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59)화 (758/1,192)

제759화

그녀는 위지 가문의 일원으로서 어릴 때부터 늘 복수라는 대업에 대해 교육을 받아 왔다. 그간 남원에 잠입해 여제를 죽이려 했던 친족이 제법 있었지만,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도중에 실종되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살아남은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은 암살에 실패해 가족들 볼 낯이 없다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과거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던 위지 가문도 점차 꺾여 이제는 명맥만 겨우 이어 가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 살아 온 부모님을 떠올리니 그녀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그녀는 복수심을 꺾을 수 없었다. 공자의 희생으로 위지 가문이 부활한 것은 물론, 식구들도 한곳에 정착해 살 수 있었다. 위지 가문에서 공자는 영웅이자 그들의 자랑이었다.

공자가 돌아온 그해,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먼 길을 달려 도성에 도착한 그녀는 사람들을 따라 위지부尉遲府에 발을 들였다. 새로 수리한 저택을 둘러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위지문우라고 불리는 위지 가문의 셋째 공자였다. 역사의 폭풍우가 위지가를 쓸었기에 가문에 남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문을 떠나 각각 흩어져 지내야 했다. 가문을 잃은 슬픔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런 위지부를 되살린 게 위지문우였다. 가문 사람들은 그 덕에 위지부에서 지낼 수 있었다.

위지문우를 본 그녀는 정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남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인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른 식구들과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녀에게 그건 앞으로 공자를 신처럼 모시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는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공자가 떠난 그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온 식구들은 그의 방문 앞에서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구슬피 울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울다 쓰러지기도 했다.

겨우 눈을 떴을 땐 공자의 입관이 이미 끝난 뒤였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는 두꺼운 관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남제화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눈시울을 붉히는가 싶더니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걸핏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모자라 눈물까지 쏟다니… 아무래도 그가 부모 얘기를 꺼내서인 듯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남제화도 서글프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부모 생각만 해도 눈물이 차오르는 이들이 있는 반면, 어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원수지간일 때도 있었다. 마치 그와 여제처럼. 그들 모자는 언제나 권력이 가족애보다 우선이었다. 야심과 권력 때문에 여제는 옥에 갇혀야 했다.

머나먼 동월 땅에 있는 그녀의 딸은 아마 이번 생에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들인 그는 여제와 제법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신분이 바뀐 탓에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생겨났다. 그녀를 찾아간다 해도 두 사람 모두 말을 빙빙 돌리며 지루한 대화만 이어나갈 뿐이었다.

위지불이는 코를 힘껏 들이마시고는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저 개자식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원수를 갚지 못하고 이렇게 죽으려니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다. 저 개자식이 그녀에게 남으라고 한 것은 어쩌면 좋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저자 곁에 남아 있다면 필시 복수할 기회가 찾아올 터!

“좋다, 여기 남겠다.”

그녀는 위지 가문의 후손다운 도도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다만, 날 노비 부리듯 부려 먹을 수는 없다.”

남제화가 물었다.

“…어째서?”

천하에 이런 기괴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인데 의지가 굳세면 두려움도 없는 법.

“우리 위지 일가는 다들 존엄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그마한 얼굴을 굳히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남제화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와 이치를 따지려 했다.

“넌 암살을 시도한 자객이다. 이미 네 목숨을 살려준 것으로도 선처를 베푼 셈이지. 내 비록 황제지만,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자객이 노비가 되지 않는다면, 설마 내가 널 손님으로 모셔야 한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장로들이 날 책망할 것이다.”

위지불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장로들이 누군데? 황제보다 더 높은 자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다들 당신을 여제라고 부르는 거지? 난 줄곧 여제가 여자인 줄 알았다.”

남제화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암살하려는 자의 정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자객이라니… 저자의 부모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여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느냐?”

위지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동월과 남원은 거리가 너무 멀어 남원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위지문우도 생전에 남원에 대해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가문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의 죽음이 여제의 독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제에 대해서는 가족들도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황제에게 남원을 공격해서 위지문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일 뿐, 지금은 두 나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있으니 또다시 문제를 일으켜선 안 된다고 답할 뿐이었다.

위지 가문의 식구들도 황제의 고충을 이해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수도 없이 나오는 전쟁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위지문우의 복수를 위해 수많은 장병들을 죽음으로 내몰 순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남원에 몰래 사람을 보내 여제를 암살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동월국 조정에서도 알지 못하게 위지 가문 내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일이었다.

위지불이는 자객 명단에 올라가지 못했다. 여인인데다 솜씨도 그저 그랬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이들 틈에 끼어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딱히 이렇다 할 재주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제 부족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출중하지는 않아도 어리석진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위지가의 자객들은 줄어만 갔다. 많은 자객들이 복수에 계속 실패하고 돌아오지 않자 그녀에게도 자객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차례가 왔다.

남원의 여제를 죽이기 위한 훈련……. 하지만 훈련을 받는 동안 위지불이는 여제에 대해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여제에 대한 정보는 기밀이라는 이유로 가문 사람들은 끝끝내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깔보는 건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으니까. 언젠가 그녀는 가문이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둬 갈 것이다. 그렇담 부모님 역시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기겠지!

여제의 정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어쨌든 그가 남원의 황제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남원 황궁의 지도를 손에 넣었고, 하루에 몇 번씩 외웠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해가 거듭되면서 그 지도는 그녀의 뇌리 속에 완전히 새겨졌다.

가문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 그녀는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남원 땅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누구보다 유능한 자객이 아닌가. 남원의 국토도 밟지 못한 채 가문에 돌아온 친척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녀는 남원 땅에 들어온 건 물론 목숨까지 건졌다. 이제 여제 곁에 남아 복수의 기회를 노리면 될 일이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착각을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았다. 퍽 재미있는 오해가 아닌가. 위지불이가 계속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는 헛기침하고는 몇 마디 당부를 전했다.

“지금부터 넌 내 시종이다. 우리 남원은 규율이 많은 너희 동월과는 다르다. 내 시종이긴 해도 거세를 할 필요는 없다. 궁 안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고, 숨어서 연애를 할 필요도 없다. 남원은 개방적인 풍조를 지닌 나라이니 남녀 간의 정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다만, 서로 마음이 통해야지 강제로 몰아세워선 아니 된다.”

“…….”

허튼소리… 남원의 개는 부끄러움도 모른단 말인가? 저 스스로 짝을 구하다니, 혼인은 부모의 분부와 중매인의 말에 달린 것이거늘. 남녀 간의 정은 무슨!

“또 하나… 내 곁에 있다고 해서 언제든지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남제화는 천천히 붉어지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재미있는 놈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힘껏 주먹을 쥐었다.

“널 상대하는 건 한 손으로도 족하다. 내가 성격이 좋긴 하지만 화가 없는 건 아니거든. 어쨌든 난 황제다. 화를 내면 제법 무섭지. 알아듣겠느냐?”

공자가 죽던 날, 위지불이는 동월의 황제를 본 적 있었다. 그에게선 위엄이 넘쳐 흘렀고 천하를 군림하는 군주의 기세가 느껴졌다. 가장 뒤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도 황권의 위세가 전해져 가슴이 쿵쿵 뛸 정도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원의 여제는 동월의 황제보다 훨씬 못했다.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남원의 황제에게선 위엄이 느껴지기는커녕 여인 같아서 그를 여제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녀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화를 내든 안 내든 그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흥, 자기만 화낼 줄 아나? 그녀 역시 제법 성깔 있는 사람이니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안 그럼 못 볼 꼴을 볼 터. 남제화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불이, 사는 건 쉽지 않으니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위지불이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투가 꼭 아버지 같았기 때문이다. 젊고 준수한 사내가 나이 든 부모님의 말투로 말하는 건 정말인지 너무 기괴했다.

“늦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 어서 가서 자거라.”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문밖으로 데려가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되었다. 괜히 번거롭기만 하지. 그저 하룻밤인 것을.”

뒤돌아선 그는 편전에 있는 어느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방 안에는 침대와 침구가 놓여 있었다. 그가 침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위지불이는 조금 의아했다.

“당신이 이곳 황제라면서… 시중을 드는 하인도 없단 말인가?”

남제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제 덕분에 고독한 군주가 된 그는 무료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그에겐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위지불이의 당초 계획은 여제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아마 여제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곤 상상도 못할 테지. 그런데… 계획대로 움직이기엔 몸이 너무 피곤했다. 많이 놀라기도 했고 또 침대가 유난히 푹신했기에 눕자마자 곧장 이불 속에 폭 파고들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일 틈도 없이 곧장 단잠에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