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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51)화 (750/1,192)

제751화

어느새 복숭아는 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냇물에서 복숭아를 깨끗이 씻은 뒤,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하나씩 먹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황제와 황후를 모시는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대체 체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나같이 복숭아를 베어 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다니. 군주도 군주답지 않고 신하도 신하답지 않으며 노비마저 노비답지 않았다. 청양 공주는 자신의 복숭아를 영안의 것과 비교했다.

“이것 봐, 내 것이 더 크지.”

영안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비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겁니까?”

청양 공주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비교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하지만 오늘 기분도 좋으니 영안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맞다, 아까 내 다리를 걸고 넘어뜨렸을 때,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던데. 나 좀 알려 줘.”

“안 됩니다.”

“안 가르쳐 주면 아버지한테 이를 거야.”

영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분인데, 어찌 이런 작은 일에 관여한단 말인가……. 청양 공주가 재빨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 아버지께도 이를 거야.”

“…….”

이렇게 비겁한 협박을 하다니… 정말인지 한 번 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었다.

살구나무 숲 근처에서, 사앵앵은 길가의 목패木牌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늦췄다. 그녀가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상, 감히 청을 드리옵건대, 부디 한 말씀만 적어 주십시오.”

황제가 고개를 들고 목패를 바라보았다. 정교하게 조각된 아름다운 목패였다. 둘레에는 각종 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필시 묵보墨寶(보배가 될 만한 좋은 글씨)를 쓰는 곳이리라.

그는 담담히 사앵앵을 바라보았다. 역시 타고난 장사꾼이 틀림없었다. 그에게 묵보까지 남기게 하다니. 황제의 묵보가 있으니 분명 더 많은 여행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터.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황후도 즐거워하니 짐이 몇 글자 적어 주겠네.”

붓과 먹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앵앵은 곧장 늑대의 꼬리털로 만든 붓을 가져와 황제에게 전해 주고는 옆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황제는 붓에 먹을 묻히고 잠시 고민하더니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수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인간은 그림 속을 노니네.」

어릴 때부터 글을 써온 황제는 막힘이 없었다. 손목을 몇 차례 움직이며 단번에 글자를 써 내려가더니 용이 승천하듯 힘이 넘치는 글이 완성되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하나둘 박수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백천범은 눈이 초승달이 될 만큼 활짝 웃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군은 전투면 전투, 통치면 통치 뭐든 다 잘했다. 거기에 미꾸라지도 잘 잡고 글까지 잘 쓰다니. 그녀마저 어깨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청양 공주는 조금 샘이 났다. 글은 그녀도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사 주인장, 나도 하나 쓸게요.”

사앵앵은 애당초 존귀한 손님들의 글을 받기 위해 목패를 준비해 두었다. 공주가 자발적으로 글을 쓰겠다니! 그녀도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서둘러 또 다른 붓을 가져와 그녀에게 주었다.

“공주 전하께서도 한 말씀 남겨 주시지요.”

목패가 너무 높게 걸려 있어 키가 닿지 않자 황제가 공주를 안아 올렸다. 공주는 황제 품에 안긴 채 한참을 고민하더니 붓을 들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청양 왔다 감.」

아주 예쁜 글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획 한 획 공을 들여 적어 내려갔다. 지켜보던 이들은 결국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월의 장공주가 고작 이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된다니. 누가 백천범의 친딸 아니랄까 봐, 그녀와 판박이였다. 청양 공주가 고개를 들어 황제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때요?”

황제는 공주를 내려놓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훌륭하구나.”

황제는 부인을 목숨처럼 아끼는 만큼 딸도 아꼈다. 그러니 당연히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훌륭하다는 황제의 칭찬이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청양 공주를 칭찬했다. 성 황자만 조용히 입을 삐죽거렸다. 다들 눈이 잘못된 것 아니야? 저게 어째서 훌륭하다는 거야?

성 황자는 모든 분야에서 청양 공주를 이기지 못했지만, 글을 쓰는 것만큼은 묵용청양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온 것이다.

“사 주인장, 나도 쓸래요.”

“예, 좋습니다.”

사앵앵은 눈이 감길 만큼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황실의 묵보라면 많을수록 좋았다. 성 황자도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산자락의 붉은 계곡에 푸른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스친다. 시내에 벗은 발을 담그니 산야에 정취가 더해지는구나.」

제법 훌륭한 글귀였다. 어렴풋이 풍류도 보이고 꽤 멋들어졌다. 적어도 청양 공주의 글보다는 뛰어났다. 그는 칭찬을 바라고 기대감이 담긴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시큰둥하게 한 마디 내던졌다.

“압운押韻이 맞지 않다.”

이내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앞으로 걸어갔다. 성 황자는 정말 심란했다. 왜 청양 공주에게는 뭐든 잘한다고 하고, 그에게는 뭐든 다 못한다고 한단 말인가. 글자부터 내용까지 청양 공주의 것보다 그의 글이 훨씬 나은데. 황제는 천하를 다스릴 땐 늘 공평했지만, 그에게만은 불공평했다.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사봉봉이 그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전하, 가시어요.”

사봉봉을 보자 마음속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날 안 좋아해도 상관없어. 누이가 있으니깐.’

* * *

오수산장은 규모가 너무 커서 하루 만에 다 즐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제는 유독 즐거워하는 백천범의 모습을 보고 아예 이곳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어차피 조정에는 태자가 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궁 밖에서 묵는 건 괜히 들뜨고 신나는 일이었다. 궁에서는 궁문을 나서도 여전히 또 다른 궁문이 놓여 있었다. 고개를 들면 늘 처마 끝에 달린 동물 형상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문을 나서면 곧장 자연이 펼쳐졌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조차 상쾌했고 가득 차오르는 행복감 또한 궁 안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정취가 남달랐다. 황제는 오후에 백천범과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꿩과 토끼를 사냥했다. 반은 삶고, 나머지 반은 구우니 맛있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자극했다.

아이들은 불 앞을 지키며 맛있는 고기가 다 익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에 미꾸라지 튀김과 제철 반찬까지 더해졌다. 궁에서 먹는 어선처럼 정갈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산지에서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해 먹으니 더없이 즐겁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궁 밖에 나왔으니 방 안에 틀어박혀서 먹을 순 없었다. 사앵앵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변으로 기다란 식탁을 펼쳤다. 앉아서 먹고 싶은 사람은 원하는 곳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것을 먹어도 되었다.

이곳에서는 규율이 없는 것이 규율이었다.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즐겼고 아이들은 사발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사발에는 산장에서 직접 만든 향긋한 곡주가 담겨 있었다. 맛이 달콤해서 아이들도 좋아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주 조금씩만 맛보게 해 주었다. 많이 마셨다간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영안은 사발을 든 채 멀찍이 떨어진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자신의 존재감을 숨겼다. 자칫 잘못하면 청양 그 미치광이 계집의 시선을 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열한 살이 되었으니 그 또한 자신만의 고민이 있었다. 태자는 수위영戍衛營을 짓고 재능이 뛰어난 어린 인재들을 선발하고 있었다. 그 또한 선발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청양 공주의 놀이 동무이기 때문에 공주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어느 곳도 갈 수 없었다.

도민都敏 대인의 아들 도곽都霍은 그와 동갑인데 이미 태자에게 선발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금빛 갑옷을 입고 있는 도곽을 본 적 있는데… 정말 부러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수위영에 들어가고 싶다고 떼를 써보았지만, 영 대인은 그더러 청양 공주에게 직접 말해 보라고 했다. 청양 공주만 동의하면 어디든 가도 좋다면서.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자 묵용청양은 벼락을 맞은 듯 처참한 표정을 짓더니 분노와 상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안, 어찌 그리 매정해? 날 내팽개칠 수 있어? 혼자만 가서 즐기겠다고?”

즐기다니…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는 늘 최고의 시위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께선 이품 시위가 되어 이미 시위 중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보다 뛰어난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훗날 그 또한 이품 시위가 되어 시위들 중 가장 뛰어난 자가 되고 싶었다.

매정하든 어떠하든 다 상관없다. 그저 청양 공주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생각해 보면 참 서글펐다. 자신과 동갑인 소년은 이미 공명을 떨치고 있는데 그는 온종일 청양 공주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해야 한다니……. 정말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는 묵용청양과 함께 지내면서도 이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공주는 가 대인처럼 나이만 먹을 뿐, 좀처럼 지혜는 기르지 못했다. 지금도 가 대인은 날마다 소타와 어울려 놀지 않는가.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게 덕이라지만, 그녀는 동월의 장공주가 아니던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게다가 이제 열 살이 되었으면 남녀유별을 알 법도 한데, 늘 이렇게 함께 어울려 다니니. 정말 황상이 혼인이라도 명할까 봐 걱정이었다. 만약 그리 된다면 그는 차라리 머리를 박고 죽음을 택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는 한쪽 다리를 굽히고 무릎에 사발을 올려놓은 채, 어둠이 내려앉은 산자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 그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몸놀림이 재빠른 영안은 순식간에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사발에 담겨 있던 곡주가 흘러넘쳐 그의 손을 축축하게 적셨다. 뒤이어 고소해하는 청양 공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랐지?”

영안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꾸하기도 성가셨던 그는 다시 바위에 올라가 앉았다. 묵용청양이 굳이 영안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조금만 옆으로 가 봐, 나도 좀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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