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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60)화 (759/1,192)

제760화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장막을 걷고 창밖을 바라보니 지금껏 본 적 없는 파란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파아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청명한 날씨에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황제보다 늦게 일어나는 시종이 어디 있단 말이냐? 벌로 형장 스무 대는 내려야 하겠구나.”

위지불이는 꾸물대며 일어나 제 얼굴을 힘껏 문질렀다. 아직 적진에 있으니 늘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남제화는 그런 녀석의 모습이 퍽 우스워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서 가서 씻거라. 아침을 먹어야 하니까.”

말을 마친 그가 손뼉을 쳤다. 손뼉 소리에 한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종은 머리에 청색 수건을 싸매고 반소매에 긴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신발은 신고 있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위지불이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건 정말 보기 흉측한 옷이었다. 남제화가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떤 곳에 가든지 그곳의 법을 따르는 법. 어서 갈아입거라. 남원에서는 남원의 옷을 입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 취급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불이는 옷을 받아 펼쳤다. 애석하게도 시종이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이었다.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맞아 죽어도 이런 기이한 옷은 입고 싶지 않았다. 남제화가 재촉했다.

“어서 갈아입으래도.”

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는데 나더러 옷을 갈아입으라고?”

시종이 호통쳤다.

“어딜 감히, 폐하께 예를 갖추거라!”

하지만 남제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위지 가문의 자객이 자신을 ‘당신’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으로 예의를 갖춘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갖추지 않았다면 ‘남원의 개’라고 불렀을 터. 남제화가 손을 내저으며 시종에게 그리 호통칠 것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위지불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 사내들뿐인데 무엇이 겁난단 말이냐.”

불이가 얼굴을 굳히자 그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안 보마. 짐은 이만 나가 보겠다.”

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남제화가 시종에게 이야기했다.

“어찌 입는지 모를 테니 넌 남아서 도와주거라.”

“필요 없으니까 다 나가!”

불이는 성을 내며 목청을 높였다. 남제화는 서둘러 시종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시종은 강암룡康岩龍이라는 자였다. 그는 일반적인 시종이 아니라 남제화를 모시는 총관이었다. 이제껏 황제의 옆에 있으며 이렇게 거드름을 피우는 자는 처음이었다. 분명 자객이 아니던가. 황상은 어찌 그런 자에게 저리 좋은 대우를 해 준단 말인가. 질투가 다 날 정도였다.

“폐하, 일개 자객에게 그리 포용을 베푸시다니요. 우리 남원 사람들을 만만하게 여길 것입니다.”

남제화가 코웃음을 쳤다.

“남원은 정식 군대도 없으니 애당초 만만한 나라가 아니더냐. 이미 동월의 무시를 받기도 했고.”

“…….”

사실이긴 해도 자멸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이곳은 남원의 영토였다.

“폐하, 정말 저 자객을 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폐하, 저자가 또다시 암살 시도를 할까 봐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저자는 당연히 다시 시도할 것이다. 짐은 그러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지.”

강암룡은 괴물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

사는 게 질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남제화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너무 지루한 일상이 아니더냐. 설마 즐거운 일을 찾는 것도 안 될까. 기억하거라. 불이가 무얼 하든, 넌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지켜만 보거라. 저 애의 앞길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

강암룡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황상은 겉으로 보기엔 게으르고 태만한 것 같지만 경계해야 할 사람은 절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하지 않았다면 여제는 이미 손쉽게 목적을 달성했을 테고, 두 모자간의 싸움도 이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 * *

위지불이는 옷을 바라보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정말 이 옷을 입어야 한단 말인가? 남원 개의 옷을 입다니? 하지만 입지 않자니 이민족이라고 생각해 차별할 테고, 그녀가 동월에서 온 자객이라는 것도 금세 탄로 날 게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다들 그녀를 경계할 테니 손을 쓰고 싶어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 그냥 입자. 공자가 남원으로 도망쳤을 때도 남원의 옷을 입지 않았던가. 그녀도 공자처럼 본래의 마음만 잃지 않으면 되지. 옷이 뭐 별거라고? 그저 남들의 이목을 가리는 용도일 뿐이다.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녀는 장막을 내렸다. 그리곤 침대 위에서 몸을 수그린 채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동월에 옷에 비해서 남원의 옷은 무척 간소했다. 헐렁한 상의에 짧은 소매 밑으로 가느다란 두 팔이 다 드러나 보였다. 동월에서는 여인들이 남들에게 팔을 보여 주어선 안 되었기에 늘 넉넉한 소매 안에 숨겨야 했다.

남원 사람들은 정말 이상했다. 이렇게 대놓고 팔을 드러내면 민망하지도 않단 말인가? 그녀는 소매를 힘껏 잡아당기며 새하얀 팔을 가리려 애썼다. 됐다, 됐어. 다른 나라에 왔으면 그 나라의 법을 따라야지.

그녀는 더는 팔뚝에 신경 쓰지 않고 서둘러 바지를 입었다. 긴 바지이긴 해도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게다가 마땅히 신을 양말이나 신발조차 없었다. 그녀는 아까 시종이 맨발로 들어왔던 모습을 떠올렸다.

맨발로 걸으라니… 차라리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나았다. 동월에서는 남에게 발을 보이면 순결을 더럽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신발을 신고 헝클어진 머리로 방을 나섰다. 바깥에 서 있던 남제화는 그녀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리 앉아 보거라. 암룡에게 머릿수건을 씌워 달라고 해야겠구나.”

위지불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여인인 그녀가 어찌 사내에게 머리를 맡긴단 말인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녀가 싫다고 난리를 치자 강암룡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괴팍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당초 우리 남원 사람이 아니니 머릿수건을 써 봤자 이도 저도 아니고 사불상四不象일 테지.”

불이가 물었다.

“사불상이 뭔데?”

남제화가 웃으며 답했다.

“짐승이다. 다음에 보여 주마.”

불이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희한한 이름을 가진 짐승이라니? 정말 기괴한 나라였다. 남제화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불이는 그가 자기 머리에 손을 올리려 하자 순간 닭살이 돋았다.

“내 머리…….”

남제화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색 수건을 둘둘 말아 감싸 주었다. 그의 손을 멈췄을 때 위지불이도 하려던 말을 끝마쳤다.

“…만지지 마…….”

남제화가 손을 떼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 됐다.”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대로 괜찮구나.”

그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더니 그녀의 발에 멈춰 섰다. 그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궁에서는 신발을 신어선 안 된다.”

위지불이는 그의 발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맨발이었다. 나라가 얼마나 가난하면 황제도 신발을 신지 않다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내 앞에서 맨발을 보이는 건 그녀에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제화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발을 들고 재빨리 신발을 벗겼다. 불이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새하얀 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한 문장만 반복해 생각했다.

‘이자가 내 발을 만졌어. 이자가 내 발을 만졌어…….’

동월에서 사내가 여인의 발을 만졌다면 그 여인은 사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동월 사람인 위지불이는 서글픈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이 남씨 황제에게 시집을 가야 할까……. 아니, 그녀가 어찌 공자를 죽인 남원의 개에게 시집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럴 바엔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낫지!

어라… 어쩐지 익숙한 맹세였다. 기억을 되짚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오늘 얼마나 많은 언행 불일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죽어도 남원의 옷은 입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금 입고 있는 건 남원의 옷이었다. 사내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더니, 결국 남원의 개가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지 않았는가. 또, 발을 보일 바엔 머리를 박고 죽을 거라 했지만, 지금은 맨발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원의 개가 그녀의 발을 만지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그녀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녀는 절대 남원의 개에게 시집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 그녀는 목숨 걸고 이 결심을 지켜 내리라고 다짐했다.

남제화는 그저 위지불이가 맨발이 익숙하지 않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 짧은 시간에 그녀가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멍하니 있지 말고, 그만 가자꾸나.”

남제화가 그녀를 밀었다.

“널 기다리느라 짐이 배를 곯고 있지 않느냐.”

위지불이는 황제다운 위엄은 전혀 없는 황제를 바라보며 흘리듯 대꾸했다.

“날 기다려서 뭐 하려고?”

“너와 같이 밥을 먹으려고 기다렸다. 먼 길 온 손님을 위해 짐이 대접은 해야 할 것 아니냐?”

위지불이는 그와 함께 밥을 먹는 게 싫었다.

“난 노비라면서 어찌 당신과 밥을 같이 먹으란 말이요?”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남원은 동월과 다르다. 규율이 그리 많지 않아. 짐이 네게 특별히 큰 은혜를 내려, 겸상을 허락하겠다.”

처음엔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계속 밥 이야기를 하자 그녀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 먹자. 배불리 먹어야 정신을 차리고 다음 계획을 세우지.

아침밥으로 쌀밥 한 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평소 제대로 아침을 챙겨 먹지 않은 위지불이는 이런 게 조금 생소했다.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으니 쫀득한 쌀알의 감촉이 느껴졌다. 밥맛이 어찌나 좋은지 하마터면 혀까지 씹어 삼킬 뻔했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안에 무언가를 넣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밥맛이 어찌 이리 좋단 말인가? 다른 반찬 없이도 쌀밥 한 그릇이면 충분할 정도였다.

대체 무얼 섞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녀의 뇌리에 섬광이 번득였다. 남원의 개를 싸움으로 이길 수 없다면, 음식에 독을 타면 되지 않는가? 감히 그녀의 발에 손을 댔으니 엄청난 복통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 줘야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한쪽 눈썹은 치켜세우고 한쪽 눈썹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당장이라도 교활한 계략을 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제화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저리 음흉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를 암살할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해 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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