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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73)화 (772/1,192)

제773화

남원은 독실한 불교 국가로, 황제는 매달 사찰에 가서 예불을 드려야 했다. 사찰을 오가는 길에선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남제화는 황제가 행차할 때의 의장이 너무 요란스럽다며 매번 강암룡만 데리고 다녀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당연하다는 듯 위지불이와 동행했다.

강암룡은 호위 몇 명과 산 아래에 남아 대기했다.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신발을 벗는 걸 보고 의아했다.

“산길을 걸을 때도 신발을 벗어야 하나요?”

“벗어라. 이건 규칙이다. 아무리 내가 황제라 해도 규칙을 어기면 부처님께서 노하실 것이다.”

황제가 신발을 벗었으니 위지불이도 당연히 벗어야 했다. 그녀는 약간 불만스러웠다. 궁중에서는 그렇다고 해도 산길은 울퉁불퉁하고 돌멩이가 널려 있으니 발이 배길 것 아닌가.

그녀는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남제화를 따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길바닥에는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 그리고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게다가 벌레까지 우글거렸다. 위지불이는 좀처럼 편안하게 걸을 수 없어서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규칙이야! 예불을 드리러 맨발로 산에 올라가야 한다는 소리는 난생처음 듣는데! 적각대선赤腳大仙(알몸으로 만유(漫遊)한다는 신선)이라도 섬기는 거야, 뭐야?’

그녀는 천천히 걸어갔다. 고개를 들자 남제화와 벌써 삼 장이나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냐? 빨리 오너라. 계집도 아닌데 왜 이렇게 느린 것인지.”

위지불이는 눈을 치켜떴다. 원래 계집이거든요!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며 속도를 늦추었다.

“맨발로 산길을 걸어본 적이 없느냐?”

위지불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위지 가문이 가난해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집안도 아니고, 뭐 하러 맨발로 돌아다니겠어요?”

남제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위지문우 덕분에 너희 위지 가문이 지금처럼 다시 흥성해졌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어디서 떠돌고 있을지 알 수 없지.”

위지문우를 언급하자 위지불이는 어쩐지 마음이 상했다. 그렇게 좋은 공자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다 남원의 개 때문이야! 그녀는 화가 나서 고개를 들고 남제화를 노려봤다.

“당신은 우리 공자를 입에 올릴 자격이 없어요!”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충동적인 성격으로 어떻게 자객이 되었느냐?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위지 가문에 그렇게 인물이 없느냐? 왜 너를 보냈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위지불이는 제 발이 좀 저렸지만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날 보낸 게 어때서? 내가 정말 당신을 못 죽이는 줄 알아요? 내가 아직 실력 발휘를 안 해서 그런 거예요!”

남제화는 괜히 놀란 척했다.

“아직 실력 발휘를 안 한 거였나? 왜 아직도 안 했지?”

위지불이는 그의 과장된 표정에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또 나를 업신여긴다 이거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단도는 산 아래에 있었다. 살기가 강해서 무기는 산에 오를 때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했다. 단도만 있었다면 정말 그에게 본때를 보여 줬을 텐데.

그녀가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고 남제화는 하하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건드리면 파르르 떨며 화를 내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객이 임무를 수행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노련한 자객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에 행동한다. 결과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한 방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시 철수해야 한다. 만약 결과에 연연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위지불이 같은 자객을 난생처음 봤다. 이놈은 심계를 꾸미기는커녕 생각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무엇이든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그날 숲에서 그녀가 그를 불렀을 때, 목소리와 표정이 전부 평소와 달랐다.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구덩이에 일부러 빠진 건, 단지 위지불이가 어떻게 하려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근데 맥없이 위지불이까지 구덩이로 떨어질 줄은 몰랐다.

기껏 그녀를 밖으로 내던졌더니 이번에는 자신이 설치한 암기에 당하기까지 했다. 만약 위지불이가 중독되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웃겨서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엉터리 같은 자객이라니. 그를 암살하려면 백 년을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됐다. 그만 노려봐라.”

남제화가 산을 가리켰다.

“원한이 있는 사람은 올라가면 안 된다. 부처님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며 원망하지도 노여워하지도 않는 걸 중요시한다.”

위지불이가 말했다.

“나야말로 남원의 부처에게 예불하지 않겠어요. 난 안 갈래요. 혼자 가세요.”

그녀는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서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남원의 개 앞에서 약한 척하긴 싫어서 꾹 참았을 뿐이다.

“정말 안 가겠느냐?”

남제화가 그녀에게 물었다.

“안 갈래요.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을게요. 어차피 산 아래에도 당신 사람들이잖아요? 뭐가 걱정이에요?”

위지불이는 나무에 기대서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웅크리고 앉은 남제화는 직접 그녀의 발을 들어 올리고 살폈다.

“피부가 벗겨졌구나.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

위지불이는 발버둥 쳤다.

“뭘 하려고 내 발을 만지는 거예요? 좀 까진 게 뭐 어때서?”

하긴, 남자가 피부 좀 벗겨진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그 꼬질꼬질한 발바닥을 보고 가슴이 아려 왔다. 위지불이는 발도 정말 연약하게 생겼다. 피부도 뽀송뽀송하고 통통한 것이 마치 옥으로 빚은 것 같았다. 그런 발바닥이 꼬질꼬질해진 것도 모자라 살갗까지 벗겨졌으니……. 그는 불이의 발을 내려 놓았다.

“그래, 여기서 기다려라. 부처님께 예불만 하고 곧장 내려오마.”

두 걸음 내딛은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여기 혼자 있을 수 있겠나? 아니면 내가 먼저 널 내려 보내서 강암룡과 합류하게 돕겠다.”

위지불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잊지 마세요. 당연히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얼른 가세요.”

위지불이는 다른 재주는 없어도 담력 하나는 매우 컸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지불이는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발은 무언가 잔뜩 묻어 있었고 피부가 까진 부위는 화끈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으로 벗겨진 껍질을 뜯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건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잡아서 뜯으니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더는 건드릴 수 없었다. 껍질이 축 늘어진 모습은 너무 징그러웠다.

눈물을 닦은 그녀는 애처로운 한숨을 자꾸만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임무를 완수하지도 못하고 저만 계속 다치고 있지 않은가. 남원의 개에게 웃음거리나 되다니. 그녀도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러 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남원은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그녀는 나무 그늘 밑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늘진 곳에 숨어서 무릎을 껴안은 그녀는 무료함에 잎사귀를 뜯으며 놀았다. 금방 흥미를 잃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땅 위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관찰했다. 나뭇잎으로 길을 막으니 벌레가 빙글빙글 도는 게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에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만약 짐승이라면 맨손으로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도망인데, 발에 상처가 있어서 빨리 달릴 수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위지불이는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나무 기둥에 의지해 일어나 굵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도망가기는커녕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다. 바로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위지불이가 유일하게 무서워 하는 것이 뱀이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고 숲속에서 한 무리의 새들이 퍼드득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커다란 뱀은 선홍빛 혀를 날름거리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뱀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머리를 위아래로 기웃거렸다. 위지불이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땅바닥으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혼비백산이 되어 줄곧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가 땅에 쓰러지자 커다란 뱀은 머리를 움츠리더니 천천히 나무 기둥을 따라 아래로 기어 내려왔다. 위지불이는 겁을 집어먹어서 발이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 땅 위의 자갈과 나뭇가지를 집어서 뱀에게 던졌다.

“오지 마, 이리 오면 죽여 버릴 거야!”

뱀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뱀이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위지불이는 땅바닥을 허둥지둥 기어갔다. 강렬한 삶의 욕구가 끓어오른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임무도 완수하지 못했는데, 어찌 뱀한테 죽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뱀에게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그런 죽음은 끔찍했다. 아마 시신조차 완전하지 않아서 다음 생에 인간으로 환생할 수도 없을 것이다.

거대한 뱀은 그녀가 땅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빤히 보더니, 다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뱀의 머리가 땅에 닿았을 때, 위지불이는 세상에 저렇게 긴 뱀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머리는 이미 땅에 닿았는데 몸통은 나무줄기에 붙어 있었고, 심지어 꼬리는 나뭇가지 끝에 감겨 있었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뱀이었다.

참혹한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흐르는 눈물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익숙한 누군가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마치 친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안도하여 울음을 터뜨렸다.

“살려 줘요! 제발 살려 주세요!”

남제화가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를 일으켰다. 위지불이는 순간 기사회생이라도 한 듯 손발로 그의 몸을 휘감았다.

“얼른 도망가요. 얼른!”

남제화는 원숭이가 그의 등에 매달린 것 같아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산에 오르던 도중, 갑자기 그녀의 비명이 들려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한데 이제 보니 뱀을 만난 것이었다.

“겁내지 말거라, 저 뱀은 독이 없다.”

“독이 없어도 사람을 물잖아요. 아까 나를 물어뜯으려 했어요.”

“저 뱀은 사람을 물지 않는다.”

남제화는 천천히 설명해 줬다.

“저 뱀은 이 산에 있는 영사靈蛇다. 사람을 물지 않고 저녁이 되면 사찰로 돌아가지.”

그 거대한 뱀은 마치 남제화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 보아라, 우리에게 우호적이라는 걸 표현하고 있지 않으냐.”

위지불이는 믿지 않았다.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

남제화는 그녀를 등에 업은 채 거대한 뱀에게 다가갔다. 놀란 위지불이는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예요? 가지 말아요. 위험하다고요!”

남제화는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내가 빨리 죽기를 원했지 않느냐? 내가 뱀에게 먹히는 게 네가 원하는 바가 아니냐?”

위지불이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내가 뱀에게 잡아먹히는 게 싫다고요.”

“날 먹으면 배가 불러서 널 안 먹을 거다. 그럼 넌 도망갈 수 있다.”

“그래도 안 돼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죽일 거예요. 그러니 뱀한테 잡아먹히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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