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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56)화 (755/1,192)

제756화

아침 어선을 물린 뒤, 월규와 백천범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고운 소리에 월규가 신이 나서 말했다.

“마마, 까치입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봅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월규가 답했다.

“황상께서 또 신기한 걸 가져다주시겠지요.”

그때, 밖을 지키던 소태감이 위 태의가 찾아왔다고 고했다. 백천범이 월규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게 좋은 일이었나 보네.”

위 태의는 안으로 들어와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신,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황상의 명으로 마마의 맥을 짚으러 찾아왔습니다.”

백천범이 손목을 내밀었다.

“황상께 맥을 자주 짚을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이러시네요.”

위중청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마마를 끔찍이 아끼시니 그러한 것이지요. 혹여 탈이 나시더라도 미리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는 두 손가락을 펼쳐 백천범의 가녀린 손목 위에 가볍게 내려놓더니 금세 손을 떼었다.

“마마, 옥체 강녕하십니다. 아주 좋으십니다.”

백천범이 눈썹을 세우며 웃었다.

“전 건강하다니까요.”

맥을 다 짚은 뒤에도 위중청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월규의 얼굴 위에 박혀 있었다. 월규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백천범은 그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난 점박이한테 다녀와야겠다.”

월규가 따라나서려 하자 백천범이 손을 내저었다.

“넌 무서워하잖아. 따라올 필요 없어.”

월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백천범이 자리를 뜨자 위중청이 말했다.

“월 고고, 잠시 내 방으로 같이 가시지요. 할 말이 있습니다.”

월규는 손수건을 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어찌 대인의 방을 갑니까. 혼인도 하지 않은 남녀인데 말이에요. 괜히 뒷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 여기서 말씀하세요.”

사실 이곳도 두 사람뿐이었다. 태감과 궁녀들도 두 사람의 사이를 알고 있었기에 진작에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마마마저 자리를 비켜 줄 정도인데, 그들이 어찌 눈치껏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위중청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겠지요?”

월규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위 대인, 제가 대인 배 속의 기생충도 아닌데 어찌 대인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월규,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깁니다. 모른 체 마세요. 남쪽에서 함께 올라온 이들도 우리 속내를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고 당신 또한… 궁에서 허송세월을 보내선 안 될 테지요. 차라리 우리… 황상께 혼사를 청해 봅시다.”

위중청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한마디 더 했다.

“당신을 위한 일이에요.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 여인을 맞을 수 있지만, 여인은 나이가 많으면 시집가기 힘들어지잖습니까?”

청혼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건만, 위중청이 뒤이어 덧붙인 말에 월규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위 대인께서 절 구제해 준다는 뜻입니까? 참 감사하네요. 허나 이리 된 건 내가 지진부진하게 행동해서가 아니죠. 아무튼 내가 허송세월을 보내든 말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월규,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어찌 그리 화를 내는 것입니까? 난 정말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라니까요.”

“당신 걱정은 필요 없어요. 위 대인, 혹시 다른 신붓감을 구하지 못해 제가 생각난 건 아니고요?”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예쁜 여제자도 거뒀잖아요? 그 제자랑 잘해 보면 되겠네요!”

“교 태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위중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교 태의는 내 제자고, 난 사부요. 나와 교 태의 사이는 아주 떳떳하단 말입니다.”

제자와 저를 엮자 위중청은 참지 못하고 몇 마디 덧붙였다.

“물론 실력이 정말 대단하긴 합니다. 뒤늦게 들어오긴 했지만, 다른 선후배들에 비해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고 할까요. 거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하지요. 내 능력껏 많은 걸 가르쳤으니, 앞으로 날 뛰어넘을지도 모릅니다.”

월규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그 똑똑한 여제자를 놔두고 뭐 하러 날 찾아온 건데요?”

“월규, 당신은 다 좋은데 자꾸만 앙심을 품는 건 정말 보기 좋지 않습니다.”

위중청은 나이를 먹어도 오만한 성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무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속 시원히 말해 줬으면 합니다.”

월규는 탁자 옆에 기댄 채 손수건을 쥐어짜며 그를 바라보았다. 바닷물이 출렁대듯 가슴이 자꾸만 요동쳤다. 지나간 일들이 하나둘 눈앞에 떠올랐다. 기홍과 녹하에게 짝이 생겼을 때, 그녀 또한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러던 중 위중청이 저택에 들어와 왕비의 태맥을 짚었을 때, 그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런 그를 점점 흠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찾아가 은근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위중청은 그런 월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히려 못 본 척 피하며 그녀의 진심을 짓밟았다. 그는 극장에서 어떤 여인에게 첫눈에 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여인은 찾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관류 가문의 딸에게 혼담을 꺼내기도 했다.

월규도 그가 자신을 깔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학자 집안 출신이고,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기 어려워 초왕의 저택에 팔려 갔으니……. 그가 곤경에 빠진 인재라면 그녀는 진흙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니 그 차이가 너무 컸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녀의 포부는 원대했기에 그 후로 두 번 다시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한 쌍으로 생각했다. 황후마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어 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마침내 그녀 앞에서 혼사 얘기를 꺼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십 년 동안 품어온 화를 어찌 한순간에 풀 수 있을까.

“위 대인이 날 위해서 그리한다는 건 나도 알아요. 내가 궁에서 나이만 먹고 있는 게 불쌍해 보였겠죠. 근데 저 말고도 궁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사람들 전부 구제해 줄 작정인가요?

만약 외로워서 혼인하려는 거라면, 황상께 혼사를 정해 달라고 청해 보세요. 태의원 의정醫正은 이품 고관이니 어느 집 규수가 마다하겠어요. 명문가의 규수들이면 모두 달려올 텐데 굳이 나랑 할 필요 없죠. 난 그저 일개 궁녀인걸요. 늙어서 얼굴도 누런데 이런 나한테 장가를 왜 오겠다고…….”

위중청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까?”

“네.”

“후회하지 않겠어요?”

월규가 경멸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후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그리 말한 것입니다.”

위중청은 어두워진 얼굴로 목을 꼿꼿이 치켜세우며 말했다.

“좋아요. 오늘 당신한테 한 말은 꺼낸 적 없다 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다가 하마터면 기둥에 부딪힐 뻔했다. 월규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가세요, 배웅은 안 할 테니!”

백천범이 돌아왔을 때, 월규는 턱을 괴고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멍청하게 앉아 있는 월규를 보고 백천범은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별안간 월규의 어깨를 확 내리쳤다.

“멍하니 앉아서 뭐 하고 있어?”

월규는 깜짝 놀라 움찔하고는 백천범을 흘겨보았다.

“아이참, 이게 대체 어딜 봐서 황후 마마다운 모습이랍니까? 다들 비웃겠습니다.”

백천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황후인데 누가 감히 날 비웃어. 그래서, 위 태의랑 무슨 얘길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요즘 들어 자주 찾아오는 게 내 맥을 짚으려는 게 아니라 사심이 가득하던 걸? 너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거야. 그러니 분명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겠지.”

월규가 얼굴을 붉혔다.

“혼담을 꺼냈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세상에, 드디어 그 얘길 꺼낸 거야? 그래, 내가 곧장 혼수를 준비해 줄게.”

월규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 승낙도 하지 않았는걸요.”

“왜 바로 승낙하지 않았어? 위 태의 성격을 아직도 모르는 거야?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안 하면 안 하는 거지요. 하나도 안 아쉽습니다.”

월규는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가 새에게 모이를 주었다.

그 후로 백천범은 월규를 몇 차례나 타일렀지만, 월규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월규가 옛일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백천범도 잘 알고 있었다. 단번에 마음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끈질기게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옛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거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월규 너도 혼자고 위 태의도 혼자잖아. 이걸로 전부 설명 가능한 거 아니야?”

월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위 태의가 장가를 안 든 건 저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시집을 안 간 것도 위 태의 때문이 아니고요.”

백천범이 말했다.

“내가 볼 때 위 태의가 장가를 안 간 건, 월규 너 때문인 거 같아.”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혼담도 꺼냈는걸요, 뭐. 연이 닿지 않아 포기한 거지, 만약 성사되었으면 왜 저를 찾아왔겠어요?”

“그건 남쪽에 있었을 때 일이잖아. 도성에 올라온 뒤로는 누가 위 태의한테 혼담을 꺼내도 한 번도 승낙한 적 없어. 그게 다 월규 너랑 옛정을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남쪽에 있었을 땐, 거리를 떠돌던 의원에서 초왕의 의관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좀 들떴었겠지. 그래서 네게 상처를 준 건 사실이지만, 도성에 돌아와서는 의술에만 전념하면서 네 기분도 건드리지 않고 착실히 지냈잖아. 한데 너는 오히려 늘 기분 나쁜 기색만 보이고 말이야.

네가 그러는데 위 태의가 어찌 혼담을 꺼내겠어. 오늘 용기를 내서 얘기를 꺼냈는데 승낙도 하지 않고… 위 태의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월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자도 저한테 상처를 주었잖아요?”

“그래, 비겼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지?”

백천범이 말했다.

“다음에 위 태의가 또 찾아왔을 때, 먼저 혼사 얘기를 꺼내지 않거든 네가 얘기해.”

“전 안 할 거예요.”

“그럼 황상께 두 사람의 혼사를 정해 달라고 할게.”

“마마, 제발 그러지 마시어요.”

월규가 손수건을 비틀며 부끄러워했다.

“다음에 또 오면 그때 그자의 태도를 보고 다시 생각해 볼게요.”

백천범은 조금 누그러진 월규의 태도에 한시름 놓았다.

“알겠어. 두 사람만 결정하면 혼사 준비는 내가 바로 할게.”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위중청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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