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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54)화 (753/1,192)

제754화

황제는 태자와 조회를 마친 뒤, 남서방에 들어가 대신들과 이재민을 구제하고 수해 복구에 관해 상의했다. 복잡한 일들이 한꺼번에 터졌지만, 황제와 태자는 모두 위기의 순간에 더욱 침착해지는 성격이었기에 사안의 경중을 따져 하나하나 처리했다.

우선 각지의 주둔군을 파견해 빠르게 제방을 메우고 곡식 창고를 열어 이재민에게 배포했다. 또한, 각 마을의 순찰을 강화했다. 혼란을 틈타 재물을 약탈하는 이들이 생길 수 있으니,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효과적인 조치가 시행되자 상주서의 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막을 수 있는 구멍들은 전부 틀어막은 셈이지만,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돌이킬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이재민이 정처 없이 각지를 떠돌았다. 이로 인해 사직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고도 거의 비어 있었다.

아무리 유능한 황제라고 해도 텅 빈 창고에서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태자는 짙은 두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황, 지금으로서는 세금 징수를 빌미로 방책을 세워야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듯…….”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안 된다. 백성들이 수해를 입었는데 여기에 세금까지 늘린다면 설상가상이 아니겠느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태자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도성의 부자들은 이미 자발적으로 구호품과 기부금을 헌납했으니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부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황제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가동에게 명했다.

“사 장군을 불러오너라.”

태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황상의 생각을 대충 예상한 듯했다. 사방에 돈을 요구하는 것보단 가장 돈이 많은 집에 손을 뻗는 게 더 나았다. 사실 임안성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주의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사 장군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모두 물러나라고 명한 뒤에 사 장군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밖으로 나온 사 장군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를 떴다. 그가 지나갈 땐 꼭 스산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임무를 완수하기 전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사장풍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 사앵앵은 마침 사봉봉과 은장銀莊을 여는 것에 대해 상의 중이었다. 많은 은자를 벌었으니 다른 은장에 맡기는 것보다 자신의 은장에 보관하는 것이 더 나았다. 자금 유동이 좋아지면 더 많은 일을 계획할 수 있을 터. 어두운 사 장군의 안색에 사앵앵이 물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무슨 일 있어요?”

사장풍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긴 한숨만 내쉬었다. 사봉봉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할 말이 있어 보이자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사장풍은 묵직한 탄식을 내뱉더니 탁자 앞에 앉았다. 사앵앵이 그에게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요. 황상께서 당신을 제방을 짓는 곳으로 파견하신대요?”

사장풍은 고개를 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앵앵은 성격이 급한 탓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 좀 해 봐요. 누구 답답해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사장풍은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사장풍이 이렇게 어려워하는 건 분명 심각한 일이었다. 그녀가 사장풍의 손등에 손을 가져가더니,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우린 부부잖아요. 복이든 재앙이든 함께 짊어져야죠. 우리가 함께 넘지 못할 언덕은 없어요.”

사장풍은 한참을 꾸물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하셨소.”

사앵앵은 정말 의아했다.

“황상께서 당신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고요? 어째서 날 부르시지 않고 당신을 부르셨단 말이에요?”

“난 황상의 신하이니 아무래도 내게 말씀하시는 게 더 편하셨겠지.”

사앵앵이 말했다.

“황상께서 빌려 달라고 하시면 빌려주면 그만이죠. 왜 그리 난감해하는 거예요?”

사장풍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힘들어할까 봐 그렇소.”

“내가 힘들어할 게 뭐가 있어요? 얼마를 빌려 달라고 하시는데요?”

“…이십, 만 냥…….”

사앵앵이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어찌 그런 금액을… 그건 우리더러 죽으라는 말 아니에요?”

사장풍은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이 놀랄 줄 알았소.”

“설마… 벌써 약속한 거예요?”

“…그렇소.”

사앵앵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미쳤어!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주겠다고요? 당신이 번 돈이 아니라고 아까워하지도 않는군요! 사장풍, 그 돈은 내 거예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약속을 해요?”

“당신이 그러지 않았소.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우람한 사내가 불쌍한 척을 하니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이미 약속했으니…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황상이 날 죽일 것이오.”

사앵앵이 성을 내며 말했다.

“그럼 황상더러 죽이라고 해요.”

사장풍은 또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과 붓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글을 쓰려는 듯했다. 사앵앵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지금은 그와 말도 하기 싫었다. 사장풍은 종이를 펼치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앵앵, 다 내 잘못이오. 순간 마음이 약해져 승낙하고 말았소. 당신이 돈을 빌려줄 수 없다 해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 일은 내가 승낙한 것이니, 황상께서 날 죽인다 하셔도 할 말이 없소. 그저 황상께서 당신한테까지 화풀이하시지 않길 바랄 뿐이오. 해서 당신에게 이혼장을 써주겠소. 그게 나와 당신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줄 테니. 후환은 내가 모두 감당하겠소.”

그는 글을 쓰기도 전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앵앵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붓을 빼앗아 바닥에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책임도 당연히 함께 져야죠. 이딴 짓으로 더 열 받게 하지나 말아요! 기껏해야 이십만 냥인데, 집안 재산을 다 탕진하면 그만이죠.”

그녀를 지켜보던 사장풍은 감동이 밀려와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앵앵, 역시 당신은 대의를 잘 아는 사람이오. 사실 황상도 황상만의 고충이 있다오. 백성들이 수해를 입고 전국 각지를 떠도니, 어쩔 수 없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하신 것이오. 그래도 걱정 마시오. 황상께서 이 돈은 꼭 천천히 다 갚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사앵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한패가 되어 그녀를 몰아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도 요즘 나라가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막대한 피해로 그녀 가게의 매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나라의 군주인 황제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보고도 어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사장풍은 무관이지만 마음은 아주 여렸다. 용의주도한 황제가 그를 불러 몇 마디 고충만 털어놓으면 황제의 요구가 무엇이든 사장풍은 분명 전부 승낙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뭘 어찌하겠는가. 이십만 냥과 사장풍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이미 그녀 마음속에 정해져 있는 것을.

* * *

사앵앵이 내놓은 이십만 냥으로 이재민을 적절히 도울 수 있었고 조정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수해 문제가 해결되자 황제도 근심을 덜었다.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다만 사앵앵은 여전히 근심에 잠겨 있었다. 순식간에 이십만 냥을 썼으니, 자금 흐름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절반 가까이 상대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물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가게도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고, 장사도 좀처럼 예전의 활기를 회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앵앵은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황제의 뻔뻔한 핍박을 받긴 했지만, 그 돈으로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도 인정했다. 사직이 혼란스러운 것만큼 큰일은 없으니까. 만약 사회가 줄곧 불안정하다면 그녀의 가게도 더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다.

다만 황제가 돈을 갚기로 약속한 기한은 너무 요원하기만 했다. 매일 이 일만 생각하면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감히 황제에게 빚을 독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그러나 사앵앵은 그리했다. 그녀는 목숨을 내걸고 황제에게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황제를 찾아갔지만, 황제는 늘 말을 얼버무리며 질질 끌었다.

그녀는 화가 났지만 상대는 황제였기에 사이를 망칠 순 없었다. 허나 돈을 빌려준 사람보다 돈을 빌린 사람이 더 떵떵거리며 파렴치하게 굴다니. 낯짝이 성벽보다 두꺼운 황제는 너무도 뻔뻔했다. 그녀가 넌지시 암시를 줄 때마다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척 귀와 입을 닫았다.

다른 이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서로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사앵앵의 등은 땀으로 흥건했다.

황제는 사앵앵이 그 일을 들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다가 능수능란하게 맞받아쳤다. 결국 사앵앵은 매번 별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들추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녀 대신 말해 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사봉봉을 데리고 함께 입궁했다.

가마에서 내린 모녀는 승덕전 밖에 서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사봉봉은 나이는 어렸지만 눈치가 빨랐다. 누군가 복도에 나타난 것을 발견한 그녀는 황급히 몸을 숙이며 사앵앵에게 말했다.

“어머니, 배가 아파요. 측간에 다녀와야겠어요.”

사앵앵이 물었다.

“어디 있는지 아니? 아니면…….”

사봉봉이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많이 와 봐서 어딘지 알아요.”

말을 마친 뒤, 그녀는 허리를 움츠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허리까지 굽히자 사앵앵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졌는데 아무도 없으면 황제를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황제에게 빚을 독촉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인데, 괜한 꼬투리까지 잡히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잠겨 있는 그녀의 시야에 붉은 바탕에 노란 용무늬가 새겨진 옷자락이 들어왔다. 황제일 거라는 생각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태자였다.

열다섯이 된 태자는 이미 성인이 되어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아직은 앳된 얼굴에 맑은 눈망울을 가졌지만, 황제보다 더 웃음이 적었기 때문에 괜스레 태자 앞에서는 더 겁이 났다. 황제에게는 이따금 적당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태자 앞에서는 늘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민부民婦,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태자는 뒷짐을 진 채 담담히 대꾸했다.

“예를 갖출 것 없소. 사 주인장, 또 황상께 빚을 독촉하러 왔소?”

황제가 그녀에게 이십만 냥의 빚을 진 건 비밀이었지만 태자는 알고 있었다. 사앵앵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제가 어찌 감히… 민부는 황상께 가르침을 청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태자가 말했다.

“그렇군. 본궁이 나올 때, 부황께서 주인장을 들라 하셨소. 어서 들어가 보시오.”

사앵앵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짧게 대답을 올렸다. 그가 발걸음을 옮긴 뒤에야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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