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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55)화 (754/1,192)

제755화

문을 나선 태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 주인장의 딸인 사봉봉은 한참 동안 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니,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지금 그는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태자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사봉봉은 꽃밭에 숨어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멀어지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승덕전으로 향했다.

황제는 늘 그래왔듯 사앵앵이 모호하게 하는 말을 모른 척 흘려들었다. 그녀가 천하를 지배하는 군주에게 미움을 사지 못하리란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사봉봉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사봉봉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곤 어머니 곁에 섰다. 가냘픈 몸이긴 해도 이제 제법 소녀다운 곡선이 두드러졌다. 차분한 표정까지 짓고 있으니 제 나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궁에 오지 않더니… 이제 숙녀가 다 되었구나.”

사봉봉이 몸을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소녀, 줄곧 황상께 문안을 드리고 싶었지만 가게 일이 바빠 입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어머니께서 입궁하신다 하여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듣자 하니 사기 상점의 장사 절반을 봉봉이 네가 도맡아 관리한다고 하던데. 어린 나이에 그런 걸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저 또한 장사가 좋았습니다. 제법 본 게 많아서인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소녀가 장사를 하는 이유는 첫째가 은자를 벌기 위해, 둘째가 조정에 더 많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면 국고가 풍족해질 테고, 황상께서도 나라를 더 잘 통치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사직이 안정되면 저희 장사꾼들도 장사를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대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앵앵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엔 사앵앵은 딸만큼도 철이 들지 않았다. 딸은 황제의 짐을 덜어 주려 하는데 어미라는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달려와 빚을 독촉하다니.

“한데.”

사봉봉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요즘 사기 상점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은전이 돌지 않아 무척 고생이지요. 여러 계획도 전부 무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심지어 상대 인원은 삼 할이나 줄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황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빙빙 말을 돌린 게 결국은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어머니가 하지 못하겠으니 딸을 내보낸 것이었다. 그래, 하면 어찌 얘기하는지 들어 봐야 할 터.

“황상,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이치가 아닙니까?”

황제는 사봉봉의 직설적인 말에 당황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렇고말고.”

사봉봉은 손을 뻗더니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면 돈을 돌려주십시오, 황상.”

사앵앵은 콩닥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슬쩍 황상의 안색을 살폈다. 황상은 봉봉을 좋아했고, 황후 마마께서도 봉봉을 지켜주시니 아이와 언쟁을 벌이진 않을 터. 그래봤자 아직 아이가 아니던가. 황제가 헛기침을 몇 차례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일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그것, 참… 빚을 졌으면 응당 갚아야 하는 게 도리지만, 지금은 국고가 넉넉지 않아…….”

“소녀 또한 황상의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상께서는 만백성의 가정을 돌보시니 정말 쉽지 않으시겠지요. 동월은 광활한 국토에 인구 또한 많은 나라입니다. 은자 이십만으로 이곳저곳의 빈틈을 메우다 보면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지요. 황상께서 돈을 아끼시어 빚을 갚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황제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봉봉이가 짐의 고충을 잘 아는구나. 네 말대로 돈이 있다 해도 또 다른 곳에 융통해야 하니 은자를 모아 돈을 갚고 싶어도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황상, 이 이십만 냥은 저희 어머니에게 가슴 속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빚을 독촉하는 어머니 때문에 황상께서도 귀찮으시겠지요. 오늘, 이 일을 완벽히 마무리 짓고 황상께서도 앞으로 평안한 나날을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제는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짐은 돈이 없다.”

황제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 담력 좋은 사앵앵의 심장 또한 벌렁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딸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까만 눈을 반짝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상, 조급해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녀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요. 이 일을 끝내면 황상께서 돈을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제는 그녀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리 좋은 방법이 있다고? 그가 안색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하면 어디 들어 보지.”

황제 역시 처음부터 돈을 갚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수해를 복구한 뒤 은자 이십만 냥을 빠르게 국고로 징수해 사앵앵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찌 늘 계획대로 되겠는가.

동월은 제법 부유한 국가지만 지출 또한 매우 컸다. 사봉봉의 말대로 그는 만백성의 가정을 돌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을 써야 하는 곳이 많았다. 이쪽저쪽 부족한 곳을 메우다 보면 돈은 금세 동이 났다.

이십만 냥이 사앵앵에겐 가시라면, 그에게는 마음의 병이었다. 물론 뻔뻔하게 이십만을 받고 입을 쓱 닦을 수도 있었다. 감히 누가 천하제일의 황제를 성가시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만약 사앵앵이 백천범에게 이 일을 고자질한다면… 한바탕 꾸지람을 듣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녀 앞에서 체면을 제대로 구기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 역시 사앵앵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황제는 사앵앵을 인재라고 생각했다. 그간 그녀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성공을 거두었다. 한데 제가 빌린 이십만 냥 때문에 그녀가 공들여 쌓은 탑을 부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만약 정말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황제 또한 충분히 고려해 볼 만했다.

사앵앵은 자신의 딸이 무슨 말을 꺼낼지 전혀 알지 못했다. 돈을 갚지 않고도 빚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 그녀는 또다시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봉봉은 태연하게 황제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상, 어째서 저희 사기를 황상皇商으로 삼지 않으시는 것인지요. 앞으로 조정과 궁의 모든 총무를 저희 사기 상점에서 책임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세금 징수에서 일정 금액을 감면해 주시면 저희 어머니도 빨리 이십만 냥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되면 더는 황상을 찾아와 번거롭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이를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황제는 넋이 나가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앵앵도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그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은 꼭 사앵앵의 심장을 디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봉봉은 조금도 걱정 없는 눈치였다. 그저 황제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만 기다렸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서성이던 황제는 마침내 자리에 멈춰 서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구나.”

황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소금과 광업은 조정의 근간 사업이라 손을 댈 수 없겠지만, 나머지는 전부 사가 상점에 맡게. 이 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고 일을 잘 처리하거든 그때 계약을 연장하도록 하지. 어떠한가?”

이 조건이 싫을 게 무어란 말인가. 사앵앵 모녀는 자연스레 활짝 웃었다. 정말 황상만 된다면 이십만 냥 때문에 속 썩을 일도 없었다. 크게는 대규모 토목 공사부터 작게는 바늘과 실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건까지… 황실에서 필요한 물자를 전부 사가 상점에서 책임진다면 은자를 벌어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명성까지 얻는 일이었다.

사앵앵은 서둘러 자신의 딸을 일으켜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민부는 그저 황상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황상, 부디 마음 놓으십시오. 황상께서 안심하실 수 있게 제가 최선을 다해 황상께서 맡기신 일을 잘 처리하겠습니다.”

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몰리다 보니 이 지경이 된 게 아니던가. 하지만 잘 따져 보면 그 역시 손해 볼 게 없었다.

궁 안의 물자 구입 체계는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어느 시대든 정경 유착은 늘 있는 일이었고, 그 정도가 심하지 않은 이상 눈감아 주기 일쑤였다. 만약 사가 상점에 황궁의 물자를 맡기면 조달 집중제가 되니,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사앵앵의 정직함은 황제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 또한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결국 황제는 사람을 불러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여기에 국새를 찍고 황상皇商을 증명하는 요패를 발급했다. 사앵앵이 임안성 최초의 여황상이 된 것이다.

이로써 사가 상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황실에 물자를 대니 무슨 일을 하든 조정의 허가가 쉽게 떨어졌다. 이로써 사가 상점의 분점은 점점 동월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물론 나중의 이야기지만.

사앵앵은 여전히 궁에서 장사를 했으나 예전의 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예전에는 신기하고 진귀한 것들을 구해와 황후의 환심을 샀지만, 황상이 된 이후로 굳이 힘들일 필요 없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황궁답게 매달 필요한 물건도 어마어마했다. 목재, 약재, 능라 주단, 도자기, 연지, 분첩과 각종 향료, 붓과 먹, 종이, 벼루, 옥석과 비취, 묘목, 꽃씨, 비단잉어, 항아리 등등……. 게다가 황제뿐만 아니라 황가 종실들 또한 집안에 필요한 물건들은 전부 사기 상점에서 구했다. 종실 가문 또한 수백 명에 달하는 식구들이 있었기에 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그렇게 일 년도 안 되어 은자 이십만 냥을 벌어들인 사기 상점은 판로를 넓히고 장사 규모를 점점 더 키웠다. 사기는 예전에 비해 몇 배는 더 장사가 잘 되었다. 임안성과 동월국 전체를 통틀어 그 어떤 상점도 사기와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사앵앵은 마침내 그녀 인생의 꿈을 이루었고, 동월의 제일가는 갑부이자 전설이 되었다. 그녀와 친분을 쌓으려는 고관과 귀인들이 매일같이 우르르 몰려왔다. 황제와 황후마저 그녀를 중시하는데, 감히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그녀가 사장풍과 함께 연회를 나가면 사람들은 그녀를 ‘사 부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사 장군은 여전히 사 장군이었지만, 사앵앵은 사 주인장을 넘어 사 대주인장이라고 사람들이 치켜세워 주었다.

게다가 사 장군 앞에선 고개만 끄덕였지만 사 대주인장이라는 말에는 다들 눈을 반짝이며 공손히 예를 갖췄다. 이품 장군은 적지 않지만, 사 대주인장은 세상에 오직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거물이 된 이후로도 사앵앵의 평판은 여전히 좋았다. 아침저녁으로 거리를 거닐며 친한 사람들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고, 고관이나 귀족들이 그녀를 찾아와도 상냥하게 맞이해 주었다. 일반 백성들과도 흔쾌히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호탕하고 장사를 좋아하는 사앵앵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공로를 인정해 그녀에게 이품 고명부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상으로 금으로 만든 주판도 하사했다. 황제의 하사품을 받은 상인은 아마 사앵앵이 최초이리라.

그녀는 최고급 황화리 나무로 틀을 만들어 그 안에 금 주판을 넣어 사기 상점 본점의 가장 높은 벽에 걸어 두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금 주판을 볼 수 있게 말이다. 이는 그녀가 반평생을 노력해 얻어낸 영예나 다름없었다!

사장풍은 공로를 쌓아 이품 장군이 되었고 사앵앵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품 고명이 되었다. 사앵앵은 사내의 부속품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내가 하는 일이라면 그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모두 이루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사가 상점이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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