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8화
그녀는 어젯밤 신발을 기둥 뒤에 몰래 숨겨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신발이 벽 앞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남제화가 그녀의 암살 시도를 아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위지불이는 신발을 질질 끌며 풀밭을 밟았다. 맨발로 풀을 밟는 것보다 훨씬 더 편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거닐며 화려한 꽃을 눈에 담았다. 공작들은 그녀 곁을 태연히 지나다녔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서자 녹색 줄기에 비취색 잎사귀가 아름답게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숲 사이에 난 오솔길을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곧장 경계심을 세운 위지불이는 대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대화를 엿들었다.
“황상께서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 봐. 아침 일찍부터 검술을 연습하시네.”
“그러게 말이야. 오늘은 날 보고 웃어 주시기까지 했다니까.”
“그 위지불이란 자가 돌아와서 그러신가 봐.”
“황상께서 그자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그러니까 말이야. 편전에 두시고 함께 식사까지 하신다니.”
“그거 알아? 이건 너희만 알고 있어.”
말하는 이가 목소리를 낮췄지만, 위지불이는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황상께서 혼인하지 않으시고 후궁을 비워두시잖아. 왜 그러시는 건지 알아?”
“왜?”
다른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황상께서 여인을 좋아하지 않으신대.”
“뭐!?”
누군가 낮게 소리쳤다.
“해서, 위지불이라는 자를 좋아하신다는 거야? 얼굴이 허연 거 말고는 생긴 것도 그저 그렇던데.”
“어쩌면 그 하얀 피부가 마음에 드셨는지도 모르지.”
“그럼, 위지불이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 사내라고……?”
다들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함부로 얘기하지 마. 황상께서는 그저 시종이라고만 하셨으니까 속으로만 그런가 보다 하고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위지불이란 자에게도 예를 갖춰야 할 거야.”
“알았어. 이제 그만 가자. 총관리께 들키면 또 우리가 게으름을 피운다고 하실 거야.”
발소리가 멀어지자 위지불이는 대나무 뒤에서 나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원의 개가 남자를 좋아했다니! 그 정보는 그녀에게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설마 남원의 개가 공자를 연모하다 뒤늦게 증오심으로 바뀌어 공자를 독살한 것인가? 어차피 그가 가질 수 없으니 누구도 갖지 못하게 하려고? 화본話本(통속적인 소설)에도 이런 내용이 종종 등장했다. 궁녀들의 말대로라면 지금 남원의 개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뜻인데…….
위지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남원의 개는 그녀의 머리를 만졌고, 또 그다음에는 그녀의 발을 만졌다. 또 함께 밥을 먹고, 어젯밤엔 함께 자려고까지 했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했다.
그녀는 팔을 감싸 안았다. 갑작스레 몸이 덜덜 떨렸다. 남원의 개는 역시 변태야 변태…….
위지불이는 근심에 잠겼다. 만약 저 말이 다 사실이라면, 남제화의 추잡한 마음을 단념시키고 자신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게 아닐까?
대나무 숲을 헤쳐 햇빛이 따뜻하게 쏟아졌다. 그녀는 따사로운 햇살 속에 서서 한참 고민했다. 별안간 불빛이 뇌리를 스치더니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어떻게 남원의 개에게 독을 먹일지 생각해 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 금세 생각을 접었다. 그런 짓을 한다면 그녀의 명예와 순결은 산산이 부서져 버릴 터.
그때, 저 멀리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침을 차릴 때 내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숲을 빠져나왔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배부터 먼저 채우는 것이었다. 방법은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 남제화는 그녀를 보자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서 밥을 먹거라.”
남제화의 비밀을 알고 나니 그의 행동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다정한 그의 태도가 사실 나쁜 마음을 먹었기에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기분이 상한 그녀는 느릿느릿 걸어가 그와 가장 먼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남제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찌 그곳에 앉는 것이냐. 이쪽으로 가까이 앉거라.”
“괜찮아요. 여기가 좋아요.”
그녀는 두 눈을 낮게 내리깐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낯가죽은 참 괜찮은데, 어찌 취향은……. 위지불이가 거리를 두자 남제화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기이하게 생긴 음식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위지불이는 허리춤에 담긴 전갈자를 만지작거렸다. 엄지손가락 크기라 음식에 넣어 먹이긴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한담. 그녀는 아까 접어 두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 남원 개의 입에 정확히 독을 먹일 수 있을 텐데.
그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다. 죽음 중엔 태산보다 무거운 것도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것도 있는 법. 보잘것없는 목숨을 공자의 복수를 위해 바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남원의 개를 죽이는 걸로 공자의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부모님의 자랑을 넘어서 위지 가문의 자랑이 될 것이다. 부모님은 여생을 가문의 보살핌 속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겠지. 어쩌면 그녀의 위패가 사당에 놓이고 후손들이 그녀를 기려 줄지도 모를 일……. 그때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정신을 다 빼놓고. 어서 먹거라. 음식이 다 식겠구나.”
위지불이는 흠칫 놀라며 밥그릇을 들고 한 술 크게 떴다. 어쩌면 이생에서의 마지막 밥이 될지도 모르니 배불리 먹어야 했다. 기나긴 황천길을 떠나 염라대왕 앞까지 가야 하는데, 배가 고파서 도중에 여정을 멈추면 귀신이 될 것 아닌가.
* * *
한가한 황제인 남제화는 매일 조정에 나가지도 않았다. 장로들이 많으니 그가 걱정할 건 없었다. 그는 그저 서재에 머무르며 상부에 올라온 일을 보고 중요한 일은 직접 처리했다. 위지불이는 그를 따라 서재에 들어갔다. 그녀가 웬일로 그에게 물었다.
“제가 폐하께 먹을 갈아 드릴까요?”
그녀가 곁에 있고 싶어 하자 남제화는 자연스레 기분이 좋았다.
“이런, 이제 제법 시종답구나.”
위지불이는 먹을 벼루에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남제화는 의자에 앉더니 문서 뭉치를 책상에 펼쳤다. 그녀가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몰래 볼까 봐 걱정되지 않으세요?”
남제화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보면 더 좋지. 그럼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위지불이는 그가 하는 말을 모를 수 없었다. 남원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면 평생 수감되거나 죽음으로 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둘 다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먹을 갈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계획을 언제 시행해야 할까?
마침 궁녀가 차를 가져와 탁자에 놓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독이 무색무취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차에 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하필이면 이렇게 커다란 파란색 열매라니… 어디에 타든 전부 눈에 쉽게 띄었다.
한동안 문서를 들여다보던 남제화는 조금 피곤했는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가 위지불이에게 말했다.
“잠시 쉬어라, 너무 고생하지 말고.”
위지불이는 먹을 내려 놓고 옆으로 걸어갔다. 별안간 그녀가 소리를 지르더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렸다. 남제화가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
“어디 한번 보자.”
남제화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그녀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눈을 떠 보거라. 내가 좀 불어줄 테니.”
위지불이는 그저 그의 반응을 시험한 것뿐이었다. 역시나 그는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는 말에도 이렇게 조급해하다니.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맞췄다. 그리곤 억지로 이를 벌리고 독과를 그의 입에 넣었다. 혹여 그가 뱉어 낼까 봐 있는 힘껏 목구멍까지 밀어 넣었다.
남제화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별안간 부드럽고 따뜻한 게 그의 입안을 헤집더니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목구멍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 뒤로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가 당황하기도 전에 그는 위지불이의 어깨와 목 부근의 혈 자리를 짚었다. 안색이 급변한 남제화가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짐의 백소단百消丹을 가져오너라!
밖을 지키던 강암룡은 황제의 명을 듣자마자 곧장 백소단을 들고 달려왔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남제화의 품에 안긴 위지불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서둘러 위지불이의 입에 백소단 두 알을 밀어 넣었다.
“폐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남제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위지불이의 몸을 곧게 세웠다.
“붙잡고 있거라. 내력內力을 주입해야 약효가 빨리 나타날 것이다.”
강암룡이 그를 타일렀다.
“폐하의 옥체는 천금만큼이나 귀중하십니다. 어찌 한낱 시종을 위해…….”
“말이 많구나.”
남제화가 위지불이를 그에게 넘겼다.
“잘 붙잡고 있거라.”
강암룡은 어쩔 수 없이 위지불이를 붙잡았지만, 속으로는 정말 내키지 않았다. 폐하가 고생스럽게 내력을 써서 동월의 자객을 살린다 한들, 이자는 또다시 폐하를 죽이려 할 터. 한데도 이렇게 살리려 애를 쓰다니.
향 하나가 다 타들어 갔을 때쯤, 위지불이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책상다리를 한 채 바닥에 앉아 있다는 걸 자각했다. 여기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등 뒤에 맞닿아 있었다.
이제 막 의식을 찾은 터라 그녀는 아직 정신이 없었다. 이곳은 염라대왕의 궁전? 한데 어째서 남제화의 서재와 똑 닮았단 말인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화가 잔뜩 난 이자는… 강암룡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몸속에 진기真氣가 넘쳐흐르는 이 느낌은 대체 어찌 된 거지……?
그녀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자가 손을 거두었다. 이윽고 남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깼느냐. 좀 어떠하냐?”
위지불이는 반응이 조금 둔했다. 남원의 개가 그녀에게 기를 불어넣었단 말인가?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강암룡은 괴팍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구해 주셨는데 어서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뭐 하느냐?”
감사 인사? 같이 죽은 게 아니라? 위지불이가 멍하니 고개를 돌려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안 죽었군요…….”
그 말을 들은 강암룡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폐하를 저주하다니, 네 어찌 감히…….”
남제화가 낮게 호통쳤다.
“되었다.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흥분하지 말고 그만 나가거라. 이 애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