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3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사봉봉은 손에 있던 꽃잎을 다 떨어뜨렸다. 그녀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아차리고 속으로 긴장했다. 그리고 얼른 꽃잎을 발로 밟아 숨겼다.
금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를 보면 다들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심지어 만인지상인 황제마저 그녀에게는 다정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유독 한 사람만은 그녀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태자 묵용린墨容麟이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다지 유쾌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 뒤에도 몇 번 만났고 식사도 함께했지만, 묵용린은 항상 그녀에게 냉담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사봉봉 역시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를 피했다.
그런데 오늘, 불행하게도 여기에서 만났다. 묵용린은 이미 열세 살로, 그녀보다 무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세 남매 중 가장 황제를 닮은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다부졌다. 이미 아이 티를 벗은 그는, 짙은 눈썹에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눈동자에는 차가운 서리가 맺혀 있었다. 사봉봉이 얼른 예를 취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내가 묻지 않았느냐?”
묵용린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 화원에서 뭐 하는 것이냐?”
황제도 무서워하지 않은 사봉봉이었지만 유독 태자는 두려워 그녀가 말을 우물거렸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 정원까지 왔다고?”
“그저 꽃구경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묵용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잊었느냐? 황궁에는 궁중 규칙이 있다. 네가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낱 장사하는 집안 딸이…….”
그는 잠시 꺼림칙한 표정을 짓다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사봉봉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남 부끄럽지 않게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는데 왜 그녀가 천시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밖에서 만나는 관리들은 어머니의 눈치까지 봐야 했다.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절대 사가 상점의 회원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태자는 저를 무시하는가?
저도 운 좋아서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거잖아! 태자라는 지위를 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뭘 멍하니 있어? 빨리 나가!”
묵용린은 또 그녀에게 호통쳤다. 사봉봉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떼니 치마 밑으로 떨어진 꽃잎이 드러났다.
“잠깐.”
묵용린은 또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내 화원에서 꽃을 구경한 게 아니라 훔치러 왔구나?”
“아닙니다.”
사봉봉은 즉시 부인했다. 당연히 그녀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그에게 혼쭐이 난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궁중의 꽃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정말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
“제 허리에 달린 끈이 꽃줄기에 엉켜서 그랬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묵용린은 콧방귀를 뀌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네가 그랬잖아. 어디 한번 말해 봐, 이제 어쩔 거지?”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사봉봉은 상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묵용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하늘 아래서 가장 존귀한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의 물건 또한 당연히 하늘 아래서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배상하겠다고? 정녕 감당할 자신이 있단 말인가?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 돈만 믿고 본궁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사봉봉은 너무 놀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녀가 어찌 감히.”
묵용린이 그녀를 어떻게 혼내 줄까 고민하는데, 가난청이 달려왔다. 그는 한참 전부터 기둥 뒤에서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래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태자 전하께서 너무 몰아붙이시는 것 같아 수습하러 나온 것이다. 일이 커지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터.
“태자 형님, 뭘 그렇게 꾸물거리십니까? 차가 식겠어요.”
그는 흩뿌려진 꽃잎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바람이 분 것으로 칩시다. 꽃잎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어차피 떨어질 꽃잎인데 뭐 하러 화를 내십니까? 사 누이는 황후 마마를 뵈러 가는 길이십니까? 어서 가 보십시오. 마마께서 많이 기다리시겠습니다.”
사봉봉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태자가 부르기 전에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자 태자는 가난청에게 호통쳤다.
“왜 네가 나서고 난리야!”
어릴 적부터 태자와 가깝게 지낸 가난청은 그가 화를 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제가 나서지 않으면 태자 형님께선 어찌하시려고 했습니까? 설마 사 누이를 벌하시려고요? 꽃 한 송이 때문에 사 누이를 벌했다간 황후 마마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태자는 피식 웃고는 그의 뒤통수를 툭 쳤다. 사실 방금 태자도 사봉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꽃 한 송이 때문에 그녀에게 벌을 주었다간 별것 아닌 일로 소란을 피운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게다가 모후가 사씨 부부와 사이가 좋기에 사봉봉을 벌했다간 그에게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태자는 그녀를 이대로 보내는 게 달갑지 않았다. 가난청은 조금 의아해서 물었다.
“태자 형님, 왜 자꾸 사 누이를 미워하십니까? 제가 보기엔 참 좋은데요.”
“좋기는!”
묵용린은 말했다.
“저자는 너무 능청스럽지 않느냐? 아직은 어린 소녀이면서 자기가 무슨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구니 보기만 해도 눈꼴사나워! 청양과 소타를 보거라! 그 아이들이야말로 어린 소녀의 모습이지. 사봉봉은 인간 같지 않아. 웃는 모습조차 틀에 박혔다니까.”
“그렇습니까?”
가난청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사 누이도 일부러 연기하는 건 아닐 겁니다. 태자 형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저자를 너그럽게 봐달라고?”
묵용린은 이를 갈며 말했다.
“저자가 조용하고 얌전하니까 소란 피우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런데 사실은 속으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야. 감히 모후에게 태자인 내가 사치를 심하게 한다고 일러바쳤다.”
“네? 태자 형님께서 무얼 했기에 사 누이가 그렇게 말한 겁니까?”
태자는 자세히 말하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더니 전각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난청은 웃으며 따라갔다.
“태자 형님이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재작년 그 빙초冰綃(희고 얇은 비단) 사건 때문에 그랬죠?”
가난청도 그 일을 알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남쪽에서 빙초 몇 필을 진상했다. 태자는 사람을 시켜 땀을 잘 흡수하는 빙초로 땀수건을 만들게 했다. 그리곤 성 황자와 청양 공주, 친우인 가난청에게도 선물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일을 알게 된 사봉봉이 황후에게 옷을 만들어도 부족한 옷감으로 수건을 만들긴 아깝다고 말한 것이다. 그로 인해 태자는 황후에게 몇 마디 꾸중을 들었다.
별일 아닌 사소한 일이었지만, 가난청은 태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좋지만, 앙심을 오래 품는 것이 태자의 단점이었다. 원래도 능청맞고 돈 냄새가 난다며 사봉봉을 싫어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래도 눈치 빠른 사봉봉은 태자의 심기를 알고 그를 피해 다녔다. 그런데 하필 오늘 동공 후원에 들어오다니. 원수가 제 울타리 안에 들어왔으니 가만둘 리 없었다. 하지만 황후 때문에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또 그게 불편한 것이다.
황후는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천하에 황상을 제외하고 그다음은 태자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태자는 황권을 중시했고, 자기 자신을 합당한 황태자라고 여겼다. 궁중의 사람이나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그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미천한 상인 딸 하나 어찌하지 못하다니. 그의 심사가 뒤틀리지 않을 리가.
* * *
사봉봉은 승덕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묵용성이 급히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누이, 어딜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사봉봉은 아까의 일을 언급하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어디 안 갔어요. 명호 풍경이 좋아서 잠깐 거닐다 왔어요.”
늘 그녀에게 관대한 묵용성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가자. 누이, 모후께서 누이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으셨을 거야. 괜히 걱정하실지도 몰라.”
그는 손을 내밀어 사봉봉을 이끌었지만, 사봉봉은 말없이 제 보따리를 챙기며 그의 손을 피했다. 그녀는 조심성 있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성 황자에게 보따리를 들게 하면 황후 마마께선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 그 주변인들은 사봉봉을 욕할 것이다.
묵용성은 시무룩한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봉봉이 그의 안색을 힐끔 쳐다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땐 손을 잡기도 했다.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여섯 살이었고 그는 다섯 살로 소꿉장난이나 좋아하는 나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어른스러웠지만, 많은 걸 고려하지 않았기에 그가 손을 잡으면 붙잡혀 주었다. 그녀는 성 황자를 동생처럼 생각하며 그가 가자는 대로 끌려다녔던 것이다.
성 황자는 어려서부터 깔끔했다. 그의 옷차림은 늘 정갈했고 좋은 향기도 났다. 그는 소란을 피우거나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놀이에 환장하는 사금언과는 전혀 달라서 그녀는 성 황자를 돌보는 게 동생을 돌보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다만 한 가지, 듣자 하니 성 황자는 육황숙을 스승으로 모시며 세속적인 풍아風雅를 추구한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겉치레를 중시하다니… 절로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성 황자는 이제 자신보다 키가 크지만 얼굴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활짝 피어난 게 다 큰 소년다워 보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눈처럼 흰옷을 입은 성 황자가 미소 짓자, 풍류를 아는 호방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녀를 어린 시절과 똑같이 대했다. 언제 만나더라도 늘 그녀의 뒤꽁무니만 뒤쫓았고 곁에 붙으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다가도 청양 공주가 보이면 놀란 토끼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또 금세 사봉봉을 보면 작은 새처럼 종알거렸다.
두 사람은 어느새 승덕전에 이르렀다. 승덕전엔 마침 황제도 자리해 있었다. 사봉봉은 앞으로 나가 예를 취했다. 백천범은 조급한 듯 그녀를 제 옆으로 끌어당겨 앉혔다.
“봉봉, 어서 물건을 꺼내서 보여 주겠니?”
사봉봉은 황후 마마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그 나이대의 여인처럼 보였지만 자신과 함께 있을 땐 소녀가 되는 듯했다. 황후는 좀처럼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제는 황후에 대한 총애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오. 물건이 이미 도착했는데 설마 도망이라도 가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