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7화
강암룡은 남제화에게 예를 표했다.
“폐하, 상주문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남제화는 손사래를 쳤다.
“일단 두고 가거라. 짐이 이따가 보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이 서재에 두고 가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한 강암룡은 물러나기 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위지불이를 주시했다. 위지불이는 그를 전혀 겁내지 않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이미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강암룡은 그 일을 황제께 일러바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처럼 남제화 뒤에서 몰래 움직이려는 터. 뭐든 얼마든지 해 봐라. 어차피 막을 방법은 다 있으니까. 그녀에게는 든든한 뒷배도 있었다. 그녀는 뭘 하든 간에 남제화가 저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 믿었다.
도자기병으로 강암룡을 맞히지 못했으니 위지불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뱀 때문에 수명이 반이나 줄었는데 이렇게 강암룡을 봐줄 순 없었다. 그녀는 방 안에 앉아서 한참 동안 고심했다. 도자기병은 피할 수 있다지만, 물은 피할 수 없겠지. 물이 쏟아져서 그가 시원하게 폭삭 젖는다면 쌓인 울분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그녀는 물을 한 대야를 난간 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강암룡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위지불이는 대야를 슬쩍 기울였다. 강암룡은 피하지 못하고 흠뻑 젖었다.
강암룡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문제는 들고 있던 상주문이 모두 젖어 버린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힘껏 물을 털어 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대로 대전에 들어갔다.
남제화와 위지불이는 대전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흠뻑 젖은 강암룡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살수절潑水節(물 뿌리기 축제)은 아직 멀었는데… 넌 어찌 온몸이 흠뻑 젖었느냐?”
강암룡이 사실대로 답했다.
“방금 소인이 복도를 지나는데 누가 위에서 물을 쏟았습니다. 마침 그 밑을 지나다가 소인도 다 젖고 상주문도 젖었습니다. 소인을 벌하여 주소서.”
말을 마치자 그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위지불이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 총관, 액땜했으니 오늘 운이 좋으시네요. 좋은 일이 있겠어요.”
강암룡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폐하, 소인이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물벼락을 뿌린 자를 반드시 잡겠습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 어느 궁녀 하나가 꾀를 부려서 아무렇게 물을 내버린 모양이군. 뭐, 큰일은 아니니 조사할 것 없다. 앞으로 네가 주의하도록 하거라.”
강암룡은 남제화가 위지불이를 감싼다는 걸 알고 아예 툭 터놓고 솔직하게 말했다.
“폐하, 소인이 의심하는 바는…….”
“그 입 다물라.”
그의 말을 끊은 남제화는 고개를 돌려 위지불이를 바라봤다.
“넌 먼저 나가거라. 짐은 암룡과 할 말이 있다.”
위지불이는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나 몰래 내 욕하지 말아요. 어쨌든 제가 그런 건 아니니까요.”
그녀는 문가에 숨어 그들의 말을 엿들으려고 했지만 너무 멀어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강암룡이 말했다.
“폐하, 위지불이가 한 짓입니다. 비록 재빨리 도망갔지만… 소인이 분명히 보았습니다.”
“진짜 보았느냐?”
강암룡은 확신했다.
“정말 봤습니다.”
남제화는 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혹시 네가 그 애의 침대에 뱀을 풀어놓아서 그 애도 너에게 물을 끼얹은 건 아닐까?”
강암룡은 황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자는 도자기병으로 소인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소인이 피해서 망정이지요. 피하지 못했다면 앓아누웠을 겁니다.”
남제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쨌든 다치진 않았잖느냐. 네가 뱀을 풀어놓아서 그 애를 놀라게 했고, 그 애는 네게 물을 뿌리는 것으로 복수한 것 아니냐. 겉으로 보기엔 비긴 것 같지만, 암룡 네가 이겼다. 그 애는 그날 밤 거의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거든.
만약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복수하도록 해라. 낮에 하진 말고. 그 애가 짐에게 일러바치면, 짐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밤에 쥐 죽은 듯이 몰래 하거라. 짐이 잠든 뒤라면 상관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한 가지, 그 애의 생명을 해쳐서는 절대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짐이 네 목숨 또한 거둘 것이다.”
강암룡은 어안이 벙벙했다. 위지불이를 죽이진 못하지만 계속 골리는 것은 가능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가서 잘 생각해 보게. 상주문은 잘 말려서 서재에 갖다 놓고.”
“네, 물러가겠습니다.”
강암룡은 젖은 문서들을 들고 물러갔다. 남제화는 홀로 대전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문득 너무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적막함을 동무 삼아 지냈던 그인데… 어째서 이 적막이 싫어진 걸까?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위지불이를 찾으러 나갔다. 그녀가 있으면 절대 적막하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복도에서 공작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공작과 많이 친해진 그녀는 공작의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게다가 공작 또한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그녀의 손짓에 꽁지 깃털까지 펼치며 말이다. 그녀는 남제화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날짐승이든 들짐승이든 모두 영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 대해 주면 그들도 그 사람에게 잘 대해 줄 것이다.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옥수수 알맹이 한 줌을 한 번에 던졌다. 그 바람에 공작들은 서로 먹겠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강암룡이 나를 일러바쳤죠? 내가 물을 뿌렸다고 했죠? 그렇죠?”
“혹시 네가 뿌린 거냐?”
“아니요.”
“넌 사내가 아니냐? 자기가 한 일은 사내답게 인정해야지. 암룡이 뱀을 방사한 것은 자기라고 자백했다.”
위지불이가 턱을 쳐들었다.
“그럼 나도 물을 뿌린 건 인정할게요.”
“물만 뿌린 게 아니라 도자기병도 던졌지?”
“못 맞힌 게 아쉽죠.”
위지불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왜요? 혹시 절 처벌할 건가요?”
“그럴 리가?”
남제화는 뒷짐을 진 채 공작들을 바라봤다.
“강암룡이 좀 지나쳤다. 네가 훈계한 것은 옳아. 나는 성미가 좋은 황제라 아랫사람을 처벌하는 일이 드물지. 만약 그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얼마든지 복수해도 괜찮다. 나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을 테니. 하지만 단 한 가지… 절대 그를 죽이지는 말거라. 물론 죽일 수도 없겠지만.”
위지불이는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그자가 당신보다 무공 실력이 더 좋아요?”
“그렇진 않다.”
“그러니까요. 난 당신도 죽이지 못하고 저자도 못 죽인단 말이에요?”
“인명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란 말이다. 게다가 그는 쉽지 않은 사람이다. 만약 그가 너한테 독을 쓴다면 내가 너를 반드시 구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적당히만 하거라.”
“그자를 죽일 수는 없지만, 상대하는 건 언제든지 괜찮다고요? 황상께서는 우리가 싸우길 바라시는군요?”
“바라는 건 아니다.”
남제화는 피식 웃었다.
“너는 내 사람이니 네가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 이들이 사납게 싸우면 싸울수록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좋았다.
* * *
강암룡은 홀로 한참을 궁리했지만, 남제화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위지불이를 감싸고 있지만, 왜 그에게 위지불이와 싸우기를 종용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위지불이의 목숨을 거둘 수 없으니 계속 겁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겁을 줘서 쫓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는 위지불이가 거처 안팎에 웅황 가루를 뿌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웅황 가루는 별것 아니었다. 원래 뱀은 천성적으로 웅황을 꺼리지만, 그는 뱀을 제어할 수 있기에 뱀이 웅황 가루를 피하지 않게 할 방법이 있었다.
그날 밤, 위지불이는 웅황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에서 잠을 청했다. 얼굴에는 면사로 가려서 웅황 냄새를 막은 상태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강암룡에게 본때를 보여 줄까 하고 고심하는데, 뭔가 차가운 것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머리맡에 있던 촛대를 들고 불을 비추니 이불 밑에서 무언가 기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서 그 길로 도망쳤다. 그리고 맨발로 땅을 디디는데 뭔가 미끄러운 물체가 밟혔다. 너무 놀라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빛을 비춰보니 땅바닥에도 뱀 여러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그녀는 정신없이 남제화의 침전으로 뛰어들었다. 휘장을 뚫고 들어온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그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남제화를 몇 번이나 밟았고 그는 잠이 다 깨 버렸다. 남제화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왜 또 온 거냐?”
“뱀.”
위지불이는 이불 한 귀퉁이를 껴안고 넋을 잃은 채 말했다.
“또 뱀이 있어요.”
“그래?”
남제화가 일어나 앉았다.
“어찌 또 뱀이 나타났다는 것이냐? 내가 가서 보고 오마.”
위지불이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지 말아요, 폐하가 간 사이에 뱀이 여기에도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걱정 말거라. 감히 내 침상에 뱀을 풀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고 여기 있거라.”
위지불이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남제화는 안쓰러워서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다가가서 녀석을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건 좀 어색했다. 만약 녀석이 여자라면 모르지만, 남자 두 사람이 껴안고 있으면 그게 무슨 상황이겠는가? 남제화는 휘장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위지불이는 숨을 헐떡거렸다. 강암룡, 이 천하의 나쁜 놈!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그녀는 촛대를 들고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폈다. 그녀는 궤짝에서 베개 두 개와 이불을 꺼내서 침대로 돌아왔다. 베개 한 개를 가운데 두고 나머지 베개 한 개는 품에 안은 채 옆으로 누워서 남제화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남제화는 얼마 안 되어 금방 돌아왔다. 그녀가 옆으로 누워 있자 그는 괜히 투덜거렸다.
“오늘 밤 또 여기서 자려고 하느냐?”
위지불이는 빨개진 얼굴로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 침대에서는 절대 못 자요. 황상의 보금자리를 하룻밤만 더 빌려야겠어요. 내일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