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2화
궁문을 지키는 호위병은 모두 사가 남매를 잘 알고 있었다. 사금언은 현재 공주의 무술 동무였기에 매일 입궁했다. 사봉봉도 사흘이 멀다 하고 입궁했는데, 성 황자가 특별하게 대하며 황후 마마도 매우 총애하는 소녀였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녀를 절대 만만하게 보지 못했다.
관례에 따르면 바깥의 가마는 황궁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항시 편문에 준비된 작은 가마로 갈아타게 했다. 사봉봉 역시 작은 가마에 타기 위해 일어났다. 그녀를 알아본 호위병들은 출입 영패조차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 가마는 매우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바깥 경치에 이미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이미 익숙한 황궁의 길을 보느니 눈을 감고 마음을 닦는 편이 훨씬 나았다. 눈을 감은 소녀의 앳된 얼굴에는 어른스러움이 가득했다.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가마가 멈추자 사봉봉이 눈을 떴다. 오가는 길을 모두 외우고 있는 그녀는 아직 승덕전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멈췄을까? 그때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의혹을 풀었다.
“누이가 온 거야?”
우아한 체는 하지만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높고 청아한 들렸다. 사봉봉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옥처럼 하얀 손이 불쑥 가마의 발을 걷자 묵용성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누이가 입궁하는 날이라 여기서 누이를 기다렸어.”
사봉봉은 할 수 없이 가마에서 내렸다. 묵용성이 가마꾼에게 말했다.
“다 물러가라.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누이랑 함께 걸어갈 것이다. 따라올 필요 없다.”
마지막 말은 그가 자신의 시종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사봉봉은 성 황자와 단둘이 푸른 벽돌 위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사봉봉은 그를 힐끔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키가 또 크신 것 같아요.”
묵용성은 이 말을 무척 좋아했다. 예전엔 사봉봉보다 작아서 그는 그녀를 올려다봐야 했다. 묵용성은 그게 굉장히 자존심 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봉봉의 눈빛 역시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일 뿐이었다.
듣자 하니, 족발을 먹으면 키가 쑥쑥 자란다지 않는가. 그렇게 기름진 것도 마다하지 않고 매일 하나씩 챙겨 먹은 것이 효과가 있는 듯, 지금은 그가 그녀보다 훨씬 컸다.
이제는 그녀가 성 황자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성 황자는 그녀가 더는 저를 동생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아서 늘 기분이 좋았다.
“그래?”
그가 웃으며 말했다.
“누이도 알아보았구나? 마마嬷嬷가 키를 쟀는데 요만큼 더 자랐어.”
그는 그녀에게 자세히 알려 주며 득의양양했다.
“정말 빠르게 자라시네요.”
사봉봉은 감탄했다.
“벌써 소년이 되셨어요.”
그녀의 말에 묵용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이제 소년이 아니라 사내라고.”
화를 내는 목소리는 더 높아서 마치 성질을 부리는 아가씨의 것 같았다. 사봉봉은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사봉봉과 더 오래 걷고 싶었던 묵용성은 그녀를 데리고 궁궐 안을 빙 돌았다. 궁 안을 자주 돌아다닌 사봉봉이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그녀는 물었다.
“전하, 어째서 이리로 가십니까?”
묵용성은 부드럽게 웃었다.
“금언이 궁에 있어. 누이는 그리로 가 보고 싶지 않아?”
“…….”
남동생은 집에서 맨날 보는데… 굳이 사금언을 보러 가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러나 묵용성의 좋은 뜻을 알고 있는 사봉봉은 그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묵용성은 그녀가 자신의 의견을 묵인하자 사봉봉의 손에 든 보따리를 들어주었다. 그는 호기심을 보였다.
“무엇이 들어 있어?”
“황후 마마께서 주문하신 취금吹琴입니다.”
묵용성은 이내 눈을 반짝였다.
“또 희귀한 물건이지? 좀 있다가 나도 구경해야지. 좋아 보이면 나도 하나 사서 놀 거야.”
샛길에서 나온 그들은 명호를 따라 반 바퀴 정도 걸어서 수목으로 경계를 두른 연무장에 도착했다. 햇빛 아래에서 한 무리의 소년들이 통쾌하게 넘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체구가 작은 한 사람이 가장 눈에 띄었다. 사봉봉은 한눈에 그 사람이 청양 공주임을 알아봤다.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건 어떤 소년이었다. 그는 무려 공주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손발이 기다랗고 앙상한 체격이었다. 소년은 바로 영 대인의 아들 영안이었다. 그는 청양 공주를 손쉽게 넘어뜨리며 한쪽 팔로 그녀의 가슴을 가로질러 눌렀다. 아마 그녀에게 패배를 인정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사봉봉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공주는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수많은 수련 동무 중에 꼭 영안만을 원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번번이 패배를 맛봐야 했다. 사금언은 항상 집에 오면 공주를 대신해 영안에 대한 불평을 늘어놨다. 사봉봉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영안의 욕을 들어야 했다.
밑에 깔린 공주는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말벌에라도 쏘인 듯 영안이 펄쩍 뛰어올랐다. 공주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영안을 깔보며 계속하자고 손짓했다.
“쯧쯧쯧.”
묵용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았지? 동월국의 장공주가 저게 무슨 꼴이냐? 다 컸는데도 사내들 사이에서 저렇게 몸을 막 굴리다니! 저러니 부황께서도 성별을 잘못 타고났다고 하시지. 지금 보니, 역시 부황의 말씀이 맞네. 몸 안에 남자가 살고 있어.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참, 매번 함정을 파고 남을 괴롭힐 생각만 한다고!”
묵용성은 청양 공주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누이, 청양이 영안을 못 이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청양 때문에 영안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누이는 모를 거야. 방금 전에도 분명 속임수를 썼을걸. 영안이 손도 못 쓰고 있는 걸 보면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사봉봉은 청양 공주의 별명이 귀신보다 무서운 공주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공주가 벌이는 일들이 그저 재미있게 느껴졌다.
청양 공주와 영안이 다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 옆엔 자신의 남동생이 흥분한 얼굴로 주먹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아마도 청양 공주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다시 청양 공주가 질 것 같아지자 사금언이 도우려 했다. 하지만 한쪽에 있던 무술 사범이 그를 제지했다.
사봉봉과 묵용성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묵용성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이가 혼자 가 봐.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난 가까이 안 갈래.”
아직 봄이라 햇살이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가지 않는 건 청양 공주에게 발각되면 연무장으로 끌려가 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청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연무장에서 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사봉봉은 굳이 들추어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지나쳐 갔다.
사봉봉을 보고 사금언이 달려왔다.
“누이, 여긴 웬일이야?”
“마마께 주문하신 물건을 드리러 왔어.”
사봉봉은 옷섶에서 손수건을 꺼내 동생의 땀을 닦아 주었다.
“힘들지 않아?”
“전혀 힘들지 않아.”
사금언은 이곳에서도 비교적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지만, 청양 공주처럼 무술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는 건실한 팔을 들고 연무장을 가리켰다.
“누이, 저기 검은 허리띠 맨 녀석 보여?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데, 오늘 내가 넘어뜨렸어. 공주 전하께서도 내 실력이 늘었다고 칭찬하셨어.”
사봉봉이 물었다.
“사부께서도 칭찬하셨어?”
사금언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 혼쭐났지. 편법을 썼다고 말이야.”
사봉봉은 동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원칙대로 행동하는 편이지만, 조급해지면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청양 공주와 좀 닮았다. 어쩌면 공주와 함께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부님 말씀이 옳아. 그래도 원칙을 지켜야지.”
“하지만, 공주 전하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셨어. 싸울 때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해. 영안처럼 고지식하게 원칙을 지키는 건 미련한 거야. 원칙을 지키면 사부의 칭찬을 받을 순 있지만 공주 전하를 당해내진 못할 거야.”
사봉봉은 청양 공주에게 빠진 그에게 다른 사람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고 돌아가려던 참에 묵용청양이 바람같이 달려왔다.
“봉봉.”
그녀는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것에 익숙했다. 태자를 제외하고는 남들에게 언니나 오라버니라고 절대 부르지 않았다. 또 자신을 어린 동생 취급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영안과 사봉봉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지만, 청양은 곧 죽어도 이름으로 불렀다.
“금언이 보러 왔어?”
“아니에요. 전 황후 마마께 물건을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청양은 투덜거렸다.
“우리 어머니는 또 무슨 물건을 사신 거야? 어디, 보여 줘.”
사봉봉은 별생각 없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묵용성을 가리켰다.
“전하께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 황자는 보따리를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청양 공주는 어리둥절했다.
“쟤는 뭐 하러 도망가? 설마 어머니의 물건을 강탈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
사봉봉은 말을 잃었다. 그런 건 공주 전하만이 할 수 있는 일인 듯한데…….
“공주 전하, 어서 돌아가세요. 진 사부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녀가 청양 공주를 재촉했다.
“저도 황후 마마를 뵈러 가야겠어요.”
“그래.”
청양 공주는 호탕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서 가 봐. 다음에는 같이 놀자.”
말을 마친 청양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자신의 어깨에 남은 새까만 손자국을 내려다보며 사봉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도망갔으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승덕전으로 갔다. 비록 이곳에 온 적은 많지 않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꽃이 가득 핀 길로 돌아와 명호를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길을 걷다가 사봉봉은 화원을 발견했다. 마침 봄이라 꽃이 만개한 상태였다. 아름다운 색채에 매료된 그녀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화원으로 옮겼다.
그리 크지 않은 화원엔 푸른색 네모난 벽돌 울타리가 둘려 있었다. 울타리는 그리 높지 않았고, 안에는 다양한 채석彩石이 깔린 꽃길이 있었다. 그녀는 울타리를 따라서 천천히 걸으며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를 즐겼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고, 그녀의 저택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이 심겨 있었다. 그리고 황후 마마도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황후 마마와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늘 끝이 없을 정도였다.
이곳의 꽃은 비록 승덕전의 것처럼 진귀하지는 않지만,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흔한 꽃들도 만개하여 절정에 이르면 사람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향기를 맡고 돌아설 때, 허리의 끈이 줄기에 감겨서 꽃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바람에 선홍빛 꽃잎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봉봉은 아까워하며 주저앉아 꽃잎을 주웠다. 그때 머리 위에서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들렸다.
“내 화원에서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