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8화
참 의아한 일이었다. 보석이 어찌 허공을 떠다닌단 말인가? 어디 고정된 것도 아닌데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 보석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꼭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 같았다.
위지불이는 호기심에 보석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보석이 아닌 차디찬 피부가 만져졌다. 흠칫 놀란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눈을 닮은 보석이 아니라 정말 눈이었다. 그녀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눈!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휘둘렀다. 맞은편에 서 있던 자는 귀신같이 칼을 피했다. 칼로 그자를 베긴커녕 오히려 그녀가 모퉁이에 몰리는 형세가 되었다. 그자는 순식간에 칼을 빼앗아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이제껏 목에 칼이 닿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고 살았건만, 오늘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치욕, 그 자체였다.
이긴 자는 왕이 되고 진 자는 역적이 되는 법.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위지불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죽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다만 공자의 복수를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저승에서 공자 곁에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칼은 그녀의 목을 베지 않았다. 오히려 수상한 자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탁자에 놓인 등잔에 불이 켜졌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위지불이는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다. 귓가에 바람이 스치며 또다시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손을 내리자 여러 개의 등불이 켜져 방 안이 대낮처럼 환했다.
위지불이는 경악했다. 알고 보니 방 안에는 그녀와 그 사람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장식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전부 다 병사들이었다.
그들 사이를 물고기처럼 기어 다녔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이란 말인가? 그들은 어릿광대의 재주를 지켜보듯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는 것인가. 위지불이는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밀려들었다. 감히 암살자를 어릿광대 취급하다니.
그녀는 자신을 상대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제법 반반한 사내였다. 날카로운 두 눈썹과 깊은 눈… 그래서인가 눈매가 유독 입체적이고 그윽해 보였다. 신기했던 건 속눈썹이었다. 사내의 속눈썹이 저리 길고 촘촘하다니……. 잠시 딴생각을 하던 위지불이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경멸스럽다는 듯 속으로 되뇌었다.
‘하, 남원의 개가 아무리 잘생겨도 공자의 반도 못 따라가지.’
한편 사내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지 가문에서 보낸 자인가?”
그가 입을 열자마자 위지불이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여제인가? 여제가 남자였다니… 그저 호칭만 여제라고 부르는 것인가?”
남제화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어딜 봐서 여제의 모습이란 말인가? 위지 가문엔 인재가 그리 없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모자란 자객을 보낸 것일까. 키는 작은데 목소리는 또 걸걸한 놈이었다.
그는 별안간 지금 상황이 조금 재미있어졌다. 그는 손을 휘두르며 방 안에 있던 시위를 물렸다. 궁에 갇혀 지내다 보니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위지불이에게서 빼앗은 단검으로 자기 손톱을 갈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몇 살이고?”
한참이 지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린 자객은 그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곧장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남제화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그러느냐? 측간이라도 가고 싶은 것이냐?”
급하면 측간을 가면 그만이지, 뭐 하러 저리 매섭게 노려본단 말인가. 그러자 자객은 한 글자 한 글자 씹듯이 내뱉었다.
“내 보검으로 감히 손톱을 갈다니!”
대체 이 위지불이를 뭐로 보고! 어찌 제 보검으로 저리 더러운 짓을 하냔 말이다!
“남원의 개, 이 몸이 너와 겨루러 왔다!”
위지불이는 주먹을 움켜쥐고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는 앉아 있었고 그녀는 서 있었으니 이미 우세를 선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가 조금 힘을 주자 엄청난 통증이 느껴져 그녀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미 패했거늘, 또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것이냐?”
남제화가 그녀를 밀쳤다. 몇 걸음이나 밀려난 위지불이는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제화는 이런 자객을 본 적이 없었기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왜… 이기지 못했다고 울음이라도 터뜨리려고? 어찌 이리 계집애 같단 말이냐.”
그 말에 위지불이는 살짝 놀랐다. 자신을 사내아이로 여기고 있었다니. 사실 계속 남장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그녀의 성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굳이 자신이 여자라는 걸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내의 신분이 오히려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여자라는 걸 알고 저 개자식이 못된 마음을 품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남제화는 더 이상 칼로 손톱을 갈지 않고 위지불이에게 물었다.
“말해 보거라. 이름은 무엇이고, 몇 살이냐? 대답하면 이 칼을 다시 너에게 돌려주겠다.”
위지불이는 맨주먹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칼을 되찾아서 자기 필살기인 오양조봉五陽朝鳳 도법刀法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움직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난 위지불이尉遲不易라고 한다. 올해 열일곱이지.”
남제화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불이不易라… 어찌 그리 이상한 이름으로 지은 것이냐? 무엇이 쉽지 않느냐? 사는 게 쉽지 않느냐?”
그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는 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이건 그도 진즉 깨달은 이치였다. 그는 위지불이의 주변을 몇 바퀴 서성이며 말했다.
“열일곱이면 그리 어리진 않구나. 한데 집에서 밥을 주지 않는 것이냐? 어찌 이리 말랐단 말이냐?”
위지불이가 자신의 단도를 바라보았다.
“대답했으니 어서 칼을 돌려줘.”
“그래, 여기 있다.”
남제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위지불이는 말은 느렸지만, 행동은 빨랐다. 칼을 건네받은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서슬 퍼런 빛을 번득이며 남제화의 얼굴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스산한 빛이 또 한 차례 반짝이더니 칼은 다시 남제화의 손에 쥐어졌다.
“…….”
분명 빠르게 휘둘렀거늘… 어째서 그의 동작이 더 빠르단 말인가? 요사스러운 마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남제화는 칼을 쥐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양조봉이구나. 그 도법은 너무 섬세하고 부드러워서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너도 배운 것이냐?”
“그저 조금 아는 것일 뿐… 배운 것은 아니지. 방금 말했듯이 그건 여인들이 배우는 거니까. 너무 부드러워서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잠시 침묵한 위지불이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이건 우리 동월의 도법이다. 넌 남원의 개… 흠흠… 남원 사람인데 이걸 어찌 아는 거지?”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볼이 붉게 물드는 걸 발견했다. 머릿속 생각이 저리 다 보여서야… 어쨌든 보면 볼수록 참 재미있는 아이였다. 설령 위지불이가 자신을 남원의 개라고 했다고 한들 그는 전혀 상관없었다.
“예전에 동월에서 강호를 돌아다녔으니 각 문파의 기술은 어느 정도 꿰고 있지.”
위지불이는 그제야 그가 오양조봉을 훤히 꿰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일국의 제왕이 다른 나라의 강호를 떠돌다니. 분명 무술을 배우는 척하며 첩자 노릇을 했을 것이다. 동월 사람들은 그가 첩자인 줄 모르고 무술을 가르쳐 줬겠지. 그 바람에 그녀의 무술이 그에게 못 미치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남제화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 칼은 내가 보관하는 게 더 낫겠군. 네 손에 들어가면 흉기로 변할 테니까.”
위지불이는 그가 그녀의 단도를 벽에 걸어 두는 것을 지켜봤다. 패배감에 속이 쓰렸지만 목숨이 붙어 있다면 언젠간 저 단도를 다시 손에 쥐게 될 것이다. 남제화가 물었다.
“칼을 이토록 중요시하는 걸 보니, 이름과 내력이 있을 법도 한데?”
“물론이지!”
위지불이가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직접 도안을 그려서 철기를 주조하는 제齊 사부에게 의뢰한 단검이다. 제 사부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철기 사부이시지. 평소엔 무기를 만들지 않지만, 우리 아버지와의 친분으로 특별히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예홍도霓虹刀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셨지.
예홍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람을 죽일 때, 피가 튀는 곡선이 꼭 무지개 같거든. 해서 예홍이라고 부른다.”
남제화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알고 보니 내력이 대단한 칼이었구나.”
위지불이는 거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연하지.”
“하면… 그리 좋은 칼을 뽑아 들었으니 응당 피를 봐야겠군?”
“…쿨럭, 그, 그렇지.”
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에게 칼이 있으니 보나 마나 그녀의 목에 칼끝이 닿을 텐데… 피를 본다고 해도 그녀의 피를 보게 될 터. 그런 그녀의 불안한 마음은 모르는지 남제화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안 그래도 심부름할 사람이 부족했는데 네가 남아서 일을 좀 하거라.”
“안 된다.”
위지불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난 널 죽이러 왔는데 어떻게 네 노비가 될 수 있겠느냐?”
“노비가 되지 않는다면 널 죽이는 수밖에 없다.”
“죽으면 그만이지.”
위지불이가 얼굴을 굳혔다.
“어차피 살아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죽이든, 죽임을 당하든… 나는 뭐든 상관없다!”
남제화는 그녀의 말이 조금 뜻밖이었다. 엉터리 자객 주제에 죽는 걸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하지만 그녀가 원한다고 한들 그는 자객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죽는 건 쉽지… 쉽지 않은 건 오히려 사는 것이다.”
남제화가 말했다.
“이왕 네 이름이 불이不易(쉽지 않다)니까… 끝까지 살아 보거라.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을 헛되이 저버리면 안 되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위지불이는 자신이 불효자란 생각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지금까지 그녀의 머릿속엔 늘 공자의 복수뿐이었다. 원대한 목표를 가졌으니 다른 것들은 다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타국에 오니 부모님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셨고 어머니는 늘 혼만 내셨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늘어놓던 잔소리와 호통마저도 너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