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7화
아까 광장에서 구슬픈 곡조를 들었을 땐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려는데 교량에 세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풍우교風雨橋’
그녀는 넋을 놓고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온갖 비바람을 거쳐 어렵사리 남제화 곁에서 시종이 되지 않았는가. 목숨만 부지한다면 그녀가 손을 쓸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어찌 이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공자의 복수를 하겠노라고 이미 맹세한 몸이었다. 이렇게 흐지부지 돌아가선 절대 안 되었다.
결국 그녀는 다리를 건넌 뒤,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그녀가 금패를 꺼내자 행인은 예를 갖춰 그녀를 황궁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행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가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근처 음식점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리곤 객잔을 구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비수를 허리에 꽂은 채 몰래 황궁에 잠입했다. 그리고 또 남제화의 침전으로 향한 것이다. 남제화는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불의의 습격을 가할 것이란 걸!
그녀는 인기척을 지우기 위해 포복 자세를 하고 움직였다. 손끝에 장막이 만져지자 그녀는 계속 엎드린 채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또다시 장막이 만져졌다. 무려 세 번의 장막을 거친 뒤에야 마침내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가 보였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침대가 너무 커서 손을 뻗는다 한들 그에게 가까이 닿을 수 없었다. 만약 지금 칼을 빼내어 습격을 가한다면 공격에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남제화는 엄청난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침대에 올라갔다. 겨우 한쪽 다리를 올리고 다른 쪽 다리를 올리려는데… 별안간 침대에 누워 있던 자가 물었다.
“돌아온 것이냐?”
위지불이는 자신이 기습을 당한 것처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있던 그녀는 놀란 나머지 침대 밑으로 철퍼덕, 하고 굴러떨어졌다. 남제화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서둘러 침대 맡에 놓인 등불에 불을 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것이냐?”
위지불이가 떨어지는 순간 침대 몸체가 벌어지면서 그 틈에 몸이 끼었다. 결국 두 다리는 하늘로 뻗치고, 몸은 침대 몸체에 끼인 채 멍하니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남제화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일으켰다.
“어째서 몰래 기어들어 오는 것이냐? 나랑 같이 자고 싶어서?”
위지불이는 수치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귀신이나 그딴 짓을 하려고 들겠지! 정말 눈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손에 비수를 들고 있었다. 보나 마나 암살을 하러 온 것이지! 남제화가 그녀 손에 있는 비수를 가져가 등불 아래에서 유심히 살폈다.
“오호, 칼을 새로 산 것이냐?”
“…….”
제발 존중 좀 해 주면 안 될까? 난 널 죽이러 왔다고, 죽이러, 죽이러!
“아니, 누가 준 거예요.”
“훌륭하구나.”
남제화가 활짝 웃었다.
“나가서 친구도 사귀고 칼도 선물 받고?”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이런, 나갔다가 오더니 성질이 더 괴팍해졌구나.”
남제화가 팔로 그녀를 툭 치며 물었다.
“누가 네 성미를 건드린 것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 내가 혼내 주마.”
위지불이는 어이가 없었다. 한밤중에 몰래 침궁에 들어왔고, 손에는 칼까지 들고 있는데. 누가 봐도 그녀가 무얼 하러 왔는지 뻔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저리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녀를 얼마나 무시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래 믿든 말든, 단칼에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남제화는 들고 있던 칼을 베개 밑에 내려 두었다.
“이 칼은 별로다. 싸구려 칼이야. 다음에 내가 좋은 거로 구해 주마.”
“…….”
정말 희한한 놈이었다. 오래 살긴 싫은 걸까?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는 걸 알면서도 좋은 칼을 구해 주겠다니, 그저 허풍을 떠는 것일 테지. 그녀는 그가 선물한 칼을 그의 심장에 꽂을 것이다.
“어디 말해 보거라. 오늘 나가서 무얼 하였느냐? 물건도 좀 샀고? 돈은 다 썼느냐?”
위지불이는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그녀가 자신을 암살하려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중요한 문제는 묻지 않고 왜 쓸데없는 이야기만 꺼내는 것일까. 이게 대체 어딜 봐서 황제란 말인가. 그녀는 그가 가짜 황제는 아닌지 정말 의심스러웠다.
“말 좀 해 보거라.”
남제화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온종일 무얼 하였느냐, 밥은 무얼 먹었고? 재미난 일은 없었느냐?”
위지불이는 언짢은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오밤중에 잠도 안 자고 무슨 수다를 떨어요. 졸리니까 그만 가서 잘래요.”
“하면 여기서 자거라.”
남제화가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더니 침대에 눕혔다.
“잠시 얘기 좀 나누다 보면 잠이 올 것 아니더냐.”
은은한 등불 아래, 위지불이의 얼굴은 가을철 홍시처럼 새빨개졌다. 이 개자식, 감히 함께 자려 하다니, 죽어 마땅한 놈! 그녀는 거칠게 그를 밀쳤다.
“다 큰 사내 둘이 한 침대에서 자다니, 체통도 없어요?”
남제화는 조금 의아했다.
“사내들끼리 한 침대에서 자는 게 뭐 어때서? 동월에서 강호를 누빌 땐, 객잔의 넓은 침상에서 수십 명이 함께 자기도 했다. 게다가 난 황제니까 날 모시고 함께 잠드는 걸 영광으로 여겨야지.”
위지불이가 냉소를 지었다.
“남원 사람들에겐 영광일지 몰라도 나한텐 수치인 것을. 내가 밤사이에 당신을 죽일까 봐 무섭지도 않나요?”
남제화는 조금 기이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날 죽일 수 있다면 좋겠구나.”
위지불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정말 날 죽일 수 있다면, 나도 기꺼이 네 손에 죽고 싶다. 황제도 할 만큼 했고 재미도 없으니까. 하지만 넌 날 죽일 수 없다. 나도 사람이니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이란 게 있거든. 우리 둘이 맞붙어 싸운다면 승부는 확연히 드러날 테지. 내 비록 생사에 무덤덤하긴 하지만, 네가 내 목을 베게 하진 않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이건 대놓고 그녀를 깔보고 무시하는 게 아닌가!
“큰소리칠 것 없이 어디 한번 공평하게 겨뤄 봐요.”
“이미 겨뤄 보지 않았느냐?”
남제화가 말했다.
“네가 이곳에 온 첫날 이미 겨루지 않았느냐.”
“그날은 잊어요.”
위지불이가 핑계를 댔다.
“그날은 조금 긴장해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했어요.”
“좋다.”
남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베개 밑에 두었던 비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날처럼 칼로 날 찌르거라. 누구의 손이 더 빠른지 보자꾸나.”
위지불이가 말했다.
“좋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칼을 뻗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 찌르지 못할 리가! 남제화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그녀의 팔꿈치 안쪽 급소를 쳤다. 위지불이는 엄청난 통증에 손에 힘이 풀렸고, 칼은 그대로 남제화의 손에 떨어졌다. 남제화는 비수를 집어 들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승복하겠느냐?”
“승복 못 해!”
“그렇다면 다시 하지.”
남제화가 칼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몇 차례 신중을 기해 손을 뻗었지만, 매번 남제화는 그녀의 급소를 찔렀고 칼은 그의 손에 들어갔다.
줄곧 똑같은 상황이 이어지자 시시했던 남제화는 그녀가 아예 자신의 가슴에 칼을 댈 수 있도록 했다. 위지불이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대범하게 나오시겠다? 정확하게 조준했으니 찌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또다시 남제화는 팔 안쪽을 공격했다. 칼은 남제화의 가슴 앞에서 떨어져 그의 손에 들어갔다.
위지불이는 조용히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갔다.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팔 전체에 마비가 온 듯 저릿해서 더 이상 무리했다간 팔을 아예 못 쓸 것만 같았다. 그래도 예비 자객인데… 정말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정말인지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다.
이렇게 즐거운 게 얼마만인지! 남제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위지불이는 어쨌든 돌아왔다. 비록 그를 계속해서 죽이기 위한 목적 때문일지라도.
그가 위지불이를 뒤쫓을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강암룡에게 말했던 그대로였다. 깊은 궁 안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데, 위지불이까지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라지.
해가 서쪽 산으로 넘어가던 순간, 그는 정말 위지불이가 떠난 줄만 알았다.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서글픈 감정이 차올랐다. 조금… 섭섭했다. 요즈음, 특히나 이렇게 깊은 궁 안에서는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위지불이가 돌아왔을 때, 그는 정말 기뻤다. 위지불이가 느릿느릿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녀석이 그를 암살하려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이지도 못할 터. 위지불이가 이곳에 남아 있어 주기만 한다면 무얼 하든 좋았다. 위지불이와 이 적막한 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으니까.
* * *
위지불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한바탕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다 금방 곯아떨어졌다. 매번 깜짝 놀라거나 공격을 당했을 때면 그녀는 유독 빨리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위지불이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침대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잠을 푹 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어젯밤 일을 잊은 건 아니었다. 위지불이는 절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그녀는 또다시 남제화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분명 인기척을 없애고 들어갔건만… 남원의 개자식은 어째서 눈치를 챈 것일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울적한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그녀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괜찮다, 전갈자가 두 알이나 있으니 아직 기회는 더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독을 또 어찌 타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근심에 잠겼다.
남제화 그 개자식은 눈치도 보통이 아니고 후각과 미각도 뛰어났다. 그간 그녀가 독을 탈 때마다 계속 알아차렸으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만전을 기해야 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남제화는 어딜 간 것인지 주전主殿에 없었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공기는 정말 신선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그녀는 잠시 산책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