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2화
“여기는 변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 당연히 짐이 잘 알지.”
“사람이 없어 비워진 건 그렇다 치고… 황상께서는 왜 다른 용도로 이곳을 활용하지 않으셨나요?”
남제화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은 갔지만, 물건은 남아 있으니 이곳에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지 않겠느냐.”
위지불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황상, 예전에 우리 공자님과 친했겠지요?”
남제화는 담담하게 답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위지불이는 가슴이 다시 쿵쿵 뛰었다. 그건 분명 원했지만, 얻지 못한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작은 연못의 푸른 수면을 보면서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저택을 한 바퀴를 다 돈 뒤였다. 어떻게 해야 그를 다치게 할 수 있지? 남제화는 앞쪽 숲을 가리켰다.
“내가 저곳도 보여 주마.”
위지불이는 일순 어떤 계략이 떠올라 배를 움켜쥐었다.
“잠시만요! 잠시 급한 일 좀 해결하러 가야겠어요.”
“측간을 찾느냐? 저쪽에 있다.”
“아이고, 못 참겠어요.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위지불이는 배를 움켜쥐고 허겁지겁 숲으로 뛰어들었다. 기회가 보이지 않다면 기회를 만들면 된다. 계속 그가 함께 있으니 그녀는 일을 꾸미기가 불편했다. 숲에 들어간 그녀는 우거진 숲의 엄호를 받으며 함정을 꾸미기 시작했다.
막 암기暗器를 고정했는데 갑자기 발밑이 푹 꺼졌다. 급하게 가장자리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아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땅 위의 나뭇잎을 치웠다. 아래쪽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다. 얼마나 깊은지 어두컴컴해서 보이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숲속에 어째서 이런 구덩이가 있을까? 구덩이가 있는 연유를 짐작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순간 기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절묘한 연환계連環計를 펼칠 기회였다. 이번에는 아무리 남원의 개라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낙엽을 다시 쌓아서 흔적을 감쪽같이 감추었다. 남제화가 이곳에 빠졌을 때 암기를 던져서 그를 고슴도치로 만들 것이다. 설령 그가 고통을 참으며 구덩이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고 해도, 그녀가 다시 밀어 넣으면 될 일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배꽃 가시를 그의 몸에 모두 박아 넣을 것이다.
그렇게 부상을 입고 체력이 떨어진 그와 다시 독문절학 무공으로 죽을힘을 다해 한판 붙으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남원의 개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시신을 묻을 자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구덩이에 던져 버리면 수개월 뒤에 시신이 백골로 발견되더라도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완벽해!
위지불이는 자신의 계책에 감탄하며 입을 가리고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웬일로 이렇게 똑똑한 거지?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좀처럼 나오지 않자 그를 찾으러 숲으로 들어왔다.
“불이, 불이!”
“나 여기 있어요.”
위지불이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황상, 들어오세요. 여기 풍경이 멋져요.”
남제화가 말했다.
“네가 볼일을 본 곳으로 날 부르는 것이냐?”
“오줌을 싼 것뿐인데요. 냄새는 벌써 없어졌어요. 제가 어떻게 황상을 냄새나는 곳으로 오라고 하겠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무 밑에 선 위지불이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남제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네가 오줌을 싼 곳이 어디냐? 짐은 밟고 싶지 않다.”
“당연히 사람이 가지 않는 곳이지요.”
위지불이는 계속 손짓했다.
“여기 좀 보십시오. 이 나무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나무에 글씨가 있다고?”
남제화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눈을 팔던 그는 땅이 푹 꺼지더니 몸이 밑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 눈 깜짝할 사이에 위지불이는 번개처럼 손을 뻗어서 일찍이 손 안에 감춰 둔 암기를 그에게 쏘았다. 그녀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번엔 설사 남원의 개의 어깨에 날개가 돋아난다 해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녀는 발밑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서 있는 구덩이 입구의 흙이 단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제화는 막 구덩이 입구로 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그는 재빨리 두 손으로 받치며 그녀를 다시 위로 밀어 올렸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위지불이는 배꽃 가시를 박아 둔 나무 쪽으로 날아갔다.
위지불이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몸을 돌리려 애썼지만 가시가 전부 그녀의 팔에 꽂히고 말았다. 제가 준비한 함정에 시원하게 당한 셈이었다. 너무 아픈 나머지 위지불이는 얼굴을 찡그린 채 신음도 내지 못했다. 뒤늦게 뛰어 올라온 남제화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다쳤느냐?”
위지불이는 그가 절대 암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사 밖으로 나와도 온몸이 상처투성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옷이 좀 더러워진 것 외에는 너무도 멀쩡했다. 그는 여전히 그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더 고통스럽게 구겨졌다. 남제화가 다가와서 살펴보며 투덜거렸다.
“나무에 왜 이런 게 있지?”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에 박힌 날카로운 가시를 떼어냈다.
“음, 끝에 독이 묻어 있군.”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소매를 찢고 고개를 숙인 채 입으로 독을 빨아냈다.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가만히 있거라.”
그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를 꽉 붙잡은 그는 입으로 몇 번이나 독을 뽑아냈다. 위지불이는 어쨌든 여인의 몸이었다. 남자와 이렇게 친밀한 행위를 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그녀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만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죽으면 죽는 거죠, 뭐!”
“내가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이냐? 나를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냐?”
남제화는 옷자락을 찢어서 그녀의 팔을 감쌌다.
그가 자신의 상처를 싸매는 것을 지켜보던 위지불이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불이.”
그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네?”
위지불이는 고개를 들었다.
“왜요?”
“너는 공자의 저택에서 나를 죽이고 싶었지?”
“…….”
“불이, 날 죽이는 건 쉽지 않을 거야.”
“…….”
“이것 보거라, 날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네가 다치지 않았느냐. 내가 제때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너희 공자를 만나러 갈 뻔했어.”
“…….”
“두 번이다.”
남제화는 손가락 두 개를 쫙 펴서 그녀의 눈앞에 흔들었다.
“지난번에 중독된 너를 내가 살렸고 이번에도 또 내가 살려 준 셈이지. 동월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느냐?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해야 한다. 네가 나한테 두 번이나 신세를 졌다. 어떻게 갚겠느냐?”
그의 말이 맞았다. 남원의 개가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치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은인을 죽일 수 없지만, 그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가문 사람들은 모두 공자의 원수를 갚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찌 그녀가 사적인 이유로 공자의 복수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불이, 다음엔 조심 좀 하면 안 되겠니? 날 죽이지 못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렇게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거라. 짐이 매번 널 구할 수는 없단다.”
망설이던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듣고 결심했다. 남원의 개는 괘씸하기 짝이 없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가자, 네 몸엔 여독이 남았을 것이다. 서둘러 환궁해 해독환을 먹여야겠다.”
위지불이는 좀처럼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조롱하더니, 여독을 없애 주겠다고? 이게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그녀는 낙담했다. 이번에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남원의 개는 도대체 어찌 된 요물인가? 공자, 여기는 당신의 저택이잖아요? 하늘에 영이 있다면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여 공자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죠.
그녀는 맑은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녀에게 아직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남제화는 위지불이에게 해독환을 가져다주라고 명했다. 직접 해독환을 가져온 강암룡은 위지불이를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놈의 자객이 일을 꾸민 게 틀림없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무사하시고 도리어 자기 자신이 다친 것이다. 참 고소한 일이었다.
남제화는 해독환을 먹은 위지불이의 맥을 살펴 체내에 독이 모두 해독된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가 쉬게 했다.
위지불이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행동한 것 같았다. 남원의 개는 대단한 놈이었다. 웬만한 독은 그에게 소용없고, 무공도 그 경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를 가늠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말했듯이 그를 상대하려면 먼저 약점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기나긴 과정이므로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 뒤로 위지불이는 분수를 지키며 시선을 깔고 제법 수행원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녀는 매일 남제화 곁에서 먹고 마시고, 가무를 보거나 공작에게 먹이를 주며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너무나 여유로운 생활에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남제화에게 물었다.
“황제는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던데, 황상은 왜 이렇게 한가하세요?”
“한가하니 좋지 않으냐?”
남제화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이 얼마나 편하냐.”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그 뒤로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옅은 상실감 같은 것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는 권력이 제일 센 사람이었다. 무엇을 원하든지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상실감이라니?
남제화는 약속을 지켰다. 이틀도 안 되어서 그녀에게 예쁜 단도를 선물한 것이다. 광활한 남원엔 숲도 많고 들짐승도 많았기에, 이곳 사람들은 항상 허리춤이나 장화 안에 칼을 지니고 다녔다.
황제가 선물한 칼은 당연히 평범하지 않았다. 칼집에는 보석이 가득 박혀 있어서 한눈에 봐도 화려했다. 하지만 위지불이가 주의 깊게 살핀 건 보석이 아니었다. 그녀가 칼을 빼 들자 칼날이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얼굴을 비춰 보니 그건 정철精鐵로 주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위지불이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서 칼날에 대고 불었다. 머리카락은 곧바로 두 동강이 났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좋은 칼이군!”
“마음에 드느냐?”
“네.”
“나중에 그걸로 나를 죽여라.”
“…….”
남제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위지불이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황상, 할 말이 있는데 제가 말해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뭐든 말해도 된다.”
“공자의 죽음이 너무 큰 충격을 준 건 아닌가요? 그 충격으로 미치기라도 한 거예요? 왜 자꾸 죽을 생각만 하세요?”
남제화는 두 손을 벌리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어차피 빈둥빈둥 놀 거면 할 일이라도 찾아서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