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5화
마음이 여린 백천범은 사봉봉의 말을 듣고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금궁에 갇혀 있는 신세였지만 그녀의 곁엔 늘 가족이 함께했다. 오랜 시간 가족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태자는 입꼬리를 잡아당기고 시큰둥한 냉소를 지었다. 잘난 장사꾼의 딸이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소리일 뿐이다. 황태자인 그는 스승인 가동을 따라 궁궐 밖을 돌아다니곤 한다. 백성들의 고통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세상에 일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구할 수 있는 법. 즉, 큰돈을 벌고 싶으면 당연히 보통 사람보다 더 고생해야 한다. 사봉봉은 상대에 있는 사람들을 매우 비참하게 말했지만, 한 번 상대를 따라갔다 오면 보통 사람이 이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은자를 벌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상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늘 많았다. 몇 년 동안만 열심히 일하면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돈도 벌고 좋은 날도 오는데, 그게 무슨 고생이겠는가?
천 냥이란 돈을 쉽게 쓸 수 없었던 백천범은 묵용성과 논의를 했다.
“성아, 네 거는 사지 말자. 이 취금은 어미가 잠시만 가지고 있다가 너에게 주마. 은전 천 냥이나 하잖아.”
묵용성은 모후의 의견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황자로 금의옥식 하며 자라서 은전의 가치에 무감각했다. 하지만 모후의 말에 반대하긴 어려웠다.
“모후의 말이 맞아요. 소자, 모후의 말을 듣겠습니다.”
은전 천 냥을 아낀 백천범은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녀는 사봉봉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답금은 취금보다 비싸겠네?”
“맞습니다. 황후 마마, 훨씬 더 비싸요.”
“그럼…….”
백천범은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그건 그냥…….”
그러자 황제가 크게 손을 내저으며 확실하게 못 박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짐에게 그 정도 돈은 있소. 한 나라의 군주가 답금 한 대도 못 산다면 웃음거리가 될 거요.”
결국 사기 상점의 소주인장 사봉봉은 금원보 두 덩이와 꽤 큰 액수의 은표 한 장을 받아서 보따리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공손히 예를 행한 후, 성 황자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떠난 궁전 안, 황제와 황후 둘만 남아 대화를 나눴다. 백천범이 황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에게 빚 독촉을 한 사람은 봉봉이가 처음이죠? 당신이 화를 낼까 봐 걱정했어요.”
황제는 불쾌한 기색을 숨겼다.
“내가 아이에게 뭐 하러 언성을 높이겠소?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규칙을 함부로 깨선 안 되지. 그런데…….”
그는 씩 웃었다.
“봉봉이가 담이 크긴 크더군. 전도가 아주 유망한 아이오.”
백천범이 물었다.
“앵앵보다 봉봉이가 더 큰 일을 할 거란 말이세요?”
“당연하지.”
황제가 말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제 몫은 제대로 말하지 않소. 장사하는데 귀천을 가리지 않는 건 아주 중요하지. 사앵앵이 봉봉에게 물건을 보낸 것도 바로 이 이유겠지. 만약 사 주인장이 직접 왔으면 취금은 당신에게 선물했을 거요.”
백천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앵앵이 그런 계산을 했군요. 앵앵이가 저에게 선물한 게 많긴 하지만, 저도 그녀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황제는 항상 따끔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물물교환은 장사하는 것과 다르오. 장사는 결국 영리를 위한 것이지. 당신이 그녀에게 준 것은 모두 궁중의 것들이라 팔기도 쉽지 않소. 그러니 차라리 돈으로 주는 것이 좋소.”
곰곰이 생각해 보던 백천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건들은 다 마음에 드는데 너무 비싸요.”
그녀는 취금을 황제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작은 물건이 은전 천 냥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봉봉의 말도 이치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황제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은전 천 냥이 뭐 어때서 그렇소? 당신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여인인데. 하늘의 별을 원해도 따 줄 수 있소.”
그들은 이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담을 나눴다. 아마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백천범도 그의 간지러운 밀어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부끄러워했다. 근처에 있던 노비들은 보고도 못 본 채 하며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저들도 이미 익숙해진 걸지도 모른다.
* * *
집으로 돌아온 사봉봉은 사앵앵에게 보자기를 건넸다.
“어머니, 장부에 올려 주세요. 취금의 잔금도 가져왔고 답금 계약금도 받아왔어요. 금원보 두 덩이로 계약금으로 내셨어요.”
놀란 사앵앵이 눈을 반짝였다.
“우리 봉봉이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마마님한테도 그렇게 장사를 잘하고. 뭐라고 하셔? 비싸다고 싫어하시지 않아?”
“황후 마마께선 비싸다고 하셨지만 황상께서 주문하셨어요.”
사장풍은 허허 웃었다.
“황상 앞에서 이야기한 건 잘했구나. 황후 마마가 원한다면 황상은 그 무엇이든 살 거다.”
사봉봉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성 전하께서도 취금을 원하셨는데, 황후 마마께서 나중에 취금을 물려주신다고 했어요. 황상께서 성 전하의 취금까지 사 주실 줄 알았는데…….”
사앵앵은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은 황후 마마와 청양 공주에게만 너그러우시단다. 두 분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 주고 어떤 물건이든 구해 주시지. 어릴 때부터 취향이 까다롭고 정교하신 성 전하는 돈 쓰는 데 귀신이시지. 황제께서 성 전하를 위해 돈을 쓰시겠느냐? 앞으로도 그저 황후 마마의 비위만 잘 맞춰 드리면 돼.”
사앵앵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어서 들어가서 쉬거라.”
사봉봉이 가고 나서 사장풍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의도를 내가 모를 줄 아오? 당신이 나서기 어려우니 아이를 보낸 거 아니오? 황상께서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사앵앵이 말했다.
“저는 봉봉이를 아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나이는 어려도 일 처리는 얼마나 야무진데요. 게다가 고지식해요. 황상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아이가 저 아이죠.
봉봉이를 보낸 건 담력 단련도 있지만, 우리 사가 상점은 귀천을 따지지 않고 장사를 한다는 걸 황상께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황후 마마의 신분이 귀하다지만 그래도 물건을 샀으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알려 드려야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상점 물건을 공짜로 이용하려 할 거예요.”
하지만 사장풍은 걱정이 앞섰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고지식한 것만큼은 그리 좋지 않소. 지금은 나이가 어리니 황상께서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황상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 계속 그런 식으로 한다면 언젠가 화를 입을 수도 있소.”
사앵앵이 그를 흘겨봤다.
“고지식한 게 누굴 닮은 건데요! 당신을 닮은 거잖아요.”
사장풍은 조금 머쓱했다. 그녀가 그와 백천범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 정말 이럴 거요? 이미 팔백 년은 지난 일을 뭐 하러 자꾸 꺼내는 거요?”
농을 덧붙인 그는 뒷짐을 지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들 부부는 예전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황상이 그들을 거리낌 없이 대하자 사앵앵 또한 자연스레 그 일을 언급했다. 사람이 없을 땐 그 일로 사장풍을 한바탕 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궁중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일은 모두 사앵앵의 몫이 됐다. 신기한 물건만 나오면 사앵앵은 그녀를 궁으로 보냈다. 황후 마마를 상대로 하는 장사가 가장 짭짤했다. 황후 마마가 좋아하는 물건이라면 황상은 돈을 후하게 썼다. 요즘은 황후 마마가 흥정하려 했지만 말이다.
황후 마마가 흥정하려 할 때면, 사봉봉은 바로 사앵앵과 논의를 했다. 그럴 때마다 사앵앵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오수진烏水鎮에서 미꾸라지를 팔던 사람이야. 황후 마마도 장사한 적이 있어서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시지. 황후 마마께서 값을 깎으면 너도 서슴지 말거라. 네 아버지가 이미 조정에서 큰일을 하고 계시니 우리가 굳이 잘 보이려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단다. 비록 값을 좀 깎아 주더라도 항상 네 이익은 남겨야 해.”
사봉봉이 말했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황후 마마께서 값을 흥정하시니 제가 조금 더 비싸게 올려 부르면 됩니다. 황후 마마께 좀 깎아 드려도 우리가 원래 받으려고 한 값이에요. 우리가 받아야 할 돈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요.”
사앵앵이 칭찬하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이 어미의 딸이구나.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란다. 우리는 장사꾼이기 때문에 사적인 정에 흔들리면 안 된단다. 아무리 권위와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도 체면을 세워 줄 필요 없어!”
사봉봉은 웃기만 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녀의 어머니가 돈에 미쳐 육친도 알아보지 못하는 줄 알겠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어머니는 돈을 벌 때 늘 도리를 지킨다는 것을. 사정우와 같은 자와는 전혀 달랐다. 어머니는 장사를 사랑했고 그 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자 했다.
정직하게 장사해 최대한 이익을 내는 것, 그것이 사앵앵의 원칙이었다. 사앵앵은 돈 때문에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믿고 도움을 줬다. 그 덕에 사가 상점은 날이 갈수록 부흥했다.
사앵앵은 돈을 벌어도 백성들을 잊지 않았다. 항상 이익의 일부를 선한 일에 썼다. 사정우가 무료로 죽을 나누어 준 것은 더러운 목적 때문이었지만, 사가 상점에서 죽을 나눠 주는 것은 순수히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찐빵을 만들고 죽을 끓여 나눠 줄 때도 묵은 쌀이 아닌 햅쌀을 사용했다.
게다가 사비로 학당을 차리고 어진 글 선생을 모셔 와서 책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앵앵은 임안성에서 장사 잘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훌륭한 인품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사봉봉은 어머니를 모범으로 삼아 그녀처럼 품성이 어질고 능력이 대단한 장사꾼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사기 상점은 사계절 각각의 절기를 택해 구휼에 힘썼다. 그래서 입하立夏인 오늘, 여의루에서는 입구에 긴 탁자를 펼쳐 놓고 사람들을 받았다. 가게 안에선 끊임없이 뜨끈뜨끈한 죽과 찐빵이 나왔다. 배고픈 어린아이가 찾아오면 찐빵과 죽뿐만 아니라 입하에 먹는 입하란까지 챙겨 주었다.
입하란은 찻잎이나 호두 껍질을 넣은 물에 삶은 달걀을 말한다. 껍질이 빨갛게 익어 길하고 경사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입하란을 먹는 건 동월의 풍습으로, 입하에 이 달걀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