 여린 손이었지만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아마 칼을 쥐어서 생긴 것 같았다. 자객이 되려면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했으니 틀림없이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불이.”
위지불이는 짜증을 냈다.
“손도 잡았잖아요. 왜 안 자요? 안 잘 거라면 손은 놓아줘요.”
그녀가 몸부림치자 남제화는 손을 더욱더 꽉 쥐었다.
“그래, 알았다. 더는 말하지 않으마.”
위지불이의 손을 잡으니 남제화의 어지러운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지만 몸을 뒤척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위지불이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옆에서 자던 사람도 눈치를 챘는지 손톱으로 그의 손을 꼬집었다. 남제화는 소리 없이 웃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누워서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불이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불이의 숨소리가 점점 느려지는 걸 들었다. 그는 또다시 부드럽고 매끈한 그녀의 손등을 몰래 어루만졌다.
남제화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차츰 잠이 들었다. 잠이 들어서도 손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 꽉 움켜쥐었다. 어둠 속, 가운데 놓인 베개 위에서 두 손은 겹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