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4화
남제화가 입꼬리를 올린 채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그럼 네가 내려오너라. 난 가서 뱀에게 인사를 해야겠다.”
도무지 땅으로 내려갈 수 없었던 위지불이는 그의 목을 더욱더 꼭 껴안았다.
“안 돼, 저놈이 우회해서 나를 먼저 잡아먹으면 어떻게 해요?”
“나는 황제인데, 네가 짐의 등에 올라타는 게 가당키나 하느냐?”
“빨리 여길 떠나요. 뱀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내려갈게요.”
남제화가 말했다.
“네가 업혀 있고 싶으면 업혀 있거라. 난 그래도 가야 한다. 넌 소리만 내지 말고 조용히 있거라.”
그가 다시 거대한 뱀에게 다가가자 위지불이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껴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어쨌든 혼자 서 있는 것보다 남제화의 등에 업혀 있는 것이 나았으니까! 남제화는 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가거라. 나와서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이것 또한 죄업이다. 짐이 오늘은 사찰에 못 갈 것 같으니 네가 대신 소식을 전하거라.”
뱀은 온순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위지불이는 너무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뱀이 말도 알아들어요?”
“뱀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단다. 특히 영사는 부처님의 훈도를 받은 만령의 우두머리지.”
“뱀이 불법佛法도 알아요?”
“남원은 신비로운 나라다. 나중에 너도 알게 될 것이다.”
남제화가 몸을 돌리자 위지불이가 말했다.
“먼저 뱀에게 멀리 떨어지라고 해요.”
그가 몸을 돌려 그녀가 뱀과 가까워지자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남제화는 뱀에게 손짓했다.
“나무 위로 돌아가라.”
커다란 뱀은 몸을 돌려 나무줄기를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제야 위지불이는 천천히 남제화의 등에서 내려왔다.
“뱀이 사람 말을 알아듣다니, 진짜 똑똑하네요.”
“남원은 어딜 가든 짐승들이 많다. 백성들은 날짐승, 들짐승과 어우러져서 평화롭게 지내지. 네가 진심으로 대한다면 짐승들도 분명 너를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때론 사람보다 짐승과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지.”
이 세상에서 가장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리 배고파도 호랑이는 절대 자기 새끼를 잡아먹지 않지만, 탐욕스러운 인간은 가족 간의 정이나 도의를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위지불이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의 말이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들까. 게다가 남제화의 말투에 슬픔과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지 그가 사연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참을 걸은 뒤에야 위지불이는 제가 아직도 남제화에게 업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포감이 사라지자 빈자리를 채우는 건 수치심이었다. 심지어 남제화가 먼저 건드린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그의 등에 기어 올라간 것이 아닌가. 수치심이 몰려온 위지불이는 발버둥 쳤다.
“내려줘요. 내가 걸어갈게요.”
남제화는 그녀를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하게 업었다.
“됐다. 어차피 그런 상태로는 걸을 수도 없지 않느냐? 조금만 더 가면 산기슭에 도착한다. 그럼 마차로 돌아가거라.”
위지불이가 말했다.
“황제인 당신이 시종을 등에 업으면 어떡해요? 체통도 없어요?”
남제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내가 그리 말했지만, 네가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위지불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위지불이가 몇 차례 더 발버둥 쳤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어차피 발바닥도 살갗이 까져 땅에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유야무야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는 그간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발을 쓰다듬고, 팔뚝을 빨았다. 여러 가지 부끄러운 일을 겪고 난 위지불이는 예전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물었다.
“산까지 올라갔는데 예불을 드리지 않다니… 부처님께서 노하시지 않겠어요?”
“부처는 마음속에 계시니 성심을 다하면 그걸로 족하다.”
“쳇, 무슨 부처님이 가슴에 계셔요? 다 핑계일 뿐이지. 전 당신처럼 게으른 황제는 본 적이 없어요. 우리 동월의 황제는 이렇지 않아요. 얼마나 부지런하시다고요.”
“동월의 황제를 본 적이 있느냐?”
“봤지요. 공자께서 가신 날. 황상과 황후께서 위지 가문에 오셨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이 오지는 않으셨어요. 황상께서 먼저 오시고 황후께서는 나중에 오셨어요.”
“그럼… 황후도 만났느냐?”
“만났죠.”
위지불이가 말했다.
“그때 어린 저는 어머니와 맨 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어요. 다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전 몰래 쳐다봤죠. 황후 마마께서 정말 아름다우셨어요. 이미 태자를 낳으셨다고 들었는데도 처녀처럼 보이더라고요.”
“마음이 선량하면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남제화가 한마디 덧붙였다.
“너희 황후 마마가 그럴 것이다.”
“당신도 우리 황후 마마를 좋아하세요?”
“물론이지. 그녀를 아주 좋아한다.”
남제화가 동월의 황후를 좋아한다고 하자 위지불이는 아주 기뻤다.
“그럼, 우리 황상은요?”
“너희 황상은…….”
남제화는 콧방귀를 뀌며 입을 닫았다. 위지불이는 불현듯 현재 남원이 동월에 신복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 동월의 황제에 관한 얘기는 남제화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화제일 것이다. 그녀는 급히 말을 돌렸다.
“강암룡이 황상께서 저를 업고 있는 걸 보면 저를 죽이려 할 거예요.”
“내가 있는 한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없을 때는 조심하거라. 그는 너의 신분을 알고 있고 나를 보호하는 것이 그의 책무이니라. 그가 너를 없애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위지불이는 어쩐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남제화가 그녀에게 강암룡을 조심하라고 당부하다니.
“내가 죽지 않길 바라요?”
“물론이지. 죽이고 싶었다면 뭐 하러 널 구하려고 그렇게 애썼겠느냐?”
“왜요?”
“네가 죽으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지 않느냐.”
위지불이는 그를 노려봤다. 결국 날 무시하는 거잖아!
산기슭에 이르자 강암룡의 모습이 보였다. 위지불이는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다소 켕기는 점이 없지 않았으므로.
“감히! 네가 어찌 폐하의 등에 업혀 있단 말이냐! 폐하께서 얼마나 존귀한 분이신데! 네가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아니, 이건 반역이다. 여봐라!”
남제화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시끄럽게 떠들지 마라.”
“폐하.”
강암룡이 얼굴을 찡그렸다.
“어찌 이놈을 업어 주셨습니까? 이자는 보잘것없는 동월의 놈일 뿐입니다. 이렇게 총애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다리를 다쳐서 걸을 수 없다.”
남제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명했다.
“마차를 불러오너라.”
“폐하.”
강암룡은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마차에 태우실 작정이십니까? 그것은 규율에 어긋납니다.”
“짐과 함께 식사도 하는데 마차를 태우는 것이 어때서 그러느냐?”
남제화가 손짓하자 마차가 다가왔다. 시위가 발을 걷자 그는 위지불이를 마차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위지불이가 타고 온 말에 올라타 손을 휘저으며 명했다.
“환궁하라.”
여러 필의 말이 마차를 에워싸고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향을 피운 마차 안에 앉아 있으니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훈향은 알맞게 피어올랐고 방석은 부드러웠으며 소반에 놓인 신선한 과일은 먹음직스러웠다.
그녀는 과일을 먹으려 했지만 더러운 손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결국 손을 옷에 벅벅 문질러 닦은 후에 과일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과 함께 향긋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황제는 정말 호강하는구나……. 그녀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한데 오늘은 그녀가 황제의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남제화 곁에 있는 덕에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게 된 셈이다.
황제가 먹는 걸 같이 먹고, 황제가 정전에서 자면 그녀는 편전에서 잤다. 의복도 가장 좋은 원단으로 지은 것을 주었고, 그녀에게 준 단도도 금은보석이 박힌 최상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제화는 그녀에게 너무 잘해 주었다. 심지어 오늘까지 그녀를 세 번이나 구해 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니… 이건 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까?
그녀가 조용히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자 마침 남제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서둘러 발을 다시 내렸다.
남제화는 어리둥절했다. 불이의 얼굴이 왜 저렇게 붉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중독된 건가? 산에는 독이 든 것들이 꽤 많았다. 녀석은 동월 사람이라 독이 있는 것을 구별할 줄 모르니 뭘 잘못 먹은 것은 아닐까? 급히 마차를 세운 남제화는 발을 걷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얼 먹었느냐?”
과일을 씹어 먹던 위지불이는 그 질문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 뻔했다. 말문이 막힌 그녀는 손가락으로 소반을 가리켰다.
“내 말은… 산에서 무얼 따 먹은 게 있었느냐?”
위지불이는 안간힘을 쓰며 입안에 있는 것을 삼키느라 얼굴이 더 붉어졌다.
“산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얼굴은 왜 그렇게 붉어진 것이냐?”
“붉어 보여요?”
위지불이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모른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안 붉어졌어요.”
“어디 아프지는 않느냐?”
위지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심장 박동이 다소 빠를 뿐, 그녀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손을 내게 줘 보아라.”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내놓은 손을 자세히 살폈다. 정상인 걸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강암룡은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상은 완전히 저 가녀린 놈에게 빠지신 것이 틀림없었다.
궁으로 들어와서 강암룡이 위지불이에게 마차에서 내리라고 하자 남제화가 그를 막아섰다. 그리곤 위지불이를 직접 품에 안았다.
“대야에 온수를 받아 대령하고 연고와 은 가위를 가져오라.”
강암룡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며 물러갔다. 강암룡이 서둘러 물건을 준비하자 남제화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폐하, 이런 일은 소인에게 맡기십시오.”
남제화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감히 짐의 사람을 만지겠다고?”
그 말에 위지불이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남색을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녀가 그의 사람이 되었는가? 당황한 강암룡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소… 소인이 어찌 감히.”
그는 천천히 한쪽으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