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2화
동월의 황궁을 가 본 적은 없지만, 저택 식구들 말로는 궁중 가무의 규모가 아주 크고 연주에 사용되는 관현악기도 육중한 크기라고 했다. 황제가 연회를 베푸는 연회장에도 군중 가무에 쓰이는 전용 악기가 놓여 있는데, 얼마나 큰지 여러 사람이 함께 연주해도 될 정도라고 했다.
또 무희들이 춤을 출 때 입는 옷의 소매 끝에는 천을 덧대 놓았는데, 그것이 휘날리면 그 길이가 족히 삼 장은 되기에 공연 장소가 아주 넓어야 했다. 하지만 남원은 나무 밑에서 무희 몇 명과 악공 몇 명이 드문드문 모여서 공연을 한다니, 정말 너무 없어 보였다.
위지불이는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진 않았다. 사실 곡조도 흥겹고 가무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자태가 빼어난 무희들은 동작도 어찌나 날렵한지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마 뒤,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위지불이는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강암룡이 서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밖으로 나와 함께 가무를 감상하자고 하신다.”
위지불이는 조금 민망했다.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남원의 개가 기어코 알아차리다니. 뭐, 가서 보면 그만이지. 겁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결국 다시 나무 아래로 돌아갔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날 독살하지 못해 잠이 오지 않는 것이냐?”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내가 독을 탔다는 증거도 없는데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 당신 수하가 들으면 날 붙잡아 갈 테니까.”
“걱정 말거라.”
남제화가 등을 기댄 채 눈썹을 비틀며 웃었다.
“내가 덮어 줄 테니.”
그의 모습은 꼭 도적굴의 두목처럼 사악하고 방자해 보였다. 위지불이는 남원의 백성들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자가 이 나라의 황제라니… 이 얼마나 재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남제화가 과일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우리 남원의 과일이다. 어서 먹어 보거라. 동월에서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위지불이는 과일을 받지 않고 오만한 말투로 받아쳤다.
“그깟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안 먹어요.”
“정말 맛있다니까. 하나만 먹어 보라니까.”
그는 친절히 손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과일을 가져갔다. 한껏 기대감에 부푼 얼굴을 보자 더 거절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웃음을 터뜨린 위지불이는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럼 하나 먹어 주죠. 대신 왜 용계수를 먹고도 죽지 않는 것인지 말해 줘야 해요.”
남제화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손님을 위해 과일을 접대한 것인데 도리어 조건을 내걸다니. 자신과 거래를 한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어찌 저런 생각을……. 그의 견문이 다 넓어지는 발상이었다.
그는 잠시 웃음이 서린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또 금세 눈꺼풀을 드리웠다. 어쩐지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녀도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무리 일국의 황제라도 뭐든 제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이라 해도 그녀는 먹지 않을 것이니까. 어디 어떻게 나오나 지켜봐야지. 그녀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다른 무엇이 두려울까.
“좋아. 알려 주지.”
남제화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위지불이는 곧장 몸을 앞으로 숙였다. 드디어…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얻을 수 없는 비밀을 듣게 되다니!
“왜냐면.”
그는 어딘지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월의 독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없거든. 오직 남원의 독만 효력이 있지.”
위지불이는 깜짝 놀랐다. 어느 나라 독인지가 중요하단 말인가? 하면 그녀는 동월 사람이니, 남원의 독은 그녀에게 아무런 효험도 없단 말인가?
“정말요?”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치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고말고.”
그가 가볍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귓가에 그의 호흡이 닿자 꼭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남제화는 그녀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지는 걸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귀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툭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위지불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밖의 이유는 찾을 수 없었기에 일단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먹어 보거라.”
남제화는 과일을 그녀의 입에 갖다 대 주었다. 위지불이는 입을 벌려 과일을 입에 넣었다. 그러다 그의 손가락에 입술이 살짝 닿고 말았다. 그녀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번개를 맞은 듯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으로 불쑥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어찌나 충격이 거센지 과일이 무슨 맛인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남제화도 얼굴에 미세하게 붉은 기운이 흘렀다. 아무래도 무언갈 잘못 먹은 것 같았다. 굳이 제 손으로 직접 과일을 먹여 주다니. 황제의 신분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남자였다. 남자가 남자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건 정말인지… 좀 이상했다.
너무 오랜 시간 적막하게 지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잠시 과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별일도 아니었다. 나이가 어린 동생을 챙겨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 아니던가.
그는 제왕임과 동시에 감정을 가진 한 사람이었다. 그의 곁엔 여동생도 없고 모친과도 날을 세우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마음을 기댈 곳이 없으니 저도 모르게 불이에게 잘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강암룡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황제와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그간 후궁을 텅 비워 둔 이유가… 설마 사내를 좋아하셔서…….
위지불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직접 과일을 집어 먹었다.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자 얇은 껍질 너머로 과즙이 줄줄 흘러나왔다. 무슨 과일인지는 몰라도 정말 맛이 끝내줬다.
과일을 다 먹은 그녀는 또다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남원의 개를 따라 편하게 등을 기대앉은 그녀는 여유롭게 가무를 감상했다. 맛있는 과일까지 먹으며 한껏 여유를 부리니 정말 편안했다.
생각해 보면 참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어제는 여제를 죽이려 온 자객이었는데 오늘은 여제의 손님이 되어 함께 밥을 먹고 가무를 감상하고 있다니. 물론 겉으론 그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제 임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남원의 개를 죽이고 공자의 원한을 갚는 임무.
그녀는 과일을 다 먹어 치운 뒤에야 남원의 개가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강암룡은 피풍을 가져와 조심스레 그의 몸에 덮어 주었다.
무희들은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악공들은 돌아가면서 연주를 이었다. 방금과 달리 소리가 크지 않았고 곡조도 흥겨운 가락에서 차분한 가락으로 바뀌었다. 연주를 계속 듣고 있던 그녀도 졸음이 쏟아졌다. 수면을 유도하는 노래인 것 같았다.
배불리 먹은 데다 편안히 누워 있으니 위지불이도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느릿느릿 그녀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느새 쿨쿨 잠이 들었다.
* * *
잠에서 깨어나니 무성한 나뭇잎이 눈에 들어왔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 자고 일어났을 때 눈앞에 침대 장막이 아닌 나뭇잎이 있던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만약 바깥에서 잔 걸 그녀의 어머니가 알았다면 그녀를 때려죽이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리수나무는 아주 컸다. 가지는 서로 얽혀 있고, 수많은 수염뿌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가지에는 붉은색 끈이 묶여 있었다. 위지불이는 끈을 묶어 복을 비는 것으로 추측했다. 동월의 여러 사찰에서도 나무에 끈을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찰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 남원의 황궁에는 어느 나무에든 저렇게 끈이 묶여 있었다. 보아하니 기도도 제멋대로 하는 나라인 듯했다. 복을 빌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저렇게 아무 나무에나 성의 없이 끈을 묶어두는 것일 테지.
그녀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다. 남원의 개가 이곳에서 잠이 들었고… 그녀도 남원의 개를 따라 함께 잠이 들지 않았던가.
서글픈 생각에 그녀는 조금 우울했다. 더는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남원의 독약을 찾아서 남원의 개를 독살해야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융단에 섰다. 수가 놓인 융단은 궁전 내부의 나무 계단에도 깔려 있었다.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궁전을 바라보다 저 멀리 시선을 옮겼다. 사실 남제화가 묵는 궁전 외의 다른 곳은 가 본 적 없었다. 이곳 지도도 머릿속에 새겨져 있겠다… 다른 곳에 가면 독약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융단에서 내려와 부드러운 풀을 밟았다. 부드러운 풀이라고 해도 여린 살에 직접 닿으니 조금 따가웠다. 몇 발짝 내딛자 발바닥은 물론 발등까지 빨간 자국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가 짊어진 임무에 비하면 이까짓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고개를 치켜세운 위지불이는 굳건한 얼굴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걷다 보니 적응이 된 것인지 발바닥도 크게 아프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길가에 공작새가 보였다.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당당히 활보하는 게 매우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반면 공작새를 보고 있는 그녀는 시골 촌뜨기 계집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공작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화첩에서 본 적은 있었기 때문에 예쁜 꽁지를 보자마자 곧장 공작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작은 삼삼오오 모여 풀밭을 거닐거나, 나무 위에 웅크려 앉아 있거나, 꽁지를 활짝 펴기도 하고, 다른 공작의 귓가에 머리를 가져다 대기도 했다. 마치 자신들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듯, 지나가는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위지불이는 공작을 한참 동안 바라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저렇게 큰 새가 그녀를 쪼아댄다면 몹시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니 비탈에 가득 피어 있는 진귀한 꽃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색과 기이한 모양에 자신도 모르게 꽃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 궁녀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물통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 올리더니 있는 힘껏 물을 뿌렸다. 물방울이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오색 빛깔이 반짝거리는 게 꼭 보석처럼 눈부셨다.
위지불이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정말 기이하게 생긴 꽃이었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잎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붉은색 꽃잎 사이에 노란 꽃술이 자라났는데 꼭 손바닥 같았다. 덕분에 아래쪽의 푸른 잎사귀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밝은 햇살을 받자 새빨간 꽃잎이 살짝 기름을 바른 듯 반짝였다. 그녀는 호기심에 손을 뻗었다. 물을 주던 궁녀가 곧장 그녀를 말렸다.
“만지지 마세요. 독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