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71)화 (770/1,192)

제771화

“무슨 희망이 있다는 겁니까?”

남제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황께서는 묵용감이 천범의 체면을 봐서 한동안 남원을 건들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쩌겠단 겁니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직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지. 우리는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면 된단다. 지난번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짐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제게 남은 짧은 인생, 스스로 최선을 다한다면 조상들에게 떳떳합니다.”

여제가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 분노를 토해 냈다.

“화아, 너의 투지는 다 어디로 갔느냐? 우리 남원의 사내인 네가 어찌 남의 나라에 신복한단 말이냐?”

남제화가 말했다.

“우리 남원은 세상과 싸우지 않고, 백성들도 편안히 각자의 삶을 영위했습니다. 이렇게 된 건 모두 태황의 야심 때문이 아닙니까!”

그는 넓은 소매를 세차게 뿌리치며 뒤돌아섰다.

“태황께서 별일 없으시면 짐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여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네 곁에 사람이 하나 생겼다던데…….”

남제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짐의 일은 태황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원래는 묻지 않으려 했단다. 그런데 듣자 하니, 같이 먹고 같이 지낸다고 하던데……. 게다가 남자라고? 화아, 이 어미는 정말 걱정이 되는구나.”

남제화는 여제까지 그런 오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짐은 단지 재미있는 녀석을 곁에 두고 기분 전환을 할 뿐입니다. 태황께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제 황제가 되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내가 꺼낸 얘긴 좀 더 생각해 보아라. 혹시 그 남자 때문이라면…….”

남제화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태황, 뭘 하시려는 겁니까?”

“어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다. 단지 황상을 걱정할 뿐. 만약 네가 분별력을 잃으면 장로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혹 그 애를 데리고 와 보겠느냐? 어미는 사람의 성품을 대충 가려낼 수 있단다.”

남제화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위지불이를 이곳에 데려온다면 아마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한걸음에 지하 감옥을 벗어난 그는 꽤 멀리까지 가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 위지불이가 복도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위지불이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긴 눈썹과 가는 눈매, 청초하고 고운 자태, 확실히 남자의 관심을 끌 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어쩐지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더라니…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살며시 녀석의 뒤로 돌아가 툭 치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놀란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숨을 헐떡이던 위지불이는 자기를 건드린 게 남제화라는 걸 확인하고 눈을 부라렸다.

“아니!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거예요?”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째려보는 것이 우스웠다. 무슨 사내 녀석이 이렇게 째려보는 걸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느냐?”

위지불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히 당신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우리 공자께서 남원에서 대장군이셨다고 들었어요. 그분이 원래 살던 저택이 그대로 있나요?”

“아직 있다. 계속 비워 두었지.”

“잠시 가 봐도 돼요?”

“그건…….”

남제화는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이 녀석은 왜 또 궁을 나가려는 거지?

“설마 제가 도망갈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예요?”

위지불이가 눈알을 굴리며 반문했다.

“그러면 황상께서 시간이 나거든 같이 가요.”

황제가 되기 전 남제화는 늘 궁궐 바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황제가 된 후로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찬 상태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어서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짐이랑 함께 가고 싶으냐?”

“시간 낼 수 있으세요?”

그에겐 남아 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는 곧장 응했다.

“아주 오랫동안 출궁하지 않았구나. 너와 같이 나갔다 와야겠다.”

“황상께서 출궁하시면 어마어마한 의장이 필요하죠?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위지불이가 말을 이었다.

“황상, 미복잠행이란 걸 아십니까? 황제가 조용히 나가 민정을 살피는 건데… 그래야 재미가 있죠.”

남제화는 당연히 미복잠행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혼자 나간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한두 명은 데리고 다닌다. 그는 그녀를 보고 씩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 짐이 너와 미복잠행을 나가야겠구나.”

위지불이는 기대감에 마음이 뛰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여기 두고 우리 둘만 가요.”

이왕 독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싸워도 이길 수 없으니, 남원의 개를 무력한 상태로 만들어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희망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궁궐 안에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오장육부가 잘려 나갈 것이다. 때문에 궁 밖으로 나가 조용한 곳을 찾아 손을 써야 했다.

고민하다 보니, 위지문우가 그 당시 남원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공자의 저택에서 남원의 개를 죽여서 공자의 억울한 혼백을 달래야겠다!

* * *

다음 날,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데리고 출궁했다. 강암룡은 그를 따라가려다 남제화의 매서운 눈빛에 질려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강암룡이 다급히 만류했다.

“폐하, 어찌 혼자 출궁하십니까? 시중들 사람 몇 명은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을 데려가겠다.”

위지불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걱정스러운 이유였다. 그는 동월에서 보낸 자객이었다. 그런 위지불이가 폐하를 모시겠는가? 분명 죽이려 들 것이다.

강암룡은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를 죽이려는 자객만 데리고 가려 하다니!

“폐하.”

강암룡은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위지불이는 폐하께 불의를 품고 있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절대로…….”

“그 입 다물라.”

남제화는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짐이 네가 태황께 소식을 전했다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나? 현재 너의 주인이 누군지 잊지 말아라.”

강암룡이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고개를 숙였다. 태황에게 소식을 전한 건 그였다. 황제는 충언을 듣지 않으니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었다. 태황의 손을 빌려서라도 위지불이가 황제의 곁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여기서 무릎 꿇고 있어라.”

남제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한 후, 위지불이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강암룡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위지불이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꿇어앉은 그를 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도발했다. 그는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황제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위지문우의 옛 거처는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은 오랜 시간 빈 건물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잡초가 무성하거나 먼지가 가득 쌓인 상태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한 것 같았다.

그와 위지문우의 관계는 말하자면 조금 복잡했다. 그들은 모두 왕위 경쟁자였다. 위지문우는 남원의 병권을 쥐고 있어서 여제도 그를 경계할 정도였다.

남제화는 천면인 계획에 있어서 위지문우와 태도가 달랐다. 그는 천면인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끝내 어머니인 여제의 뜻을 꺾지 못했다. 하지만, 위지문우는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여제에게 여러 가지 방법과 계책을 바쳤기 때문에 여제는 그를 매우 신임했다.

그는 한때 위지문우를 심지가 삐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싫어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위지문우는 백천범을 구하기 위해 저를 희생한 것이었다.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지문우는 시종일관 올바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지문우의 저택을 그냥 그대로 두었다. 저택이 그곳에 그대로 있으면… 다소나마 그리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택 대문을 열자 바닥에 나뭇잎이 한 겹 깔려 있었다. 청소하는 사람들이 아마 게으름을 피운 것 같았다. 하인들은 며칠에 한 번씩 와서 청소하는 것 같았다. 낙엽을 살짝 지르밟고 복도에 올라 나무판자를 밟자 둥둥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조금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위지불이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제화가 물었다.

“뭘 보느냐?”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이 아니라 너희 가문 공자의 귀신이다.”

위지불이는 목을 움츠렸다가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우리 공자님 귀신이라면 다행이죠. 혹시 복수하러 온 건지도 몰라요.”

남제화는 감회에 젖어서 대꾸했다.

“얼마든지 환영한다. 사실 정말 보고 싶구나.”

위지불이는 쳇, 하고 혀를 찼다.

“공자가 와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까 두렵지 않나요?”

“문우는 내 오랜 친우다. 죽어서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난 상관없다.”

“그렇다면, 자결하세요.”

“미치지도 않았는데 뭐 하러 자결하겠느냐?”

“방금, 죽어서 공자와 함께하겠다고 했잖아요!”

남제화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나를 죽이면 내가 문우와 저승에서 함께하겠다.”

위지불이는 득의양양한 그의 기색에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다. 이렇게 사람을 얕잡아 보다니, 두고 보자!

위지문우의 저택은 방 안이 바깥보다 훨씬 깨끗했다. 비록 탁자나 의자에는 먼지가 얇게 내려앉았지만, 아무렇게나 쓱 닦으면 앉을 수 있었다. 남제화는 아주 좋은 길잡이였다. 그녀에게 저택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

“이곳이 대청이고, 양쪽은 편청이다. 뒤로 가면 중간에 안뜰이 나온다. 그 애는 항상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했지. 뒤쪽은 그의 침실이고, 왼쪽은 서재……. 여기서 나가면 정원이 나온다. 계단 조심해라. 오호!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데도 여기는 다른 곳보다 꽃이 훨씬 많이 피었군. 저쪽으로 가면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을 지나면 숲이 펼쳐져 있는데…….”

위지불이는 말했다.

“공자가 떠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황상께서는 이곳을 잘 아시네요. 여기 자주 오시나요?”

남제화는 남색을 탐하지 않는다고 부인했지만, 십 년이 지나도 그에 대해 이리 잘 알고 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원의 개가 혹시 공자에게 애심을 품은 나머지 원망이 자라나 독살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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