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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65)화 (764/1,192)

제765화

그녀는 동월에서도 물건을 사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매달 은자를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쓰기도 전에 어머니가 바로 가져갔다. 그녀의 혼수를 위해 미리 모아 두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이유로 어쩌다 시장 구경을 하러 나가도 달콤한 군밤 한 봉지 못 사고 냄새만 맡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녀는 돈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허리에 찼다. 어쨌든 돈까지 받았으니 성의 표시는 해야 할 터. 그녀가 남제화에게 물었다.

“뭐라도 좀 사다 줄까요?”

남제화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짐은 황제다. 짐이 필요한 것은 이미 넘치도록 있지. 네 호의는 고맙구나.”

아침밥을 먹은 뒤, 위지불이는 곧장 출궁할 채비를 했다. 남제화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복도 끝까지 따라 나섰다. 그는 벽 쪽에 놓인 신발 한 켤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발을 신거라. 바깥은 궁과 달라서 발에 상처가 많이 생길 것이다.”

사실 자신의 발을 남원의 수많은 사내들에게 보여 줄 생각에 위지불이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신발까지 챙겼겠다,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고마워요.”

남제화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늘 자신을 암살할 생각만 하던 녀석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래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놈이었다.

“바깥에서는 신발을 신어도 되지만, 다른 이의 집에 가게 된다면 꼭 벗어야 한다. 그게 남원의 예절이지. 기억하거라.”

“꼭 기억할게요.”

위지불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맨발에 신발을 신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안 신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남제화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히 궁문을 나섰다.

나름대로 예비 자객이었던 그녀는 누군가 제 뒤를 쫓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 그가 그녀에게 사람을 붙였을 거라 생각했건만… 궁문을 나선 뒤에도 그녀를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궁 밖 나무 아래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남제화가 그녀에게 아무도 붙이지 않은 것인가? 자유롭게 바깥 구경을 할 수 있게 해 준 거라고?

남원의 도성은 타곤성打昆城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타곤성은 임안성과는 확연히 다른 곳이었다.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된 대저택과 곧게 뻗은 거리가 있는 임안성은 장엄한 도성의 느낌을 주었다. 타곤성도 임안성처럼 많은 인파로 떠들썩하긴 했지만 저택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거리도 협소했다. 나무 집 사이사이로 수많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서로 이어져 있었다.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사람을 붙일까 봐 일부러 골목을 돌고 돌았다.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췄을 땐,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 뒤를 따르던 자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를 따돌리다가 그만 길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남제화가 준 금패가 있으니 돌아갈 땐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임무가 있었다. 독약을 찾는 것. 그런데 여기서 독약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가게에 찾아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 주인장, 독약 있소?’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그리 묻고 다닌다면 의심 받을 건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놓인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처 없이 타곤성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구경을 하다 보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타곤성에는 연지와 분첩, 향을 파는 가게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동월에서 남원의 향을 가장 으뜸으로 친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관료 집안과 귀족 아가씨들은 사기 상점에서 들여온 남원의 고급 물건을 사느라 분주했다. 물론 그녀는 주머니 사정이 워낙 처참했기에 살 수 없었지만.

대신 큰어머니께서 남원의 향을 쓰셨는데, 어느 날 다 써 가는 남원의 향을 위지불이에게 준 적이 있었다. 병 밑바닥에 손톱만큼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아껴 사용한 것도 모자라 아까워서 병도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다 쓴 병을 귀중하게 보관했고, 이따금 꺼내어 향을 맡았다. 이미 다 쓴 뒤였지만 병에서는 여전히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던 향들이 타곤성엔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게다가 사고 싶은 걸 사라며 돈도 받았지 않은가! 훗날 동월로 돌아갈 때 남원의 향을 가져간다면… 그녀도 남원의 향을 쓰는 고급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가게를 둘러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게 주인이 향을 손등에 떨어뜨려 가볍게 문질러 주자 금세 은은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손등의 향을 맡더니 호탕하게 말했다.

“향이 아주 좋네요. 이걸로 주세요. 다른 것도 더 있어요?”

“그럼요.”

주인은 그녀가 외지인이라는 걸 알고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남원의 향이 가장 유명하지 않습니까. 원하시는 건 뭐든 다 있지요.”

하나하나 향을 맡아 본 위지불이는 마음에 드는 걸 골라 한쪽으로 빼 두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향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많다니.”

가게 주인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손님은 상대에 계신 분이시지요? 이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마차 가득 담기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지요.”

위지불이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어려웠기에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위지불이는 향이 전부 다 마음에 들어 이 중에서 무얼 빼야 좋을지 몰랐다. 사실 다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할까 봐 조금 걱정이었다. 그녀는 아예 돈주머니를 열어서 가게 주인에게 보여 주고는 솔직히 말했다.

“돈이 이거밖에 없으니 한번 봐 주세요. 이걸로 살 수 있는 만큼만 살게요.”

가게 주인이 고개를 숙여 주머니 안을 힐끔 살피더니, 곧장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이고, 손님. 이 돈이면 상대 마차를 가득 채울 수도 있습니다.”

위지불이는 깜짝 놀랐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다니. 그녀가 주머니 안에서 동전 한 개를 꺼냈다.

“이걸로 얼마나 살 수 있는데요?”

가게주인이 따로 골라놓은 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들을 다 사실 수 있습니다. 몇 병 더 고르신다면 제가 잔돈을 거슬러 드릴 필요도 없고요.”

위지불이가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동전 하나로 이 많은 향을 살 수 있다니. 남원의 개는 그녀에게 제법 후한 편이었다. 그녀는 몇 병을 더 고른 뒤, 동전 하나로 값을 치렀다. 가게 주인은 호탕하게 값을 치른 위지불이에게 날염한 남색 자루에 향을 담아갈 수 있도록 정성스레 넣어 주었다.

위지불이는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신이 나서 가게 문을 나섰다. 그녀가 가진 향이 큰어머니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큰어머니는 그녀에게 다 써 가는 향을 주었지만, 그녀는 새것으로 두 병도 드릴 생각이었다. 자신은 통이 아주 큰 사람이니까.

돈의 가치를 알고 나니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우고 더 당당히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거리를 구경하며 물건을 사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어깨엔 자루가 두 포대나 더 들려 있었다. 맛 좋은 말린 과일과 은으로 만든 빗, 코끼리 목상, 상아로 만든 여의, 정교한 장식품, 공작 깃털로 만든 머리 장신구……. 전부 다 동월에는 없는 것들이라 돌아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먼 길을 오기까지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온 보람이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녀는 점심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타곤성에는 음식점이 수도 없이 많았다. 으리으리한 규모의 가게도 많이 있었지만, 작은 음식점이 대부분이었다. 가게 안에는 탁자와 의자 몇 개가 전부라서 손님이 몇 명만 들어서도 자리가 거의 꽉 찼다.

위지불이는 길을 걷다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한적한 음식점을 발견했다. 비좁은 곳을 싫어하는 그녀는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은 나이 든 노부부였다. 남편은 등이 심하게 굽은 탓에 고개를 들고 손님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겨우 그녀를 발견한 그는 헤벌쭉 웃으며 까만 이를 드러냈다. 부인은 통이 넓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짧은 소매 밖으로 팔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칼로 깎은 듯 광대뼈도 툭 튀어나와 있어 무시무시한 인상이었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이곳에 왜 손님이 하나도 없는지 깨달았다. 가게 주인의 모습을 보고 아무도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도 순간 뜨끔했지만 이제 와서 나갈 수도 없었기에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가게의 남자 주인은 그녀에게 제법 친절하게 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만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반면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여주인은 어느새 그녀 옆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위지불이가 남원 사람이 아닌 것 같자 시시콜콜 음식을 먹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탁자에 차려진 음식은 보기에는 딱히 특별할 것 없었지만, 일단 맛은 아주 좋았다. 위지불이는 웃으며 부인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아주 맛있다는 의미였다. 부인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으니 얼굴에 온통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겼다. 얼굴 가득 생겨난 기다란 실선이 어쩐지 조금 무서웠다.

밥을 다 먹자 주인이 차를 내어 왔다. 찻잔 안에는 뭔지 모를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깨끗한 걸 좋아하는 위지불이는 차마 찻잔을 입에 가져가지 못했다. 하지만 여주인이 기대에 찬 눈으로 위지불이를 바라보고 있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들이켰다.

잉? 이렇게 맛있는 차였다니. 그녀는 연이어 두 모금을 들이켰고 다시 한번 부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부인은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각종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자주색 등 각종 화려한 과일을 먹기 좋은 조각으로 잘라 쟁반에 내어 왔다. 여기에 대나무 꼬치까지 챙겨 주었다.

밥과 차만큼 과일도 맛이 좋았다. 위지불이는 여유롭게 과일을 먹으며 부인에게 독약과 관련된 정보를 물었다.

“아주머니, 듣자니 남원에는 기이한 식물이 많다면서요. 독도 많다던데… 어떤 식물에 독이 있는지 좀 알려주시겠어요? 잘못하다 독이 든 걸 먹어서 고생하면 안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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