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8화
남제화는 그들을 사이에 둔 베개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베개를 놓느냐? 지난번에 내가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하지 않았느냐?”
“안 하기는!”
위지불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만졌잖아요. 이번엔 절대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남제화가 한사코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위지불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기는 너무 무서워서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아직 날 죽이지 못했는데도?”
위지불이는 코를 훌쩍거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죠. 전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거예요. 가문에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해야겠어요.”
남제화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졌다고 인정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위지불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말하는 게 마치 날 아주 잘 아는 것 같네요.”
남제화가 말했다.
“뒤돌아 보거라. 얘기 좀 해야겠다.”
“할 말이 뭐가 있다고요?”
위지불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누웠다. 남제화는 순간 멍해졌다. 위지불이는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얼굴에는 면사를 쓰고 두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는 크진 않았지만, 가늘고 긴 눈매가 남다른 여성미를 뽐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여인 같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자 남제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말만 안 하면 정말 남색가들에게 총애를 듬뿍 받을 수 있겠구나.”
느닷없는 말에 위지불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면사를 끌어내렸다.
“무슨 헛소리에요! 전 한창인 사내대장부라고요. 앞으로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마세요. 안 그럼 아무리 황제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래, 알았다. 앞으로는 그런 얘기 하지 않으마.”
남제화가 말했다.
“면사는 뭐 하러 썼느냐? 여자들이나 쓰는 것 아니냐?”
“제 방에 냄새가 심각해서 좀 막아보려고 썼어요.”
웅황 가루를 떠올린 위지불이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 말했다.
“방에 웅황을 잔뜩 뿌렸는데 왜 또 뱀이 들어왔을까요?”
“웅황이 뱀에게는 유용하지만,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지. 남원에는 뱀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많다. 뱀을 가지고 놀 줄 안다는 건 뱀을 부려서 웅황을 무서워하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정말로요?”
위지불이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강암룡이 뱀을 통제할 수 있단 말씀이세요?”
“그래, 그는 뱀을 통제할 수 있지.”
위지불이는 탄식하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전 이제 단 하루도 편히 잠을 잘 수 없다는 거잖아요! 안 돼요. 당신은 황제잖아요. 저 대신 이 일 좀 해결해 주세요.”
“짐이 어찌 해결한단 말이냐?”
남제화는 난감해하며 말했다.
“내가 갔을 때, 이미 뱀은 가 버리고 없었단다. 증거가 없는데 짐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위지불이는 베개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정말 안 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남제화가 말했다.
“왜 또 퇴각 나팔을 부느냐. 그가 너를 겁주면, 너도 그를 상대하면 되지. 그를 힘들게 만들면 감히 너를 귀찮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자를 상대하는 건 쉽지만 밤에 잠을 잘 수 없는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남제화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기 와서 자거라. 어차피 짐의 침대는 크니까.”
“그건 좀 그렇잖아요?”
“이미 같이 잤는데 뭐가 어떻다는 게냐?”
남제화가 말했다.
“어차피 다들 네가 내 사람인 걸 알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어쨌든 이곳은 남원이고 여기서 그녀의 명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강암룡이 너무 얄미워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제가 단단히 손봐 줄 거예요.”
그녀는 남제화에게 물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상처가 좀 나고 피를 흘리는 건 괜찮죠?”
남제화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경상은 괜찮지만, 중상은 안 된다. 피가 좀 나는 건 괜찮지만, 많이 흘리는 건 허락할 수 없다. 일이 심각해지면 짐도 통제할 수 없단다.”
“황제인데 왜 통제할 수 없어요?”
남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황제였지만 남원에는 내각의 장로들과 태황이 있었다. 겉으로는 그가 권력을 잡았지만, 실제로는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사실까지 위지불이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만약 일이 밖으로 드러난다면 너와 강암룡은 각각 장형 오십 대에 처할 것이다. 암룡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의 작은 체구로는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위지불이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황상을 난처하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두고 보라고! 강암룡에게 아주 본때를 보여 줄 테니!
* * *
남원은 매일매일 햇볕이 쨍쨍한 날씨가 이어졌다. 위지불이는 손에 작은 과일을 한 줌 쥐고 걸으면서 먹었다. 그녀는 천천히 강암룡의 방으로 다가갔다.
강암룡은 비록 남제화의 노비였지만, 직위가 낮지 않았다. 궁중의 총관리로서 그럴듯한 처소도 있었고 시중을 드는 아랫사람들도 있었다. 위지불이가 들어갔을 때, 탁자 가장자리에 선 강암룡은 붓을 들고 뭔가를 쓰고 있었다. 고개를 든 강암룡은 위지불이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글씨를 썼다. 위지불이는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강 총관, 뭘 쓰고 계시죠?”
강암룡은 웃는 듯 마는 듯 답했다.
“내가 쓰는 건 관화官話(관청에서 쓰는 언어)이니 네가 봐도 헛수고다.”
역시 종이 위에 꼬불거리는 문자들은 그녀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뒤에서 걸어 나와 앞쪽으로 돌아가며 물었다.
“뭐라고 썼어요?”
“알 것 없다.”
위지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 총관, 제 방에 뱀을 풀어놓은 사람이 총관이라는 거 저도 다 알아요. 제가 온 것은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휴전하자고 온 거예요. 우리가 계속 다투는 것은 좋지 않잖아요. 황상께서 이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장형 오십 대쯤은 맞으라고 하실 거예요.”
강암룡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어쩌자는 것이냐?”
“방금 말했잖아요. 휴전하자고.”
위지불이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과일을 건넸다.
“성의의 표시로 과일을 드릴게요.”
강암룡은 그녀가 내미는 과일을 바라보기만 하고 받지 않았다.
“안 먹겠네.”
“드세요. 황상께서 방금 상으로 주신 거예요. 이 열매가 남원의 것이긴 하지만, 평소에 쉽게 구할 수 없다고 했어요. 방금 딴 것이라 싱싱해요. 하나 드셔보세요.”
강암룡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에이, 설마 제가 과일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죠?”
위지불이가 말했다.
“독을 잘 쓰는 걸로 따지면 강 총관이 열 손가락 안에 든다면서요? 한데 제가 어찌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쓸 수 있겠어요? 강 총관께서는 제가 준 열매 하나 먹을 배짱도 없는 건 아니겠지요?”
마지막에 한 말이 강암룡을 자극했다. 그는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디 한 알 먹어 보지.”
그는 과일을 받아 입에 넣고 두어 번 씹더니 얼른 삼켰다. 모두 정상이었다. 위지불이는 또 두 알을 더 주며 말했다.
“그럼… 바빠 보이시니 전 먼저 가 볼게요.”
몇 걸음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린 그녀는 강암룡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앉아서 일 보세요. 다음에 맛있는 거 생기면 또 올게요.”
그녀가 직접 와서 알랑거리다니……. 강암룡은 좀 어리둥절했지만, 과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문제가 있는 건 위지불이의 태도였다. 왜 갑자기 방향을 돌렸지?
과일을 입에 넣은 강암룡은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통증을 느꼈다. 그는 순식간에 하늘로 튀어 올랐다. 손으로 엉덩이를 만져보니 끈적끈적한 피와 작은 가시 같은 것이 만져졌다. 그가 이를 악물고 엉덩이에서 뽑은 것은 작은 배꽃 가시로,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위지불이!”
노여움이 얼굴에 가득한 그는 이빨 사이로 소리를 짜내듯 내뱉었다.
“두고 보자!”
위지불이는 멀리 가지 않고 창가에 엎드려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가 함정에 걸린 것을 확인한 그녀는 끽끽거리며 달아났다. 그녀는 중간에 산책 나온 남제화를 만났다. 그녀가 급하게 손짓했다.
“황상, 어디 가세요?”
남제화가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잠깐 위지불이가 보이지 않아 찾아 나선 참이었다. 위지불이의 얼굴을 보자 그는 얼굴에 자연스레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네가 이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구나?”
위지불이는 말없이 싱긋 웃기만 했다. 뒷짐을 지고 고개를 높이 쳐든 그녀는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하지만 남제화의 눈엔 아무리 봐도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위지불이를 보던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기쁜 일이기에 이렇게 땀을 잔뜩 흘렸느냐?”
그는 땀수건을 꺼내 위지불이의 땀을 닦아 주었다.
“짐에게 말해 보거라.”
위지불이는 멀리 있는 궁녀가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을 보고 어색한 표정으로 남제화의 손을 피했다.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남제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좀… 부적절했다.
위지불이가 몸을 피하자 남제화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남자의 땀을 닦아 준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확실히 이건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는 웃음으로 당황함을 감췄다.
“긴장하지 마라. 난 너를 아우로 여길 뿐이다.”
위지불이는 붉어진 얼굴로 털털한 척했다.
“아니에요. 황상께서 땀을 닦아 주시다니… 제가 감당할 수 없어서요. 다른 이들이 볼까 걱정이에요.”
“그들도 다 네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남제화는 어색했던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아직 너의 좋은 일을 알려 주지 않았구나. 짐에게 들려주겠느냐?”
위지불이는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방금 강암룡에게 본때를 보여 줬어요. 또 나를 건드렸단 봐라!”
“그를 어떻게 했느냐?”
“별거 아니에요. 피가 좀 나게 했을 뿐이에요.”
남제화는 놀랐다.
“오, 대단한데?”
“당연하죠.”
위지불이는 큰소리쳤다.
“그자를 상대하는 건 완전 식은 죽 먹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