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9화
정양절이 막 지난 어느 날, 동쪽 성문으로 마차 세 대가 빠져나왔다. 여러 명의 수하가 마차 주변을 지켰다. 보아하니 귀족들이 성 밖으로 놀러 가는 듯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중간 마차가 흑단黑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마차는 은색 천장에 노란색 덮개, 붉은 휘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차를 이끄는 말 또한 전부 덩치도 크고 빼어난 자태를 자랑했다. 이런 비범한 분위기라면, 분명 엄청난 신분을 가진 자가 타고 있을 것이다.
사실 마차에 탄 사람은 황제와 황후, 청양 공주와 성 황자였다. 그들은 사앵앵의 초청을 받고 산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선두를 달리는 마차에는 사앵앵 일가가 타고 있었고, 맨 끝에서 뒤따라오는 마차에는 기홍과 녹하가 아이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물론 영구와 가동은 말에 오른 채 수행원 역할을 했다.
청양 공주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발을 들어 올려 바깥을 구경했다. 길가에 세워진 문방을 보고 산장에 도착했다는 걸 알아차린 청양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 왔어요, 다 왔어요. 여기가 오수산장이래요!”
황제의 품에 반쯤 기대고 있던 백천범은 청양 공주의 말에 서둘러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오수산장이라고 적힌 글씨를 보니 더없이 감개무량했다.
강남에서의 일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안쪽으로 보이는 정자와 누각, 작은 다리와 개천까지……. 전부 강남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 감정이 격해진 그녀는 한편으로 조금 슬프기도 했다.
강남에서의 나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당시에는 생계를 이어가느라 근심이 끊이질 않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힘들게 일한 뒤 얻었던 보람은 앞으로 다시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다들 마차에서 내렸다. 녹하와 기홍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강남은 두 번째 고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비록 강남에서 지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들에겐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사앵앵이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황상, 마마, 경치가 어떠신지요?”
황제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치켜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게서 절로 군왕의 기개가 풍겼다. 그는 말을 할 때도 늘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그녀는 흥분된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예뻐. 앵앵아, 넌 정말 대단하구나. 강남의 풍경을 북방으로 옮겨 오다니. 이렇게 큰 공사를 했으니 분명 어려움이 많았을 테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사앵앵이 말했다.
“아버지께 가장 훌륭한 화공을 찾아 오수진의 풍경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그림을 조금 손봐서 목공들에게 산장을 지어 달라고 했고요.”
“그리 간단히 말해도…….”
백천범이 감탄해 마지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하기까진 분명 어려움이 컸을 거야.”
그때 저쪽에서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리며 연못에 물보라가 일었다. 커다란 물고기를 발견한 청양 공주가 연못에 돌을 집어 던진 것이다. 백천범이 청양 공주를 말렸다.
“물고기는 이렇게 잡는 게 아니야. 낚싯대로 낚든 물에 내려가 어망으로 잡아야지. 돌을 던져선 안 돼.”
청양 공주가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낚시를 해보셨어요?”
“낚시뿐이겠니, 직접 물에 들어가서 잡기도 했지.”
사앵앵이 끼어들었다.
“마마께선 아마 아직도 미꾸라지 잡는 걸 가장 좋아하시죠? 오수진에 계실 때 미꾸라지를 아주 잘 잡으셨잖아요.”
묵용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어째서 미꾸라지를 잡으신 거예요?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미꾸라지를 잡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었거든. 돈이 없으면 밥을 굶어야 하는데, 옷이 더러워지는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었겠니?”
황제는 그녀가 그때의 일을 꺼낼 때마다 듣기 힘들었다. 분명 백천범은 즐거워했지만, 그는 가슴이 시큰거렸다. 따지고 보면 전부 다 그의 잘못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어찌 미꾸라지를 잡으며 살았겠는가?
성 황자는 계급에 대한 인식이 누구보다 강했기에 입을 삐죽거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설마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드실 밥도 마련하지 못하셨겠어요? 어떻게 하찮은 이들이나 하는 걸 어머니께서 하신 거예요?”
청양 공주가 손을 들어 성 황자의 머리를 때렸다.
“어머니께서 뭐라고 가르쳐 주셨어? 나쁜 사람이랑 좋은 사람을 나눌 수는 있어도 귀하고 천한 것으로 사람을 구분 지어선 안 된다고 하셨잖아. 대체 누가 하찮은 이들인데? 어머니가 하찮다는 거야?”
청양 공주의 손이 어찌나 매운지 성 황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성 황자가 희번덕거리며 쳐다보자 청양 공주도 매서운 눈빛으로 맞섰다.
“잘못한 것도 모르고 감히 눈을 부라려?”
또다시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묵용성은 몸을 움츠리더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성 황자는 말부터 하고 뒤늦게 잘못을 깨닫는 편이었다. 평소 청양 공주가 사람들 앞에서 그를 때린다면 어머니가 분명 제지했겠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잘못했다는 의미였다.
그는 황제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어두워진 황제의 안색에 깜짝 놀란 성 황자는 기지를 발휘해 사봉봉 뒤에 숨었다. 여기에 그를 지켜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아마 사봉봉밖에 없을 것이다. 사봉봉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겁낼 것 없다는 의미였다.
밝은 햇살 아래, 꼬마 숙녀의 미소는 성 황자에게 일종의 치유였다.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흥, 아버지는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셔도 이렇게 아껴 주는 누이가 있는데 뭐.
그는 사봉봉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앞서 걸어가는 청양 공주의 도적 같은 몰골을 보니, 정말인지 그와는 팔자부터 상극인 듯했다. 성 황자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하필 저런 공주와 남매란 말인가. 그것도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라니!
그는 이렇게 고상하고 훌륭한데, 묵용청양은 꼭 시골 촌뜨기 같았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그녀 곁을 따르는 이들도 비슷했다. 전병처럼 둥근 얼굴의 가소타는 바보처럼 어수룩했고, 사금언은 꼭 무뢰한 같았다. 유일하게 영안만 멀쩡했다.
하지만 묵용성은 영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영안은 늘 묵용청양 곁에서 떨어지고 싶어 했다. 번번이 실패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묵용청양의 뒷배가 너무 든든해서 그 누구도 감히 밉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자신과 봉봉 누이가 나았다. 자신과 봉봉 누이는 뜻이 잘 맞는 청매죽마가 아니던가. 누이는 저런 촌스러운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깔끔한 차림새로 남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들고양이처럼 이리저리 미쳐 날뛰는 묵용청양과는 전혀 달랐다.
앞서 걷던 묵용청양은 새끼 사슴을 보더니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서둘러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사슴을 이쪽저쪽으로 몰았다. 깜짝 놀란 사슴은 쩔쩔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공주의 충실한 짝인 사금언도 나뭇가지를 꺾어 사슴몰이에 합류했다. 자연스레 가소타도 그 뒤를 이었다. 세 아이는 시시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더니,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사슴 주변을 에워쌌다. 놀란 사슴들은 울음소리를 내며 혼비백산 날뛰었다. 차마 지켜볼 수 없던 영안이 청양 공주 앞을 막아섰다.
“그만 쫓아요. 새끼 사슴을 못살게 구는 게 뭐 그리 재미있다고.”
묵용청양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자 검은 손자국이 남았는데, 꼭 산적 우두머리의 이마 주름 같았다. 한창 신나게 노는데 앞을 가로막다니! 청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야? 지금 저것들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거야?”
영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서다니, 무얼 나선단 말인가? 청양 공주의 발상은 늘 특이했다. 무얼 하든 승부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누군가와 싸우는 걸 제일 좋아했다.
성 황자는 어릴 때부터 줄곧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영안은……. 어쨌든 그 또한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껏 그녀의 놀이 동무로서 연무장에서는 그녀를 제법 많이 이겼을지라도, 암암리에 적잖이 손해를 보기도 했다.
청양 공주는 본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덤벼. 이기는 사람이 사슴을 갖는 거야.”
영안이 목을 내빼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은 다들 경치를 구경하느라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리를 걸어 청양 공주를 넘어뜨린 뒤, 팔로 힘껏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내 빠르게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끝. 공주가 졌어요.”
묵용청양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영안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도망쳤다. 사금언이 청양 공주를 일으켰다.
“누이, 안 아파요?”
청양 공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아직도 사슴을 쫓는 가소타에게 소리쳤다.
“됐어, 그만해. 내버려 둬.”
그녀는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공주였다.
사앵앵이 미꾸라지 이야기를 꺼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앞쪽에 있는 계곡에 열 통 넘는 미꾸라지를 방생한 것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물 밖에서도 미꾸라지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다. 흙이 있는 계곡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렸고, 이따금 기포가 올라왔다.
다들 물에 들어가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다는 말에 백천범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절히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황제는 절로 웃음이 났다. 그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당신을 따라 나온 것이니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도 좋소.”
한 차례 환호성을 지른 백천범은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곧장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치마를 바라본 그녀는 또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 예전에는 사내아이 복장을 하고 미꾸라지를 잡았지만 지금은 화려한 황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미꾸라지를 잡기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사앵앵은 이런 것까지 다 예측하고 있었다. 그녀가 앞쪽 청죽 사이에 가려진 가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마, 물에 들어갈 때 필요한 것들은 저곳에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망과 물통도 있지요. 우선 저곳에서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백천범은 신이 난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고, 황제도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 함께 옷을 갈아입었다. 어렵사리 이런 기회를 얻었으니 그 또한 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