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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50)화 (749/1,192)

제750화

백천범은 냇물에 발을 담가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아 종아리까지 물에 잠겼다. 다리 사이로 물살이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찬란한 햇빛을 맞으며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이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흘러가자 백천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실은 바람이 아니라 자유로운 기분이 좋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궁 안에도 미꾸라지를 잡는 곳이 있었다. 황제가 특별히 그녀가 놀 수 있게 개천을 파서 미꾸라지를 풀어놓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문밖으로만 나오면 궁녀와 태감이 겹겹이 그녀를 에워싸고 휘장까지 내걸었다. 그녀가 물에 들어간다면 아마 모든 이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볼 터. 수십 개의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데 그녀가 어찌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는가. 넘어지는 건 고사하고 그녀가 몸을 조금만 휘청거려도 누군가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드러내고 어망을 든 채 물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목표물을 정해 곧장 어망을 들이밀자 자그마한 미꾸라지가 팔딱대며 어망에 걸렸다. 백천범은 미꾸라지를 통 안에 넣고 웃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잡는 건데도 실력은 그대로죠?”

황제가 사랑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하오. 난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꾸라지가 정말 많았는데, 두 사람이 물에 들어오자 다들 어디론가 숨어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몇 차례나 어망을 물에 담갔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고개를 저으며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저쪽이요, 어서요. 저기 한 마리 있잖아요.”

백천범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까만 점을 가리켰다. 큰 목소리에 혹여 미꾸라지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목소리까지 낮추고 황제에게 위치를 알려 주었다. 황제는 황급히 몸을 돌려 어망을 치려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철퍼덕 물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엄청난 물보라가 일었고 백천범은 푹 젖은 황제의 모습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황제는 물속에 앉아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자신의 어린 부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웃다가도 자신만 나타나면 곧장 몸을 숨겼다.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지만, 그녀의 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제 더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로의 역할을 바꾸기라도 한 듯, 지금은 오히려 그가 두려웠다. 그가 그녀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 황궁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사실 그녀에게 황궁은 화려한 새장에 불과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그 안에 가두었다.

그녀가 여전히 바깥세상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는 건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처마 밑에 가만히 서서 날아가는 새를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그녀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궁은 그녀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속박했다. 그는 그녀가 궁에 적응하려 애쓴다는 걸, 서 태후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백천범에게 그런 삶은 행복한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활짝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넋을 놓고 한참이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가동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구야, 난 마음이 영 편치 않다. 마마께서 너무 고달프시잖냐.”

영구도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이하다는 듯 물었다.

“마마께선 활짝 웃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가 고달프단 말입니까?”

“밖에 나오셔야만 저리 활짝 웃으시니깐 그렇지. 궁에서 언제 한 번이라도 저렇게 웃으신 적이 있기나 해?”

영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동의 말이 맞았다. 백천범은 황궁에서 십 년이나 머물렀지만, 여전히 궁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다. 그저 궁 안에 자신의 부군과 아이들이 있으니 그녀 또한 그곳에 머무르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저녁에 근무를 마치면 궁을 나오잖아. 거리를 마음껏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마마는 그것조차 힘드시니까.”

가동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우리가 더 낫지.”

영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화는 입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황상의 귀에 들리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가동은 영구의 꾸지람에도 전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산비탈에 핀 야생화를 바라보았다.

“난 우리 딸한테 줄 꽃을 좀 꺾어야겠으니 영 대인 혼자 잘 지키고 계시지요.”

말을 마친 가동은 비탈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영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동은 나이를 먹어도 소타와 정신 연령이 비슷했다. 어쩐지 두 부녀가 쿵짝이 잘 맞더라니.

그는 다시 황제와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후는 황제의 얼굴에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용포와 봉포를 벗어던진 채 배시시 웃으며 장난을 주고받았다. 지금 저 둘은 황제와 황후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부부일 뿐이었다.

영구는 줄곧 황후 마마가 욕심도 많지 않고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황상이 줄 수 없는 것… 바로 자유였다.

황상이 황후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황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무한한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자유만큼은 얻지 못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설령 아무리 존귀한 황제와 황후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반 시진 동안 황제와 황후는 제법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작은 나무통에 미꾸라지가 가득 담겨 있었고, 드렁허리도 몇 마리 있었다. 백천범이 기뻐하며 말했다.

“점심에는 기홍에게 미꾸라지 튀김을 하라고 해야겠어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생각만 해도 입에 절로 침이 고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 이건 기홍에게 맡기고 당신은 어서 목욕부터 하시오. 그러다 풍한이 들 수도 있소.”

청죽 아래 지어진 가옥에는 욕탕도 있었다. 냉탕과 온탕 중 원하는 대로 골라 쓰면 되었다. 황제와 백천범은 함께 온탕에 몸을 담그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는 마시지 않아도 절로 취하는 좋은 술 같았다. 기분이 좋았던 백천범은 웃으며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서방님, 오늘 정말 즐거워요.”

그녀가 자신을 서방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황제는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그가 물속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쳤다.

“이곳이 마음에 드오?”

“그럼요!”

“정말 즐겁소?”

“너무 너무 즐거워요!”

“하면 당신도 이 지아비를 즐겁게 해 주시오.”

“…아,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뒤이어 사방으로 물이 튀는 소리가 나더니 희미하게 거친 숨소리도 들려왔다…….

* * *

백천범은 사앵앵이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수산장에서는 미꾸라지를 잡는 것 말고도 나무에서 과일을 딸 수도 있었다.

마침 여름 복숭아가 나는 계절이라 나무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복숭아가 빼곡히 달려 있었다. 임안에서 유명한 백도였다. 하얀 껍질에 옅은 붉을 빛을 머금은 복숭아는 상큼한 향을 마구 뿜어냈다. 보기만 해도 절로 군침이 돌 정도였다.

나무에 오르는 건 백천범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어릴 때부터 익혀 온 것이기 때문에 몸이 절로 기억했다. 묵용청양이 나무에 오르는 것도 그녀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두세 살쯤 됐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나무에 올랐으니, 그녀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모녀는 나무 위에 높이 달린 복숭아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더니 환호를 내지르며 나무 위로 올라갔다. 황제는 손에 땀을 쥐었다. 미꾸라지를 잡는 것까진 괜찮았지만, 나무에 오르다니……. 자칫 잘못하다 살갗을 베일 수도 있었다.

부인과 딸을 애지중지 아끼는 그는 그들을 지켜보며 계속 마음을 졸였다. 활짝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사앵앵은 조용히 사장풍에게 말했다.

“어때요, 마마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했죠?”

사장풍이 말했다.

“마마께서는 기뻐하시지만, 황상께서는 초조해하시는구려. 당신이 마마의 취향을 잘 알고 그리 애를 썼으니 마마께서는 물론 좋아하실 테지.”

“마마만 좋아하시는 게 아니에요. 도성의 관료들과 귀족들도 다 좋아할 거예요. 황상께서 미꾸라지를 잡으시고, 공주께서 사슴에게 먹이를 주시고, 마마께서 나무에 올라 과일을 땄다는 게 알려지면… 두고 봐요. 모든 사람이 따라 하려고 할 거예요! 그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황을 이룰 앞날을 그려 보았다. 정말이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황제와 황후의 환심을 사고 오수산장에 그들을 초대한 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개점 행사였다. 역시 이번에도 사앵앵은 머리를 잘 굴렸다.

황제와 황후는 늘 황궁에서 지내야 하므로 일반 백성들은 쉽게 만나지 못했다. 황제와 황후가 이곳 오수산장에서 놀고 간 걸 안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따라 하려 할 것이다. 황제와 황후가 걸었던 길을 걷고 공주처럼 사슴에게 먹이를 먹이며 마마가 올랐던 나무에 오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백천범과 청양 공주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복숭아를 따서 밑으로 던졌다. 나무 아래에서 몸이 날쌘 영 대인과 가 대인이 복숭아를 받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복숭아는 단 하나도 없을 만큼 완벽했다.

청양 공주는 신이 나서 복숭아를 마구 던졌다. 가 대인이 복숭아를 소매에 문질러 가소타에게 먹이는 걸 발견한 청양 공주는 자신도 복숭아를 따서 소매에 쓱쓱 문지른 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청양 공주를 수행하는 조 마마嬷嬷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가 좋게 타일렀다.

“공주 전하, 씻은 다음에 드셔야 합니다.”

“괜찮아요.”

청양 공주가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지저분한 것만으로는 병이 생기진 않는다고요. 소타도 먹잖아요.”

조 마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주 전하께선 금지옥엽이 아니십니까. 가소타와 비교하시다니요?’

하지만 옆에 있는 황후 마마도 나무 위에서 복숭아를 베어 먹고 있었다. 조 마마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됐다, 됐어. 어머니인 황후 마마께서도 저리 하시는데 어찌 딸이 하지 않길 바라겠는가?

궁에서 이십여 년을 지내며 천신만고 끝에 일급 마마까지 올라왔다.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원칙 덕분이었다. 규율은 한 자루의 자와 같아서 모든 이들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규율이 아무 소용없었다. 특히 황후와 공주에게 그러했다.

황후와 공주가 원숭이처럼 나뭇가지에 앉아서 과일을 따먹는 모습은 정말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역대 황조에서는 볼 수 없던 이런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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