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4화
“감시라고까진 할 수 없지.”
남제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짐의 황궁이다. 그저 수하들이 습관적으로 모든 일을 짐에게 보고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날 일부러 가지고 논 거예요?”
위지불이가 이를 꽉 깨물었다.
“음험하고 비열한 소인배!”
“어딜 감히!”
강암룡이 매섭게 호통쳤다.
“폐하께 그따위 더러운 말을 하다니!! 여봐라!”
그의 말에 단도를 찬 시위들이 곧장 앞으로 달려왔다. 시위들의 불끈거리는 팔 위에는 남빛의 문신이 있었다. 덕분에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위지불이는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시위의 문신은 조금 무서웠다. 절로 목이 움츠러든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남제화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물러들 가거라. 괜히 겁주지 말고.”
강암룡이 말했다.
“폐하, 너무 무례한 자가 아닙니까. 마땅히 혼을 내야 합니다.”
“괜찮다.”
남제화가 말했다.
“알랑거리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 질렸다. 이렇게 한 번씩 욕을 들으니 제법 새롭구나. 짐을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하고.”
“…….”
강암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폐하가 저리 대놓고 위지불이의 역성을 드는데…….
“난 널 가지고 논 적 없다.”
남제화가 여전히 겁에 질린 위지불이를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네가 그 꽃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특별히 요리를 해 오라고 분부한 것이다. 독이 있는 꽃이긴 해도 불에 익혀 표면의 기름을 제거하면 독이 사라지지. 오히려 몸에 좋은 성분이 많다.
부은 손은 걱정 말거라. 잠시 뒤면 알아서 가라앉을 테니. 남원에는 기이한 식물이 아주 많지. 화려한 색을 가질수록 위험한 경우가 많다. 앞으로는 필요한 게 있거든 짐에게 말해 다오.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고.”
위지불이는 입술을 들썩이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제화의 말을 듣고 나니 궁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으로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돌려 말하면 익혀 먹을 땐 독이 없다는 뜻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땐 너무 흥분한 상태라 ‘생으로’라는 말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짠 독즙은 ‘생’이 아니던가? 어찌 즙을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설마 술과 섞으면 독소가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한번 맛보거라.”
남제화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권했다.
“정말 맛있대도.”
위지불이는 꽃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통통한 꽃송이는 적당히 단맛이 나면서 쫀득한 게 정말 맛있었다!
“짐은 널 속이지 않는다. 아주 맛있지 않느냐.”
남제화가 말했다.
“남원에서는 먹을 수 있는 꽃이 아주 많다. 앞으로 조금씩 남원의 꽃을 전부 맛봐 보자.”
위지불이는 꽃이나 맛볼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꽃을 맛보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누군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남원의 개에게 전부 다 보고하다니……. 더는 궁 안에서 그를 독살할 만한 걸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궁 밖에 나갈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궁 밖에 좀 나갔다 와도 돼요?”
“그건…….”
남제화가 잠시 망설였다.
“도망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위지불이는 냉소를 짓더니 남제화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살기가 가득하다고 생각했지만, 남제화의 눈에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는 위지불이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죽이기 전엔, 아무 데도 안 가.”
남제화는 웃음을 한번 터뜨리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래, 배짱 한번 두둑한 게 마음에 드는구나.”
그는 잠시 망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너와 함께 궁에 나갈 사람을 붙여 주겠다. 궁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뇨. 길은 이미 잘 알아요.”
위지불이는 또 남제화의 귓가에 낮게 읊조렸다.
“길도 몰랐다면, 어떻게 궁에 들어와 암살 시도를 했을까?”
남제화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좋다. 혼자 출궁하거라. 해가 지기 전엔 꼭 돌아와야 한다.”
강암룡이 아연실색했다.
“폐하, 호랑이를 산에 풀어 주다니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저자는…….”
남제화가 손을 들어 올렸다.
“긴말할 것 없다. 방금 말한 대로 하거라.”
밥을 다 먹은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해가 진 지 꽤 됐건만 어째서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거란 말인가? 위지불이는 정말 의아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으로 걸어갔다. 덕분에 남제화는 그녀의 발에 생긴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발이 온통 빨개져 있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발에도 밀지화가 닿은 것이냐? 어찌 그리 부은 것이냐?”
사내가 자신의 발을 보는 게 여전히 어색했던 위지불이는 곧장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발을 감추고 싶어서였다.
남제화는 그녀 맞은편에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그가 뻗은 손에 몸이 밀쳐진 그녀는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그가 그녀의 발을 받쳐 들고 유심히 살폈다.
“풀에 긁힌 것이냐?”
동월 사람들은 신발을 신는다는 걸 잠시 깜빡한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땅을 디디는 발도 이리 여리고 약해서야. 위지불이는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얼굴을 붉혔다. 남원의 개가 또 그녀의 발을 만지다니!
“피부만 긁힌 것이니 금방 나아질 것이다.”
남제화가 고개를 올리자 터질 듯 붉어진 위지불이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기이한 표정이 꼭 측간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을 때의 표정과 유사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이곳이 처음이라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암룡아, 연고를 가져와 발라 주거라.”
위지불이는 그녀의 발에 연고를 발라 주라는 말에 버럭 호통을 쳤다. 또 다른 사내가 그녀의 발을 만져야 한다니, 어찌 그런 모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필요 없어요!”
남제화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
“약을 바르기 싫다는 것이냐? 암룡이 약을 발라 주는 게 싫다는 것이냐? 짐이 직접 발라 주면 괜찮겠느냐?”
위지불이는 그의 손에서 발을 힘껏 빼냈다. 그러자 불안했던 마음이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 동월의 건아들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이리 작은 상처가 뭐 그리 대수라고!”
그녀는 잽싸게 일어나 남제화와 거리를 벌렸다.
조금 전 그가 그녀를 밀쳤을 땐, 하마터면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거기다 그녀의 다리를 유심히 바라볼 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정말 궁금했다. 황제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아니던가. 한데 남원의 황제라는 자는 걸핏하면 다른 사람의 발을 만진단 말인가? 설마 남원의 개는 원래 취향이 이런 쪽……? 남원의 개가 그녀를 사내로 알고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그가 정말 그녀에게 몹쓸 마음을 먹은 건 아닌지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 * *
이튿날 아침 위지불이는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햇살은 이미 머리 위를 밝게 내리쬐고 있었다. 궁을 조용히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남제화가 그녀의 출궁을 허락하긴 했지만, 분명 그녀의 뒤를 밟을 사람을 붙일 터. 누군가 그녀를 따라다닌다면 편히 다닐 수 없었다. 그녀는 옷을 입으며 투덜거렸다.
“남원은 정말 이상한 곳이라니까. 아침엔 날이 이렇게 빨리 밝고, 저녁엔 좀처럼 어두워질 줄도 모르고. 늦잠도 못 자고, 잠도 일찍 들 수 없잖아.”
세안을 하고 복도로 나오니 남제화가 공작새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손 안 가득 옥수수알을 쥐고 한 알 한 알 공작새에게 던져 주었다. 복도 밑에 있던 공작들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떨어지는 낱알들을 하나하나 받아먹었다. 위지불이가 한참 동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꼭 그렇게 한 알씩 줘야 돼요? 쩨쩨하게.”
남제화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면 어찌 줘야 한단 말이냐?”
위지불이가 손을 뻗었다.
“이리 줘 봐요.”
남제화는 옥수수알을 그녀의 손에 덜어 주었다. 위지불이는 손에 쥔 옥수수알을 전부 다 바닥에 흩뿌렸다.
“이렇게 주면 되잖아요?”
옥수수알이 한 번에 떨어지자 공작들은 날개를 펴고 서로 먹이를 먹겠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공작들은 가느다란 깃털을 날리며 서로를 쪼아 댔다.
위지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작은 온순한 동물이 아니던가? 이렇게 흉악한 면도 있다니. 남제화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이 싸우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이로구나.”
“…먹이를 조금 더 많이 주려던 것뿐인데…….”
남제화가 뒷짐을 진 채 공작을 바라보았다.
“먹이를 많이 주면 더 탐욕스러워지지. 반면 한 알 한 알 던져 주면, 공작은 순서대로 받아 먹는다. 누가 더 많이 먹지도, 적게 먹지도 않고 아주 공평하지. 이렇게 한꺼번에 던져 주면 다들 더 많이 먹으려고 경쟁이 생기지 않겠느냐?
경쟁이 생기면 결국엔 싸움이 벌어지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는 그게 전쟁이 되는 것이다. 수만 명과 수만 명이 전쟁을 벌이면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시체가 온 들판을 메우지. 이긴 자는 왕이, 패배자는 역적이 된다. 예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 왔고…….”
뒤로 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거의 혼자 탄식하는 수준이었다.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처음으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말을 마친 남제화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간에 옅은 주름이 진 그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또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뒤, 그가 시선을 거두더니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밖을 나가 볼 생각이냐?”
“네, 구경 좀 해 보려고요.”
남제화가 허리춤의 금패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거라. 만약 궁에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겠거든 이 금패를 보여 주며 길을 물어보거라. 널 궁에 데려다줄 것이다.”
위지불이는 금패를 받아 들고 힐끗 살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네모난 모양의 패였다. 금패에는 불꽃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괜히 능청은, 사람을 붙여 내 뒤를 밟을 거면서.’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금패를 허리춤에 달았다. 남제화는 또 그녀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남원의 화폐가 들어 있으니 이걸로 사고 싶은 걸 사거라.”
위지불이는 조금 의외였다. 돈까지 쥐여 주며 그녀의 출궁을 돕다니. 그녀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아무리 남원의 개라도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게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