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0화
강암룡 역시 물러간 후, 남제화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규칙 따위는 중시하지 않는 황제였다. 예전 강호를 누빌 땐 장사꾼들과도 호형호제했었으니, 황제가 된 지금 자객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그리 과한 행동은 아닐 터다. 그런데도 위지불이를 대하는 자신의 언행이 정말로 부적절했단 말인가? 오죽했으면 아랫사람이 이런 오해를 하겠는가?
그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위지불이가 달려들 때, 힘을 세게 준 탓인지 그의 입술이 조금 찢어졌다.
그때 그는 한 줄기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 입술이 맞닿던 순간, 누군가 미약이라도 쓴 듯 그의 몸은 굳어 버렸다. 그런 후에… 그녀는 그의 이빨 사이를 비틀어 열고 대단한 기세로 그의 입안을 마구 휘저었다. 그녀는 맹렬한 기세로 독과를 그의 목구멍까지 밀어 넣었다.
무림 고수인 그의 반응이 그토록 둔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촉촉하고 부드러운 혀가 그의 입안을 휘저을 때, 놀랍게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텅구리처럼 가만히 서 있었기에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비록 풍류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달콤함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건 단지 놀이에 불과할 뿐, 여자들이 그의 몸을 뱀처럼 휘감아도 정신을 잃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그는 혼이 나간 것 같았다.
그때의 그 녀석의 모습이 각인이라도 된 듯 자꾸만 떠올랐다. 꼭 감은 두 눈에, 의연한 표정. 이제야 그것이 적과 함께 공멸한다는 결연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위지불이, 재미있군.”
* * *
밥 먹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위지불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남제화는 녀석이 부끄러워 자신을 피하는 걸 알고 강암룡에게 직접 데리고 오라 명했다. 강암룡이 말을 전했다.
“폐하, 위지불이는 궁 밖으로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밖에서 먹을 겁니다.”
남제화는 불이가 이렇게 빨리 출궁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뭐 하러 가는지 불이가 말했느냐?”
“말하지 않았습니다.”
남제화는 음, 하고 침음했다.
‘설마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아예 떠난 건 아니겠지?’
식사를 그냥 물리고 차만 한 잔 마신 그는 복도에 서서 공작에게 먹이를 주었다. 옥수수 알갱이를 하나씩 던져 주자 공작새가 질서정연하게 먹이를 쪼아 먹었다.
언젠가 위지불이는 그에게 왜 옥수수를 한 알씩 먹이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그럴듯한 말로 답했지만, 사실, 이는 그저 무료한 시간을 해소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하루가 너무 길어서… 뭐라도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했다.
강암룡이 허리를 굽혀 가무를 명할까 말까 그의 의사를 물었다. 흥이 다 식은 그는 손을 내저으며 멀찍한 곳에 있는 궁문을 바라보았다. 강암룡은 그런 그를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잠시 좀 누워서 쉬십시오. 날이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남제화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대나무 난간에 기대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왜 그 순간에 넋을 놓고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것일까?
그날 오후, 그는 계속 멍하니 복도에 서 있었다. 강암룡이 몇 번이나 그에게 쉬라고 권했으나 그는 귀찮다는 듯 사람을 모두 물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시선에 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그게 위지불이의 것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녀석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났다. 그는 위지불이가 그의 시야에서 조금씩 커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내라고 하기에 위지불이는 키가 너무 작고 몸도 약해 보였다. 위지 가문에선 도대체 왜 저런 이를 자객으로 보낸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남제화는 직접 맞이하려고 걸음을 옮기다 이내 멈칫했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또 무슨 소문이 퍼질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별로 상관없었다. 하지만… 위지불이가 그런 소문을 듣게 되어 그를 경계할까 봐 걱정되었다. 위지불이가 계단 아래에 도착해 고개를 들고 그를 불렀다.
“폐하께서 왜 여기에 서 계세요? 안 주무세요?”
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미 쉬었다. 어디 갔었느냐?”
위지불이는 어깨에 걸친 천 자루를 토닥였다.
“저번에 산 보물들을 객잔에 맡겨 두었거든요. 오늘 가서 가져왔어요.”
남제화는 궁금했다.
“뭘 샀지?”
위지불이도 어쨌든 아가씨였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자랑하고 싶었다. 그녀는 위층에 올라가 양탄자 위에 자신이 산 물건을 다 쏟아부었다.
“자요, 이것들 좀 보세요.”
남제화는 쭈그리고 앉아서 물건을 구경했다.
“어째서 다 연지분이나 향이냐?”
“모르는 소리 마세요. 남원의 연지분과 향은 아주 유명하다고요. 돈이 있다고 해도 살 수 없을 정도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많이 샀느냐? 동월에 가서 다시 팔려고?”
“절대 안 팔죠. 이건 제… 가족이 쓸 겁니다.”
“집안에 누이가 있느냐?”
“네.”
위지불이는 대답했다.
“우리 위지 가문에는 처녀가 아주 많거든요.”
짐이 물어본 건 너에게 친누이가 있냐는 거다.”
위지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네,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이름이 뭐지?”
“이름이…….”
짧은 순간에 그럴듯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위지불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알려 줘야 되죠?”
남제화가 웃었다. 그는 작은 향병을 손에 쥐고 장난을 쳤다.
“이렇게 많이 산 걸 보면 여동생을 많이 아끼는 모양이군.”
“당연하죠. 친동생이니까 당연히 아끼고말고요.”
“짐에게도 여동생이 있다.”
남제화는 아예 주저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짐도 그녀를 아끼지만, 우리는 너무 멀리 있어서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지.”
위지불이는 입술을 실쭉거렸다.
“여동생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니요? 당신은 황제잖아요? 명령만 하면 동생이 궁으로 올 텐데.”
남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명령만 하면? 남원은 지금 동월을 섬기고 있는데… 어디 감히 동월의 황후에게 직접 오라고 명할 수 있겠는가. 그는 물었다.
“너의 여동생은 어떻게 생겼느냐? 너랑 닮았느냐?”
“당연히 닮았죠. 완전 똑같아요.”
위지불이가 말을 이었다.
“판에서 찍어 낸 것처럼요.”
원래 한 사람이니 똑같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눈도 똑같다고?”
남제화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너랑 같은 눈이면 별로 안 예쁜데.”
위지불이는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안 예쁘다고요?”
“네가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 네 여동생 말이다.”
위지불이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들통날 뻔했다.
“사실 내 여동생은 참 예쁩니다. 위지 일가 처녀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요.”
“너희 위지 일가에 처녀가 모두 몇 명이나 있느냐?”
“아직 시집 안 간 처녀는…….”
위지불이는 손가락을 꼽으며 세어 보았다.
“대략 예닐곱은 될 거예요.”
대답하고 보니 뭔가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얼른 덧붙였다.
“아무튼 여동생은 정말 괜찮아요. 벌써 혼담을 꺼내는 사람도 있다고요.”
남제화가 말했다.
“시집을 갈 수 있다니 다행이구나.”
“하! 그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남원의 개 주제에! 위지불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반면 남제화는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마치 털을 바싹 세운 아기 고양이처럼 귀여웠다.
이때, 급히 나무 계단을 올라온 강암룡은 황제가 위지불이와 바닥에 나란히 앉아서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노점상처럼 연지나 향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위지불이에게 몇 마디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잠시 화를 꾹 참았다. 그리고 조용히 황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순간, 남제화는 낯빛이 차갑게 변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짐이 안 가면 또 어때서?”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남제화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매우 은밀한 지하 감옥이었다. 음침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두꺼운 철문을 겹겹이 통과하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왔다. 커다란 야명주가 네 귀퉁이에서 빛나고 유리 등잔이 기둥 높이 달려 있어서 음산한 지하 감옥은 마치 궁전처럼 환했다.
남제화는 보석으로 장식된 흑단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그 사람 역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닿자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팽팽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남제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황, 무슨 일로 짐을 오라고 하셨습니까?”
여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꽤 오래되었구나. 네가 날 모황母皇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이 말이다.”
남제화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뒷짐을 지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짐은 매일 정사를 돌보느라 바쁩니다. 한가로이 태황과 옛일을 회고할 시간 따위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얼른 말씀하십시오.”
“뭐라고? 군왕이 되었다고 친어머니인 나를 외면하겠다는 것이냐?”
남제화를 화나게 하는 건 그녀에겐 너무 쉬웠다.
“친어머니? 짐은 친어머니가 자기 친아들한테 독을 먹인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화아, 어미도 그땐 어쩔 수 없었단다. 그래도 이 어미는 네 목숨이 위험한 일은 절대로 한 적 없단다.”
남제화는 소매를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 여제의 거짓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너도 다 알 것이야. 어미가 그렇게 한 것은 모두 남원의 백성들을 위해서였단다. 동월 놈들이 우리 남원의 성지 열 곳을 빼앗아 가며 매년 대량의 금을 공물로 바치라고 했지. 이뿐만 아니라 약재, 향신료, 직물, 목재 등등… 남원이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약탈을 어찌 견디겠느냐? 계속 이렇게 간다면 백성들이 어찌 편히 살겠느냐?”
남제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태황께서 소위 천면인千面人 계획을 시행하지만 않았어도 남원이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건 다 태황이 만든 결과입니다.”
“화아, 너는 어째서 모르는 게냐?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단다. 남원 같은 약소국은 결국 강대국에게 먹힐 것이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남원이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음이야!”
“그렇게 태황께서 온갖 잔꾀를 다 부려서 도대체 뭘 얻었습니까?”
남제화가 냉랭한 비웃음을 지었다.
“여기 지하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바로 태황께서 원하는 것입니까?”
여제는 시선을 떨구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내가 묵용감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천범이 동월의 황후라면 아직 우리에겐 희망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