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6화
매번 구휼할 때마다 여의루 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게도 이날만큼은 장사를 접고, 배고픈 이들에게 줄 음식을 열심히 만들었다. 구휼은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 진행했다.
사봉봉은 아침 일찍부터 저택의 여종들과 함께 입하란을 담을 채색 주머니를 짰다. 입하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사앵앵이 죽을 나누어줄 때, 사봉봉은 옆에서 아이들에게 입하란을 나누어 줬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계란을 하나씩 쥐여 주는 일이 좋았고, 아이들이 행복한 미소 짓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남루한 옷차림에 꼬질꼬질한 행색을 하고 있어도 아이들이 싫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에 묻은 땟국물을 닦아 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가마에 타고 있던 묵용린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정말 능청스러운 계집애다. 보살 같은 마음씨를 가진 척 가장하다니. 궁에서 사앵앵이 모후를 어떻게 속였는지 다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남원에 있는 마귀할멈 같은 인간들이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속닥거리는 말이 다른 소인배들……. 그 마귀할멈은 모후의 면전에선 저를 보고 생글생글 웃었지만 뒤돌아서면 완전히 다른 얼굴로 돌변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귀할멈은 지금 당장 해치울 수 없지만… 눈앞에 있는 저자를 해치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마의 발을 내린 그는 시종에게 궁으로 돌아가자고 분부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묵용린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사실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진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일이 잦았다. 아직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기에 마귀할멈을 죽일 때가 아니었다. 열세 살이 되어도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할멈을. 묵용린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사봉봉은 마귀할멈처럼 능청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자라난 악기惡氣를 잠재울 수 있는 건 그녀에게 징벌을 내리는 것뿐일 테다.
* * *
낮잠을 자던 사봉봉이 눈을 떴다. 사앵앵은 화첩을 보따리에 싸서 사봉봉에게 입궁하라고 했다.
“값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황후 마마께서 분명 좋아하실 거야. 황후 마마께서 더 좋은 것을 원하시면 찾아 드린다고 알려 드려.”
사봉봉은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고 작은 보따리를 챙겨 들었다. 마차가 궁문 앞에서 멈추자 보초 한 명이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황후 마마가 총애하는 사람이니 모두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궁인들에게 예의 바르게 답례한 사봉봉은 편문에서 청색의 작은 가마로 갈아타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궁문을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마가 멈췄다. 사봉봉은 묵용성이 마중 나왔다고 생각했다. ‘누이’라고 부르는 청아한 목소리를 기다렸지만 무슨 일인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가마가 아무 말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자 그녀는 무언가 찝찝한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가마꾼이 힘이 들어 멈춘 것일까.
하지만 황제가 계신 궁에서 별일이 있을까 싶어 그녀도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따리를 품에 꼭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일정하게 흔들리는 가마가 너무 편안했다. 마치 요람에 누워 있는 듯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사봉봉이 깨어났을 때, 사방은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눈을 비비고 앉은 그녀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창문도 없어 어둡고 습했다. 분명 초여름의 날씨인데도 방 안의 한기에 몸이 떨렸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도대체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마꾼들은 그녀를 승덕전으로 데려다줬어야 했다. 그런데 왜…….
궁 안에 이렇게 싸늘하고 차가운 곳이 있을까? 게다가 안이 텅 비어 있어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쿵쿵쿵!
사봉봉은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지만, 문이 아주 두꺼워 바깥에 들리지 않은 듯했다. 또 목청을 높여 소리쳐 보기도 했지만 다 의미 없는 일일 뿐이었다.
사봉봉은 땅바닥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했다. 후궁의 냉궁이란 곳이 이런 모습 아닐까? 그곳은 징계를 받은 비빈을 가두기 위한 곳이었다. 이곳이 진짜 냉궁이란 말인가? 이곳에 저를 가둔 이유는 무엇이지? 그녀는 비빈도 아니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시야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한편에서 촛대를 발견했다. 촛대 위에는 초가 꽂혀 있었다. 그녀는 부랴부랴 화절자를 꺼내 촛불을 켰다.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자 안온함과 광명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촛대를 들고 다시 방안을 훑어보았지만 텅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을 리 만무했다.
다만 한쪽 벽에 초라한 탁자와 저만치에 흠집 있는 의자가 보였다. 사봉봉은 의자를 끌어 탁자 쪽으로 옮겨 놓고 촛대를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보따리에서 화첩을 꺼내 천천히 보기 시작했다. 심심할 땐 뭐라도 찾아서 하는 게 나았다.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는 책을 읽는 것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장영전에서는 묵용린이 붓을 휘두르며 글씨를 쓰고 있었다. 차가운 얼굴에 검은 눈썹을 치켜뜬 열세 살의 소년은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이 쓴 글자를 내려다 보았다. 한 획, 한 획,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게 절대 열세 살 소년의 필력 같지 않았다. 옆에서 먹을 갈던 가난청은 구석에 서 있는 서양 대종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태자 형님,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풀어 줘야겠습니다.”
묵용린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눈살을 찌푸린 채 글씨만 계속 썼다. 가난청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태자 역시 이러한 상황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 탓에 물러날 줄을 몰랐다. 냉담하고 오만한 사람에게는 물러설 계기를 주어야 했다. 가난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 누이가 궁에 들어온 기록이 있으니 성 전하께서 아시면 찾아다닐 겁니다. 만약 황상과 황후 마마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큰일입니다.”
묵용린은 손목을 뒤집어서 마지막 획을 돌려 길게 늘어뜨렸다. 제 필체에 만족한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느냐?”
“네, 방 안은 아주 조용하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묵용린은 냉소했다.
“화를 제법 잘 가라앉히는군. 이참에 좀 더 괴롭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난청은 태자가 사봉봉을 이토록 미워하는 연유를 알지 못했다. 아마도 마음속에 답답한 한을 그녀에게 푸는 것 같았다. 가난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사 누이의 팔자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태자 형님, 지금 풀어 주지 않으면 정말 늦습니다.”
가난청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보세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묵용린은 창밖을 힐끔 내다보았다.
“그래, 그만 풀어 주거라.”
“태자 형님.”
가난청이 말했다.
“오늘 일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습니다. 사 누이가 풀려나면 틀림없이 황후 마마께 누군가 자신을 가두었다고 일러바칠 것입니다. 황후 마마께서 노하시면 분명 저의 아버지께 이번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할 겁니다. 아버지께선 좀 어설프기는 하지만, 사건 조사는 꽤 잘하십니다. 그러니…….”
“그래서 어쩌라고?”
묵용린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미간에 포악한 기운이 풍겼다. 하지만 가난청은 배시시 웃으며 할 말을 다 했다.
“태자 형님이 직접 다녀와야 합니다. 사 누이에게 이번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해야지요.”
묵용린이 호통쳤다.
“감히 이 일을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이더냐?”
가난청이 답했다.
“사 누이는 원래 담력이 큽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묵용린은 두 팔을 휘저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가난청은 얼른 웃으며 따라갔다.
묵용린은 뒷짐을 진 채 궁 서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막 화벽을 꺾어 돌아섰는데 분주히 움직이는 묵용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아우를 불렀다.
“무얼 하고 있느냐?”
묵용성은 태자의 모습에 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태자 형님을 뵈옵니다.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묵용린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묵용성에게 물었다.
“누구를?”
“사 누이가 입궁했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아서요. 대체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묵용린이 물었다.
“누가 그러더냐. 잘못 안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이 일을 말하자니 묵용성은 조금 부끄러웠다.
“궁문을 지키는 자와 친분이 있어서 사 누이가 입궁할 때마다 제게 곧장 알려 줍니다.”
묵용린이 안색을 굳혔다.
“잘하는 짓이다, 황자가 궁문 보초와 친분이나 쌓고. 그것도 사봉봉의 행적을 즉각 통보하게 시켰더냐? 일개 장사꾼의 딸에게 그리 높은 대우를 해 줘야 한단 말이냐?”
묵용성은 혼쭐이 나자 조금 성이 났다.
“저와 사 누이가 어릴 때부터 가까웠다는 건 태자 형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친한 벗이 궁에 오는데, 주인의 도리를 다해 손님 대접도 해 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주인의 도리 좋아하네.”
묵용린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육황숙을 빼닮았구나. 허나 아무리 육황숙이라고 한들 그런 쪽으로 눈을 뜨셨을 땐 너만큼 어리지 않으셨을 텐데. 솜털도 가시지 않은 게 머릿속에 이상한 것만 가득 차서는. 이 황형이 충고하는데, 공부도 더 많이 하고 무예도 익혀서 훗날 사직의 좋은 기둥이 되도록 노력하거라.”
태자의 훈계를 피하고 싶었던 묵용성은 대충 대답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지금은 사봉봉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묵용린은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 물어볼 말이 있다. 모후께서 사봉봉이 입궁한 사실을 아시느냐?”
묵용성이 고개를 저었다.
“모후께선 모르십니다.”
묵용성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모후를 알현하고 나면 사봉봉은 즉각 출궁을 했기에 묵용성은 모후를 만나기 전 사봉봉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가마꾼에게 물어보니 아가씨가 도중에 혼자 걸어갔다고 할뿐 다른 건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만약 그녀를 찾을 수 없다면 모후께 말씀드리고 인력을 배치해 궁 안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묵용린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봉봉이 없어진 건 모후께 말씀드리지 말거라. 궁에 들어온 게 맞는다면 사라졌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 놀이를 탐하다 어디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모후께서 아시면 오히려 분수도 알지 못한다며 사봉봉을 질책하실 것이야.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황형이 한번 찾아볼 테니 우선 너는 돌아가 소식을 기다려라. 반 시진 후에도 찾지 못하거든 그때 모후께 보고드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묵용성은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봉봉이 정말 어디선가 노닥거리고 있다면 모후에게 꾸지람을 듣게 될 테니 말이다. 묵용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형님의 말씀대로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