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9화
“폐하, 위지불이는 반역을 꾀하는 위험한 자입니다. 이자와 단둘이 계셔선 아니 됩니다.”
남제화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짐도 다 알고 있으니 나가거라.”
강암룡은 힘껏 발을 굴리고는 위지불이를 매섭게 노려본 뒤, 방을 나섰다. 남제화가 위지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머리가 어지럽진 않느냐?”
위지불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요.”
“네게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겠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날 독살하겠다고 저까지 독을 먹고 죽으려 하다니. 내가 빨리 대처하지 않았다면 넌 지금쯤 너희 공자를 만났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부끄러웠다. 원수는 살려 두고 그녀만 저승을 간다면 공자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정말 우스운 꼴이었다……. 한참 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독이든 당신한텐 아무 소용없어요?”
그녀의 눈엔 간절함이 느껴졌다. 남제화는 차마 매몰차게 대꾸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모든 독이 듣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원 사람들은 독을 쓰는 데 능하지. 나는 황자였다. 어릴 때부터 각종 독이 든 탕에 몸을 담그며 자랐기에 애당초 다른 이들과는 몸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네가 구해 온 독은 나에겐 소용없으나 너에겐 치명적이다. 그러니 독을 타기 전에 깊이 고민해 보거라. 방금처럼 했다간 날 독살하기는커녕 너만 목숨을 잃을 것이야. 내가 볼 때 독살은 어려울 듯하니, 다른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게 좋겠구나.”
위지불이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다른 방법이 뭐가 있는데요? 싸움도 못 이기는데.”
남제화는 그녀가 좀 더 투지를 갖길 바랐다.
“사람마다 약점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약점만 파악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지.”
“그럼 어디 한번 물어나 봅시다. 폐하의 약점이 뭔데요?”
남제화가 그녀를 흘기며 대꾸했다.
“내가 말해 주겠느냐? 네가 알아서 천천히 찾아봐야지. 게다가 내가 말해 준다 한들, 네가 믿기나 하겠느냐?”
그건 그랬다. 바보도 아니고, 누가 자신의 약점을 다른 이에게 알려 주겠는가?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한테. 남제화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별안간 질문을 건넸다.
“짐도 궁금한 게 있다. 방금 짐에게 독을 먹이려는 방법은 어찌 생각해 낸 것이냐?”
그 질문에 위지불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어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렇게 큰 열매를 남제화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내공 있는 사내에게 억지로 독을 먹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왕에 남원의 개가 자신을 흠모한다니… 눈 딱 감고 그의 품에 안기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남제화는 역시나 그녀를 밀쳐 내지 않았고 독과를 꿀꺽 삼켰다. 결과적으로 저만 죽을 뻔했지만……. 그는 왜 자신을 사지에서 꺼내 주었을까?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날 왜 구해 준 거예요?”
“하면 짐이 죽는 걸 보고만 있겠느냐? 네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하지만 난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요.”
“나도 안다.”
“알면서 날 구해 줬다고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네가 날 죽이지 못하는 걸 아니까.”
“…….”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남원의 개를 죽일 방법은 그녀에게 없었다.
“당신이 날 구해 주고 어찌하려는 건지 모를 줄 알아요?”
그녀가 얼굴을 굳힌 채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뜻있게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진 않을 테니까. 날 강제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이거든, 당신 앞에서 확 죽어 버릴 거예요!”
“…….”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강압적으로 사람을 다루는 걸 가장 싫어했다. 한데 강제로 어떻게 한다니, 대체 무엇을?
“하면 어디 말해 보아라. 내가 널 구해 주고 무얼 하려는지.”
“그걸 굳이 말로 해야 해요?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데.”
남제화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가 다 안다는 것이냐. 어째서 짐은 모르는 일이고?”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모르는 척 시치미는!”
“짐이 무엇 하러 모르는 척하겠느냐? 정말 모른대도.”
남제화는 더 궁금해졌다. 궁에 그가 모르는 일이 있다니?
“어서 말해 보거라. 말해 주면 좋은 걸 보상해 주마.”
“좋은 게 뭔데요?”
“원하는 게 무엇이냐?”
“당신을 죽이는 거.”
“그거 말고 다른 거.”
“당신의 약점.”
“다른 거.”
“칼.”
“그건 괜찮겠구나.”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며칠 안에 구해 주겠다. 하면 이제 말해 줄 수 있겠지?”
“당신이 날 구해 준 건…….”
위지불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당신의 사내로 삼으려는 거잖아요.”
남제화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정말 터무니없는 말이구나. 누가 그러더냐?”
“다들 그리 말했어요. 당신이 날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대한다고요!”
“해서 그 말을 믿은 것이냐?”
“당연히 믿죠. 방금도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는 말에 곧장 다가와서 바람도 불어 주었잖아요. 당신은 황제라고요. 어떻게 한낱 시종에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요? 내가 당신을 독살하려 했으니 응당 엄한 벌을 내려야지… 어째서 날 구해 준 거예요?”
그 말에 남제화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왠지 녀석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위지불이가 걱정되었고 유달리 마음이 쓰였다. 독이 퍼진 녀석의 모습에 깜짝 놀란 그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사내를 좋아한다니… 그는 분명 여인을 좋아했다.
“왜요, 말문이 턱 막히죠?”
위지불이가 냉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감히 내게 무슨 못된 짓을 하거든 콱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릴 테니 그리 알아요!”
“걱정 말거라. 짐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을 좋아한다.”
“거짓말, 다들 당신이 후궁을 들이지 않는 게 여인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래요.”
“후궁을 들이지 않는 건… 짐이 혼인하고 싶던 여인과 혼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상처가 컸던 나머지 혼인이 아예 하고 싶지 않아졌다.”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신은 황제잖아요. 당신이 취하지 못하는 여인도 있어요?”
“물론 있고말고. 이 세상에는 부귀영화, 권력,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들을 그런 것에 욕심이 없기도 하지…….”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별안간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의 얼굴도 조금은 어렴풋해졌다. 지금은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은 서북에 없다던데……. 먼 곳으로 떠났으니 이미 그를 다 잊었을 테지.
위지불이는 쓸쓸한 그의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그녀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군데요? 지금은 시집갔어요?”
“시집만 갔겠느냐. 아이도 있다.”
남제화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위지불이의 얼굴로 옮겼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짐이 널 어떻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짐은 그저 깊은 궁에 갇힌 지 너무 오래되어 조금 적막한 것뿐이다. 우연히 너 같은 애를 만나 한창 재미있던 참인데, 어찌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그저 그뿐이다.”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날 곁에 남겨둔 게 재미를 위해서였군요! 내가 별짓을 다 해도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일이었다. 사람을 대놓고 바보 취급하는 것이 아니던가. 차라리 총애를 받는 황제의 사내만 못했다. 남제화는 평소 어리바리하기만 하던 놈이 그의 의도를 빨리 알아맞히자 조금 난처했다.
“널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넌 날 죽이는 게 소임이니 소임을 다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 짐이 네게 그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거라. 실패가 준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더 발전할 수 있다. 네가 믿음만 가진다면 언젠가 날 꼭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황제는 아닐까? 어찌 자신을 죽이는 걸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준단 말인가?
“당신.”
위지불이가 물었다.
“죽음이 무섭지 않은 것 같은데?”
“죽는 게 뭐가 무섭겠느냐.”
남제화가 빙긋 웃었다.
“누구나 언젠간 다 죽는 것을. 그저 떠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이지.”
일찍 죽나, 조금 늦게 죽나 그에게는 별반 차이 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탈출해 위지불이에 손에 죽을 수 있다면… 그는 안식처로 떠날 수 있을 터였다.
“진짜죠?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정말 남자 안 좋아하는 거 맞죠!”
남제화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다. 난 정말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대도.”
“알겠어요. 그럼 믿어 볼게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내가 지금 당장 당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늘 날 경계할 필요 없어요. 천천히 당신의 약점을 찾을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해요.”
“그래, 경계하지 않겠다. 천천히 찾아보거라.”
위지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아직도 좀 어지러워요. 돌아가서 잠시 누울게요.”
방문 앞까지 걸어간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늘 구해 줘서 고마워요.”
그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 동월에 소식이 전해졌다면 부모님도 얼굴을 들지 못하셨겠지.
“고마워할 것 없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 짐은 어진 황제다. 죽어 가는 이를 보고도 구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질책하실 게야.”
위지불이가 자리를 뜨자, 그는 강암룡을 안으로 불렀다.
“궁 안에 위지불이가 짐의 사내라는 소문이 돈다던데?”
강암룡이 화들짝 놀랐다.
“그것이… 소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넌 총관리가 아니더냐. 그런데도 모르는 일이다?”
남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우스워 보이더냐? 뒤에서 짐을 헐뜯기나 하고. 소문이 어떻게 퍼진 것인지 확인하고 싹을 자르거라.”
“예, 폐하.”
강암룡이 굽실거리며 답했다.
“소인이 최대한 빨리 유언비어를 차단하겠습니다. 하지만…….”
“또 무엇이냐?”
“위지불이는 위험한 자이니 폐하께서는 응당 그자를 멀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헛소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