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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38)화 (737/1,192)

제738화

사앵앵은 의아했다. 이렇게 쉽게 그녀를 풀어 줄 줄은 정말 몰랐다. 관병들이 밖에 있다는 말에 그녀의 심장은 벌써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날 보내 줄 거예요?”

“내가 어제 한 말 기억하오?”

사정우가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내가 말했잖소.”

사앵앵은 어리둥절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사정우는 빙긋 웃으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안채의 대문도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문 뒤쪽에 서 있던 그는 지면에 거대한 반점을 남긴 금빛 햇살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병사들의 갑옷에 햇빛이 반사되어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분명 장검을 든 병사들이 이곳을 겹겹이 에워쌌을 테지. 설령 날개가 돋아난다 해도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저들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건 이곳에 사앵앵이 있기 때문일 터.

그는 가슴을 펴고 햇볕 아래로 나왔다. 그동안 숨어 다니느라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는가. 이제야 편안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농가 앞 넓은 평지에 갑옷을 입은 수많은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마치 중대한 의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 숙연하고 장엄한 모습이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자는 키가 크고 우람한 몸에 짙은 눈썹과 큰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그의 눈두덩과 볼이 움푹 들어가 매우 초췌해 보였지만 자태만큼은 고고한 천신과 같았다. 흔들릴 것 같지 않던 그 사내는 사앵앵을 발견한 순간 눈가에 물기를 내비쳤다. 사정우는 사앵앵을 돌아봤다.

“사 장군이 직접 데리러 왔으니 어서 그와 돌아가시오.”

사앵앵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사장풍에게 다가가려 했다. 순간, 강력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사정우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팔로는 그녀의 목을 쥐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 위에 차가운 비수의 촉감이 끼쳤다.

“사정우!”

사장풍은 일갈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어서 그녀를 놓아주어라! 죽을 때가 되어서도 반성할 줄 모르느냐?”

사정우는 음흉하게 웃었다.

“사장풍, 이 여인을 놔주면 난 죽잖소.”

그는 낮은 목소리로 사앵앵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를 탓하지 마시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난 죽기 싫소. 앵앵, 나는 정말 당신을 좋아하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지만 내 목숨은 하나밖에 없지 않소.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

사앵앵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짜 사정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목 위에 칼을 들이대는 이가 바로 사정우였다.

그가 사랑한 건 시종일관 자기 자신뿐이었다.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의 모습도 그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연기일 뿐. 어쩌면 너무 실감 나는 연기를 해서 그 자신조차 속여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줄곧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을 뿐, 예전 그대로 교만한 사정우일 뿐이었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여전히 위장술에 능한 소인배였다. 그녀가 말했다.

“사정우, 정말 나를 죽이고 싶어요?”

“죽이기는 아깝지만,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당신과 함께 죽을 수밖에.”

사정우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신경 쓰였던 여인은 없었소.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당신을 가질 수 없지. 그런데 앵앵, 날 속이지 말았어야 했소. 그렇게 잘해 줬는데 왜 이렇게 몰인정한 거요? 내가 가라고 했다고 정말 날 떠나려 한 거요? 당신이 가면 난 어떻게 하라고?”

사앵앵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언제 당신을 속였다는 거죠?”

“그동안 당신은 얌전했고 순종적이었지. 난 당신이 나와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거짓이었다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속인 적이 없어요.”

사앵앵은 사장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순종한 이유는 부군께서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살아남기 위함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사정우는 넋이 나갔다. 도망가는 여정 내내 그는 계속 사앵앵의 의도를 짐작하려고 애썼다. 그녀가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건 자신을 미혹한 후에 도망가거나 혹은 그에게 다소의 정이 들어서 반항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녀는 단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장풍이 반드시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소?”

“물론.”

사앵앵의 표정엔 굳건한 의지가 가득했다.

“내가 하늘 끝까지 오르고 황천에 떨어져도 그는 나를 구하러 올 거예요.”

사장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사앵앵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부의 표정은 한결같이 신뢰로 굳건했다.

“안타깝군.”

사정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힘들게 부인을 찾았는데 어쩐담. 난 당신들이 날 죽이고 함께 돌아가게 두지 않을 거요. 사장풍, 나를 보내 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인을 죽여 버릴 테니.”

사장풍이 머뭇거리는데 사앵앵이 소리쳤다.

“사장풍, 당신의 준성전準星箭(반드시 맞추는 화살)을 잊었나요?”

사앵앵의 말에 사장풍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의 활 끝은 정확히 사정우를 겨눴다.

사정우는 사장풍이 활을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 장군은 아내를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 활을 들고 이런 모험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자칫 손이라도 미끄러져서 사앵앵을 쏠까 봐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하지만 사앵앵에게선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사정우 역시 희망을 버리게 됐다. 그는 그녀가 제게 마음의 문을 열 거라고 믿고 싶었다. 사장풍이 조금 더 늦게 왔다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가 처음에 사앵앵을 보내 주려고 했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행동에 감동해 가기 싫다고 울부짖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앵앵은 어떠한 고민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그의 자존심을 땅바닥에 패대기친 것과 같았다. 마치 그가 준 모든 것을 잔인하게 짓밟힌 기분이었다.

“앵앵,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해 줬는데 한 번도 감동하지 않았소?”

사앵앵이 말했다.

“그건 내가 진심과 가식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날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내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잖아요. 사정우,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착각에 빠진 거예요? 날 위해 뭐든 하겠다고 했지만 당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진심이 드러났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사장풍은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는 지금 우리에게 활을 겨누고 있소.”

“우리한테 겨누는 게 아니고 당신한테 겨누고 있는 거예요.”

사앵앵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한 거예요.”

“죽는 게 두렵지 않소?”

“두려워요. 하지만… 난 그를 믿어요.”

사앵앵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 믿어요.”

사정우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니. 한데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믿는다고 했다.

“사장풍.”

사정우는 도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 칼이 빠른지 네 화살이 빠른지 한번 봐야겠군!”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화살이 빗나갈까 봐 두렵진 않느냐? 사앵앵의 목숨을 네가 직접 거두게 될 것이다.”

“내게 혹시 따위의 일은 없다.”

사장풍은 한쪽 눈을 감고 활시위를 당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정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장풍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그의 화살은 천둥처럼 쏘아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매서운 기세에 충격을 받은 사정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이마에 꽂혔다. 입을 쩍 벌린 그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화살을 쏜 것일까? 마음이 쓰일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인데 이렇게나 정확히 자신만을 노릴 줄은…….

사정우의 몸이 천천히 뒤로 기울어졌다. 그 손에 들려 있던 비수가 떨어졌다. 그는 이내 털썩,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완벽한 패배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부부에게, 그는 완패한 것이다.

이제 사정우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서로에게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부부가 세상에 존재하다니.

애석하게도 그는 죽을 때가 되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신념이 그들을 지탱해 주는 걸까?

사앵앵은 사정우가 쓰러질 때 그의 눈빛에서 어리둥절함을 읽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그와 같은 사람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장풍은 들고 있던 활을 내던지고 한걸음에 뛰어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죄책감과 후회로 범벅된 얼굴을 한 채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앵앵,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오.”

사앵앵은 그를 꼭 껴안았다.

“왔으니 되었어요. 이렇게 찾아와 주었으니 늦지 않은 거예요.”

그녀는 그의 맹세를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면 그가 곧 올 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 * *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장풍은 사앵앵과 사정우의 여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앵앵이 자진해서 물어보았다.

“알고 싶지 않아요, 사정우가 도망갈 때 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장풍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와 무슨 일이 있었겠소?”

“당신이 왔을 때 봤잖아요. 저는 그와 한방에서 지냈어요.”

“그게 뭐 어떻소?”

사장풍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당신을 믿소.”

믿는다는 한마디가 수많은 말을 대신했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걸 깨달은 사앵앵은 웃으며 그의 품에 기대었다.

“봉봉과 금언이 겁에 질려 있겠죠.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아이들은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었소. 금언이 울음을 몇 번 터뜨리긴 했지만, 당신이 제대로 가르친 봉봉은 아주 의젓했소.”

안심한 사앵앵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요? 제 걱정 안 했어요?”

사장풍은 그녀의 손을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소. 설마 걱정을 안 했겠소?”

“화살을 쏠 때는 빗나갈까 봐 걱정하지 않았어요?”

“걱정하지 않았소.”

사장풍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정우의 머리를 당신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큰 감자라고 생각했소.”

그들이 서북에 있을 때, 그런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궁술로 유명한 사냥꾼이 비무比武를 하려고 사장풍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여행객이 자극적인 비무 방식을 제시했다. 감자를 머리에 올려놓은 사람을 멀리 세워 놓고 시합을 하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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