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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44)화 (743/1,192)

제744화

사봉봉은 보따리를 열어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 위에는 작은 단추가 하나 달려 있었다. 그 단추를 살짝 누르니 상자 안쪽에서 직사각형의 작은 물건이 나왔다.

연한 노란빛을 띠는 물건은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삼면은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나머지 한 면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신기한 모양새였다. 그녀는 물건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받친 채 백천범에게 내밀었다.

“황후 마마, 이것이 바로 취금입니다.”

백천범이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물었다.

“어떻게 부는 것이지?”

사봉봉이 자신의 소매에서 비슷한 모양의 취금을 꺼냈다. 황후의 것보다 조금 더 작은 것이었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다면 시범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백천범은 즉시 박수를 쳤다.

“그럼, 더 바랄 게 없고말고.”

사봉봉은 일찍이 상대가 가져온 취금을 가지고 끈질기게 연구했다. 그리고 기어코 취금의 연주 방법을 알아냈다. 사봉봉은 취금을 살짝 입에 물고 살며시 안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취금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달라졌다.

백천범은 최근 악기에 빠져 있었다. 가장 먼저 황제가 피리 부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로 열심히 불었지만 피리에서 나오는 건 답답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 후에 그녀는 비파를 배우기 시작했다. 음은 제대로 냈지만 현에 자꾸 손가락을 다쳐 매번 피를 줄줄 흘렸다. 황제는 결국 비파 금지령을 내렸다.

결국 그녀는 쉽게 배울 수 있는 악기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악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고민하던 중 그녀의 사정을 들은 사앵앵이 백천범에게 취금에 대해 알려주었다. 서양에 ‘입으로 부는 금’이라는 뜻의 악기가 있는데 힘을 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불어도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백천범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취금을 주문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취금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비록 사봉봉이 어떤 가락을 부는 건 아니었지만, 동월의 악기 연주에 익숙한 그들이 서양의 악기 연주를 듣자 매우 신기해했다. 왜인지 모르게 동월의 악기처럼 단조롭지 않고, 더 무게 있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백천범은 기뻐하며 월규에게 명했다.

“어서 태자와 청양에게 서양 악기를 구경하러 오라고 해.”

묵용성이 말했다.

“모후, 나도 하나 갖고 싶어요.”

백천범은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도 하나 사 줄게.”

백천범은 취금에 입을 대고 조심스레 불어 보았다. 과연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고운 소리가 났고, 또 그 소리가 아주 컸다. 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려웠던 피리와 달리 취금은 간단히 소리가 나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황제는 취금의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어지러운 소리보단 동월의 악기 소리가 더욱 듣기 좋았다. 하지만 백천범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내색하지 않고 취금에 관심을 보였다.

잠시 후, 태자와 가난청이 와서 점잖게 예를 취하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봉봉을 마뜩잖아 하는 태자는 그녀가 가져온 물건에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모후의 체면을 봐서 무어라 말을 보태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백천범은 태자에게도 사봉봉이 시연하는 걸 보여 준 뒤에 취금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태자는 공손한 모습을 한 채 말했다.

“모후, 소자는 동월의 황태자입니다. 당연히 동월의 악기를 배워야 하지요. 외방의 물건은 모후께서 두고 쓰십시오. 소자는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속으로 기쁨이 차올랐다. 황태자가 저런 각오쯤은 있어야지. 좋군. 좋아.

그때,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위로 땋은 머리가 마구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어머니, 저더러 무슨 진귀한 물건을 보러 오라고 하셨어요?”

백천범은 공주를 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봉봉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백천범이 아무리 규율을 중시하지 않더라도 이제 아홉 살이나 되었으니 공주도 제 모습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동월의 장공주라는 아이가 시골 벼락부자의 딸보다는 좀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백천범은 취금을 공주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묵용청양은 별로 흥미가 없는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백천범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가지고 노세요. 저는 시간이 없어요. 영안이 연무장에서 절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들어오는 것도 빠르더니 나가는 것도 빨랐다. 황제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기도 전에 공주는 머리를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직 묵용청양만이 구오지존인 황제를 무시할 수 있지 않을까.

가난청은 묵용린이 그녀를 따라서 물러가겠다고 고할 줄 알았다. 본래 태자가 악기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그 자리에 단정히 서 있었다. 가난청은 어리둥절해하며 조용히 태자 옆을 지켰다.

묵용린이 자리를 지키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사봉봉 때문이었다. 그는 사봉봉을 많이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만 같았다. 지금 자리를 뜨지 않은 건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사봉봉이 황후에게 하는 말에 귀기울였다.

“황후 마마, 힘들이지 않아도 연주가 되는 서양 악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답금踏琴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로 큽니다.”

사봉봉은 손짓으로 크기를 표시했다.

“작은 책상처럼 생긴 악기입니다. 위에는 손가락으로 누르는 여러 개의 건반이 있고 밑엔 발판이 있습니다. 발판을 누르고 건반을 치면 소리가 나는데 아주 듣기 좋습니다. 하지만 이 악기는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악기 한 대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릴 정도라고요. 서국에서도 왕손과 귀족만이 답금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태자는 속으로 냉소했다. 역시 상인의 교묘한 속셈을 드러내는군. 취금을 판 것도 모자라 또 다른 악기를 팔려고 하다니. 분명 그 답금이란 악기는 무척 비쌀 것이다. 사봉봉은 모후가 진귀한 걸 몹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이를 이용하는 것일 터. 아직 어린 나이에 주판을 아주 잘도 굴리는구나! 어쩐지 다들 간사한 상인이라며 떠들더라니…….

하지만 황제의 반응은 태자와 달랐다.

“당당한 동월국의 황후가 자격 미달이란 말인가? 사 주인장에게 돌아가서 한 대 주문하라고 전하라.”

사봉봉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황상께서 먼저 계약금을 내주셔야 합니다. 서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한 번 다녀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계약금을 주시면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황제의 눈치를 봤다. 천하의 모두가 황제의 비위를 맞춘다. 황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구해내 바치는 게 당연한 것인데… 감히 황제에게 계약금이란 소리를 하다니! 설마 천자가 물건값을 떼어먹기라도 한다는 소리인가.

황후도 정말 의외였다. 이런 말은 사앵앵도 황제 앞에서는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데 어린 사봉봉이 황제에게 돈을 달라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성 황자는 불안한 듯 황제를 힐끔거렸다. 만약 부황이 사봉봉을 문책하시면 자신이 나서 그녀를 용서해 달라고 빌 것이다. 그는 사봉봉이 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계약금을 원한다면 부황 몰래 모후께 말하면 된다. 어리석게 부황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다니.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비록 황제의 성격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어찌 황가의 존엄을 훼손하는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을까?

사봉봉에게 닥칠 재앙을 상상하던 태자는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먼저 버럭 소리쳤다.

“사봉봉, 본궁도 너희 사가 상점의 규칙을 알고 있다. 서양의 물건을 사려면 먼저 계약금을 내야 한다지? 하지만 천하의 군주이신 부황이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계약금을 내야 한단 말이냐? 설마 황제의 체면을 깎을 생각이냐!”

태자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사봉봉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반문했다.

“전하께서도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계약금을 먼저 내는 것은 사가 상점의 관습입니다. 인자한 군주이신 황상께서 천하의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 태자는 고함을 쳤다.

“어딜 감히! 너 따위가……!”

“그만.”

황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위엄이 가득했다. 태자는 하려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황제는 전혀 화난 모습이 아니었다. 심지어 담담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봉봉의 말이 옳다. 아무리 짐이 황제라 할지라도 규칙을 어길 수는 없지. 여봐라. 금원보 두 덩이를 가져다가 사가의 사 주인장에게 주어라.”

황제는 다시 사봉봉에게 물었다.

“금원보 두 덩이면 충분하느냐?”

사봉봉이 답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답금을 위한 계약금이라면 금원보 두 덩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황후 마마의 취금은 아직 잔금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아까 황자 전하께서 취금을 원하셨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계약금을 더해야 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제가 한 걸음 물러섰는데도 오히려 그녀는 한술 더 떴다. 황제가 계속 참을 줄 아는 것인가. 백천범이 물었다.

“취금은 얼마인가?”

“물건은 작지만 귀한 악기라 은전 천 냥입니다.”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렇게 비싸구나.”

황후가 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를 매우 아끼는 황제 덕에 궁 안 살림은 모두 학평관의 몫이었다. 그리하여 재물에 대한 그녀의 인지는 아직 예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에게 은전 천 냥은 이미 엄청난 가격이었다. 사봉봉은 빙그레 웃었다.

“취금 자체는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닙니다. 다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서양까지 오가는 데 시간과 고생이 듭니다. 상대는 비바람에 시달리고 따가운 태양을 견뎌야 하지요. 대부분 관도를 따라 이동하지만, 어떨 때는 길이 없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고, 독충이나 짐승과 싸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물건을 사 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일 년 내내 길 위에 있어서 가족과 만나지도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생이별과 사별인데 그들은 생이별을 겪는 셈이지요. 가족을 그리워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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