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7화
백천범은 조금 의아했다.
“시일이 이미 지났는데 위 태의는 왜 안 오는 거지?”
월규가 입을 삐죽거렸다.
“분명 그날 체면을 구겼으니 오기 부끄러운 거겠죠.”
“자랑이다.”
백천범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위 태의 콧대가 얼마나 높은데… 황상마저 그자의 체면을 봐줄 정도잖아. 한데 너는 그런 자에게 칼을 꽂다니!”
월규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보내서 불러와야겠어. 괜히 질질 끌 것 없으니까.”
그때, 한 소태감이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마마, 태의원의…….”
백천범은 태의원이라는 말에 곧장 손을 내저었다.
“어서 들라 하게, 어서.”
하지만 안으로 들어온 이는 위중청이 아닌 여의관이었다. 그녀는 곧장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마마, 옥체 강녕하시옵니까.”
백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분부한 뒤, 여의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예전의 교 미인이었다.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교 태의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마마께 아룁니다.”
본래 어여쁜 얼굴에 관복을 입고 관모를 쓰고 있으니 우아한 품위마저 더해졌다.
“신, 황상의 명을 받들어 마마의 맥을 짚으러 왔습니다.”
백천범은 더 의아했다.
“오늘은 어째서 위 의정이 오지 않고?”
“마마께 아룁니다. 위 의정은 황상께 주청하여 남원으로 떠났습니다. 해서 신이 의정을 대신해 마마의 맥을 짚으러 왔습니다.”
월규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천범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언제요? 위 의정이 언제 떠났는데요?”
“사흘 전에 떠났습니다.”
월규는 다시 한번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원으로 떠나면서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다니, 이런 모진 사람 같으니라고……. 백천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월규를 바라보더니 교 태의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 태의, 맥을 짚어 주세요.”
교 태의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펼쳐 가볍게 백천범의 손목에 가져다 댔다. 황후의 진맥은 처음 짚는 것이었기에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그녀는 집중한 듯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참 만에 손을 뗐다.
“혈맥에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마마께선 옥체 무탈하십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관례대로 진맥을 청하는 것뿐이니, 긴장할 필요 없어요.”
교 태의가 미인이던 시설, 이미 황후를 겪어 봤기에 그녀의 사교성이 좋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는 긴장할 필요 없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이번이 첫 진맥이니 조금 조심스러웠다.
교 태의는 예를 갖추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막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교 태의, 잠시만요.”
뒤를 돌아본 교 태의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대꾸했다.
“규 고고.”
월규는 막상 교 태의를 불러 세웠지만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긴 망설임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위 의정이 떠나면서 남긴 말은 없었나요?”
교 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부님께서 마마의 맥을 짚을 땐 항상 세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절대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셨고요.”
“그리고요?”
“그리고 마마께서 대하기 편한 분이시긴 하지만, 궁의 규율이 엄격하니 군신 간의 도리에 어긋나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월규는 가만히 두 눈을 내리깔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휘몰아쳤다. 떠나면서 그녀에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니. 그녀가 그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탓이겠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월규가 걸음을 옮기자 교 태의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규 고고, 잠시만요.”
월규는 걸음을 멈춰 세우고 교 태의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규 고고, 조금 전엔 마마께서 계셔서 말씀을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고고께서 절 찾아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고고를 찾아가려 했습니다.”
“절 찾아오려 했다고요?”
“네.”
교 태의가 살짝 탄식을 내뱉었다.
“규 고고와 저희 사부님 일은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고고를 사모님이라 부르는 날이 오길 고대했는데, 사부님께서 갑자기 황상께 청을 드려 남원으로 가셨습니다. 남원의 인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이유를 직접 알아보시겠다고요.
사실 사부님께서는 요 몇 년간 이 일로 고민이 깊으셨습니다. 간혹 제게도 이 얘길 꺼내 상담을 했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지요. 전 사부님께서 고고 곁에 계시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규 고고와 함께 떠나는 건 어떻겠느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리 결정하신 것 같았습니다.”
교 태의는 월규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사부님의 성격이……. 아마 규 고고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워낙 도도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자존심 센 사부님의 마음을 그간 고고께서 얼마나 많이 거절하셨습니까? 사부님의 안색이 좋지 않을 때마다 전 고고께서 사부님을 화나게 하셨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규 고고, 제가 사부님을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간 사부님께서는 고고 때문에 수많은 혼사를 거절하셨습니다. 어떨 땐 제가 직접 고고께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사부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지요. 그간 사부님께서 고고의 마음을 아프게 한 만큼 고고께서 자신을 똑같이 대하는 것뿐이라고 하셨어요. 게다가 고고는 여인이라 체면을 차려야 하니 사부님은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사부님께서 마마의 진맥을 마치고 돌아오시더니 얼굴을 굳히신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전 이번에도 고고께서 사부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곧장 황상께 청을 드려 떠나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고고께서 사부님께 무슨 말씀을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큰 상처를 받으신 게 틀림없습니다.”
월규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바늘이 그녀의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자꾸만 아파 왔다.
“사부님께서 떠나시기 전, 고고께 전해 달라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월규가 입술을 들썩이며 물었다.
“뭐라던가요?”
“지금껏 고고처럼 도도한 여인은 본 적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고고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돌아오지 못할 테니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도 남기셨습니다.”
월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아마 그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월규는 가볍게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허공에 나부꼈다. 마치 그가 그녀의 영혼을 가지고 떠난 것 같았다.
콧대 높은 그보다 그녀가 더 도도했다. 하지만 그런들 어찌하겠는가. 그녀는 분명 그를 사랑했다. 십여 년을 사랑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끊어 버렸다.
이튿날 아침, 월규를 마주친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줄곧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몸소 머리를 틀어 올렸다는 것은 평생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 또한 평생 시집을 가지 않음 그만이었다. 뭐, 계속 이렇게 도도하게 사랑하는 거지!
* * *
달빛도 숨은 살인의 밤!
위지불이尉遲不易는 이런 밤에 황궁에 들어가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여겼다. 달이 구름 속에 꼭꼭 숨어 손을 뻗어도 다섯 손가락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등불 하나 없다니… 아무래도 황궁이 가난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하고 나니 흐릿하게나마 형체를 분간할 수 있었다.
그녀 앞으로 거대한 궁정이 천지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지켜보고 있는 짐승처럼 언제든 달려 나와 공격할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몸을 숙이고 한 발 한 발 조용히 앞으로 향했다. 처음 온 곳이지만, 이곳의 구조는 이미 뇌리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야에 빛이 들어왔다. 불빛 아래로 저승에서 온 듯한 병사들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서 있었다. 허리춤에 휘어진 칼을 찬 병사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펴고 목을 꼿꼿이 세운 상태였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애당초 죽을 각오로 이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데, 저승에서 온 병사가 뭐 그리 두려울까. 재수가 없다면 그녀도 금세 저승의 병사가 될 텐데.
그녀는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고 순시병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병사들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고 질서정연하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지불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나무 계단 아래로 이동했다. 나무 계단은 두껍고 견고해서 돌계단만큼이나 튼튼했다. 복도에 올라서니 이곳 바닥에도 역시 목판이 깔려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낮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깊은 밤에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신중한 성격의 위지불이는 곧장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몸 전체를 바닥에 붙이고 물고기가 헤엄치듯 목판 위를 기어갔다. 이렇게 해야 소리를 최대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머릿속의 지도를 따라 주전主殿으로 향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침궁이 나온다. 위지불이는 제 운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문밖을 지키는 당직자가 한 명도 없다니. 그저 육중한 문만이 그녀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찾는 사람이 이 안에 있다는 생각에 절로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문 옆에 바짝 엎드려서 조심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에서 끼이익 소리가 나자 화들짝 놀란 위지불이는 황급히 문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아주 가는 틈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매우 마른 체구였다. 깊게 심호흡을 내쉰 그녀는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도 역시 나무 바닥이었다.
방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시야에 식별하기 어려운 희한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그게 장식품일 것으로 추측했다. 여러 물체가 수직으로 곧게 뻗어 있는 기괴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워낙 괴상한 나라이니 저런 기괴한 장식품이 있다고 해도 놀랄 것 없었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서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침대로 향했다. 그때, 별안간 수직의 기다란 물체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위지불이는 방향을 돌려 몸을 피했지만, 괴상한 물체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계속 앞을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위지불이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두 개의 물체가 반짝였다. 서늘한 빛을 뿜어내는 게 사람의 눈동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