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47)화 (746/1,192)

제747화

묵용성이 떠나자 가난청이 웃으며 말했다.

“태자 형님, 성 전하와 사 누이는 청매죽마시니, 어쩌면 훗날 성 전하께서 황후 마마께 혼인하겠다고 떼를 쓸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사 누이는 태자 형님의 제수이자 한 식구가 되는 것인데… 지금 이렇게 사 누이를 농락하면 나중에 어찌하시려고요?”

묵용린이 코웃음을 쳤다.

“일개 장사꾼의 딸이 감히 황실을 넘봐? 꿈 깨라지!”

영항에 다다르자 그를 발견한 십칠이 불쑥 나타났다.

“전하.”

묵용린이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떠하냐?”

“사씨 아가씨께선 안에서 책을 읽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묵용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두운 방에 갇혀선 팔자 좋게 책을 읽다니. 그는 문틈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희미한 불빛이 가냘픈 몸집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에 촛불 빛이 아른거렸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운 모습이 어쩐지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십칠에게 물었다.

“누가 촛불을 켜 주었느냐?”

십칠이 답했다.

“아가씨가 직접 불을 붙이셨습니다. 화절자를 지니고 계시던걸요.”

묵용린이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침착하고 신중하구나. 사내였다면 조정 관리가 되었을 텐데, 하필 계집일 게 뭐람. 심사가 배배 꼬여서 들여다볼 수 없어. 저리 꾀가 많은 여인은 딱 질색이다.”

가난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태자의 속내를 다 알고 있었다. 겉으론 사봉봉을 싫어하는 듯 보였지만 이제 보니 남원의 여제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궁 안에서 유일하게 가난청만이 태자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세 살 때부터 태자의 곁을 지켰으니 그가 묵용성보다 더 태자와 친형제 같았다.

태자는 묵용성에게 늘 호통을 쳤지만, 가난청은 살뜰히 챙겨 주었다. 더울 땐 땀을 닦아 주었고 추울 땐 콧물을 닦아 주며, 늘 그림자처럼 함께 붙어 다녔다. 가난청 역시 제 이야기를 태자에게 솔직히 말해 주었고, 태자 역시 제 모든 걸 가난청에게 말해 주었다.

가난청에게 태자는 완벽한 황태자였다. 태자는 입이 무겁고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일을 처리했다. 백성에게는 한없이 인자하지만, 적에겐 흉악했다. 약점이라곤 거의 없는 자였다. 굳이 약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어릴 때부터 그를 늘 따라다니던 악몽 정도랄까.

가난청의 식견으로는 도저히 악몽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그저 일종의 무술巫術일 거라고 추측만 할 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오랜 시간 머릿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매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면, 악몽은 평소보다 더 자주 태자를 괴롭혔다. 자연스레 태자의 감정 변화도 더 잦았다. 하지만 자제력이 강한 그는 겉으로 조금의 티도 내지 않았다. 오직 가난청만이 태자의 가슴 속에 이는 불덩이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태자가 사봉봉을 처벌한다고 했을 때,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은 것이다. 가난청은 이번 일이 사봉봉에게 불공평한 처사였다는 걸 알았지만 태자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

태자는 뒷짐을 진 채 꼿꼿이 서서 생각에 잠겼다. 원하던 대로 사봉봉을 혼내 주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그리 통쾌하지 않았다. 그가 상상했던 결과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벌벌 떨며 눈물 콧물을 다 쏟고,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실제 면모를 드러내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실망이었다.

사봉봉은 울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편안한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힘껏 주먹을 날렸건만, 간지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대의 모습에 정말이지… 기분이 언짢았다. 두 시진 가까이 가둬 놓아도 이 모양인데, 반 시진 더 가둔다고 달라질 건 없을 듯했다. 그는 손을 내저어 십칠에게 문을 열라는 표시를 보냈다.

끼익, 하는 소리에 사봉봉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묵용린이 물었다.

“본궁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이냐?”

사봉봉이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제가 왜 놀라야 합니까?”

묵용린은 순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누가 널 이곳에 가두었는지 알고 있느냐?”

“물론 태자 전하이시겠지요.”

그녀가 단번에 알아맞히자 묵용린은 조금 뜻밖이었다.

“어째서 본궁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간 궁을 오가며 다른 이들에겐 한 번도 원한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지난번 제 부주의로 전하의 화원에 들어갔다가 전하께 미움을 산 일이 유일하지요. 고민 끝에 절 이곳에 가둘 분은 전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묵용린도 더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본궁은 황태자다. 누구든 잘못을 저질렀으면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법이지.”

“봉봉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봉봉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의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묵용린은 제법 괜찮은 그녀의 태도에 오만한 얼굴로 턱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그만 가 보거라.”

사봉봉은 물건을 챙긴 뒤, 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태자가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바깥 사람들에게 어찌 이야기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사봉봉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뒷산 숲에서 길을 잃어 늦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묵용린은 공손한 그녀의 태도에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만 돌아가라는 뜻을 내비쳤다.

* * *

영항에서의 일을 통해 열 살 소녀인 사봉봉은 자신이 태자의 미움을 샀다는 걸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자가 그녀를 미워하는 감정의 근원까진 알지 못했다.

장차 태자가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될 텐데, 어찌 군주의 눈엣가시가 될 수 있을까.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삶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사봉봉은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황제의 미움을 산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황태자의 마음은 너무 깊고 심오해서 지금의 그녀로서는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마주치는 횟수를 줄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태자도 그녀의 존재를 잊을지도 모른다.

그 후, 어머니가 궁에 보내려 할 때마다 그녀는 늘 핑계를 대며 거부했다. 사앵앵은 의아한 마음에 사장풍에게 물었다.

“봉봉이가 영 궁에 가려 하질 않아요. 혹 성 전하와 말다툼이라도 한 건 아닐까요?”

사장풍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봉봉이가 다른 이와 말다툼할 성격이오? 그것도 성 전하와 말이오. 봉봉이가 어찌 그 정도 사리도 분별할 줄 모르겠소?”

사앵앵의 생각도 그러했다. 자신의 딸은 누구보다 성격이 좋았다. 그런 애가 말다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사장풍의 생각은 그녀와 조금 달랐다.

“봉봉이도 조금 컸으니 남녀유별을 아는 것일 테지. 한데 성 전하가 매번 자신과 같이 놀려 하고 좋아하는 기색을 내비치니 단칼에 거절하기 어려워 숨는 것일 게요.”

사앵앵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우리 봉봉이는 성 전하를 안 좋아한다는 거예요?”

사장풍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애들이 몇 살이나 됐다고 그런 걸 알겠소. 열다섯은 되어야 연정에 눈을 뜨기 시작할 테지. 지금 봉봉이는 생각이 트여서 사내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아선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뿐이오.

참 잘된 일이 아니오? 금언이와는 전혀 딴판이니……. 금언은 청양 공주 얘기만 했다 하면 헤벌쭉 웃는 게… 장차 부마 경선에 넣어 달라고 청해야 하는 건 아닌지 정말 고민이오.”

사앵앵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금언이는 청양 공주를 감당하지 못해요. 고생길이 훤하다고요. 부마 생각은 접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성 전하는 성격도 좋고 봉봉이에게도 잘해 주니 사위로 들이기에는 괜찮을 것 같아요. 물론 봉봉이도 좋아한다면요. 봉봉이가 원치 않으면 그 생각도 접을 거예요. 어쨌든 둘 다 아직 어리니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 * *

결국 사앵앵은 봉봉 대신 입궁을 했다. 묵용성은 사봉봉을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매번 사앵앵만 입궁할 뿐이었다. 그는 실망스러운 마음에 사앵앵에게 캐물었다.

“사 주인장, 어째서 누이는 궁에 오지 않는 거예요? 병이라도 났습니까?”

초조해하는 성 황자의 모습에 사앵앵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누가 함께 자란 청매죽마 아니랄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이 조금 감동이기도 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병이 난 건 아니지만, 가게가 바빠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성 황자가 항의하듯 말했다.

“누이가 일을 잘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잖아요. 너무 힘들게 일을 시키면 안 돼요.”

사앵앵이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예, 전하. 돌아가서 푹 쉬라고 하겠습니다.”

사봉봉도 평생 입궁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태자가 황제와 함께 봄 순시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녀는 입궁하여 황후 마마께 문안을 드렸다. 그녀를 본 묵용성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질 줄 몰랐다.

황후는 그녀에게 식사하고 갈 것을 권했고 성 황자는 그녀에게 붙어 정성껏 요리를 덜어 주었다. 청양 공주가 그런 그를 비웃었다.

“성아, 그리 정성을 다하다니. 나중에 사 누이를 처로 들일 생각이니?”

묵용성은 벌게진 얼굴로 사봉봉을 몰래 힐끔거렸다. 화를 내지 않은 봉봉의 모습에 묵용성은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나랑 누이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네 부마나 신경 쓰시지!”

청양 공주는 그의 큰소리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난 동월의 장공주이자 유일한 공주잖아. 훗날 부마가 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부황께 청을 드릴 텐데… 내가 뭐 하러 관심을 가지겠어.”

묵용성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댔다. 결국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훗날 자신에게 구애할 사람은 차고 넘칠 텐데, 넌 이렇게 신줏단지 떠받들듯 여인의 비위를 맞추며 직접 구혼을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그도 훗날 육황숙처럼 풍류를 즐기는 호방한 미남이 될 게 틀림없었다. 자신을 흠모하는 여인들이 궁문 앞에 늘어설 텐데. 그도 얼마든지 신붓감을 고를 수 있을 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