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7화
사정우는 거침없이 뻗어 오는 손아귀를 피해 거리에 숨어 사는 쥐처럼 도망 다녔다.
원래는 교외에 있는 산장에 숨어 소란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려고 했다. 두 승상의 능력과 수년 동안 쌓아온 조정 인맥이면 삼품 장군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장풍의 손에 황제가 하사한 금패가 있을 줄이야! 근교에 있는 산장은 조만간 발각될 위험이 있기에, 사정우는 사앵앵과 수하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렵지 않았다. 설마 이 넓은 동월 땅에 그가 몸담을 만한 곳 하나 없을까?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단지 버리고 온 재산이 아까울 뿐이었다. 그 재산을 모으는 데 몇 년이 걸렸는데, 모든 게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재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총명한 두뇌와 젊음이 있었다. 재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여자였다. 이렇게 목석같은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그녀에게서는 잔잔한 미소조차 볼 수 없었다.
그의 오랜 측근인 주잠은 사앵앵을 보고 딱딱한 그루터기 같은 여자라 말했다. 아무리 딱딱해도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사앵앵 앞에서 궁상맞은 모습을 보였다.
식사할 때 그는 일부러 사앵앵에게 먼저 먹으라고 했고, 그는 그녀가 남긴 음식을 먹었다. 그는 궁색함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직접 사앵앵에게 보여 주었다.
밤에 그는 그녀와 같은 방에서 잤지만, 사앵앵는 침상에서 잠들고 그는 차갑고 딱딱한 땅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몸 이곳저곳이 다 아팠다. 아침마다 주잠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났지만 사앵앵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산을 오르고 재를 넘느라 그의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지는 것 또한 아무 상관 없었다. 하지만 사앵앵의 옷이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곧장 장터에서 새것을 사 와 갈아입게 했다.
“나 사정우의 여자는 절대 찢어진 옷을 입지 않소.”
이 말을 들은 사앵앵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식사할 때 평소보다 음식을 좀 더 많이 남겼다. 그는 사앵앵에게 어떻게든 잘하려고 애썼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언제나 만족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루는 간밤에 사앵앵이 고열에 시달렸다. 그는 친히 그녀 옆에 앉아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려 주고 위험을 무릅쓰고 약을 사다 주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다 그는 논에서 자빠지고 말았다. 이마엔 시퍼런 멍이 들었고 온몸은 구정물로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하지만 사앵앵을 위해 산 약제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그가 몸을 던져 지켜 낸 덕이었다.
그날도 사앵앵은 웃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보기엔 그들의 사이가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사정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사앵앵이 자신의 아래 복종하고 사장풍을 완전히 잊게 될 거라고. 진심은 환난 중에 가장 잘 드러난다는 말을 그녀 역시 믿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현재 커다란 도박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걸어서 사앵앵의 환심을 얻고자 한 것이다.
어느 날 사앵앵이 그에게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사정우는 그녀를 속이지 않고, 북으로 간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북쪽에 사업을 차려 놓았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그는 그녀에게 부귀영화를 안겨 줄 수 있었다.
그는 사앵앵에게 북쪽 지방의 풍경을 묘사하며 그곳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며 구름은 새하얗다고 알려 주었다.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려도 그 끝에 닿을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는 소와 양이 무리를 지어 다니고, 유목민들은 어디든 천막을 펴놓고 자유롭게 살아간다고도.
사앵앵은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심지어 어떤 날은 그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초원을 보고 싶어 했다.
여정을 떠나니 사정우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예전의 음험하고 교활했던 심사가 없어지고 계산이 앞서는 것도 사라졌다. 금의옥식을 하던 나리가 야산과 들판에 이르니 진짜 사내처럼 행동했다. 또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고 비를 맞으면서 살도 빠졌다.
아무리 험한 고생을 해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사앵앵이 고생하는 건 조금도 참지 못했다.
한번은 관병을 피하기 위해 산길을 멀리 돌아가야 했다. 보자기엔 차가운 찐빵만 남아 있었다. 그는 사앵앵이 찐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몰래 근처 농가로 내려간 그는 장아찌를 구해 와서 그녀가 찐빵과 함께 먹을 수 있게 했다.
그의 옆에 있던 주잠은 계속 이러다간 언젠간 관병들에게 들킬 거라고 불평했다. 하지만 사정우는 단호했다. 오히려 관병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있어도 제 여자는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호통쳤다.
주잠은 사앵앵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모두 사앵앵 때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주인은 영웅도 벗어나기 어렵다는 미인계에 빠진 것이다.
만약 사앵앵를 일찌감치 죽였더라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여전히 임안성에서 금의옥식을 누리며 노복이 가득한 영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모두 끝장날 것이다.
도망자의 여정은 아주 고달팠지만, 사정우는 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예쁜 야생화를 발견한 그는 사앵앵에게 한 다발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곧장 꺾으러 갔다. 주잠은 그가 꽃을 따는 틈을 타 사앵앵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주잠은 사앵앵이 연약한 아녀자가 아니라 뼈를 발라내는 기술을 가진 여자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단번에 그녀를 죽이진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본 체력이 근본적으로 달랐고, 결국 사앵앵은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기회를 노려 그녀의 칼을 빼앗은 주잠은 몸을 날려 그녀를 덮치고, 죽자 사자 그녀의 목을 졸랐다.
고요한 숲속, 꽃향기를 싣고 온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밑에서 사앵앵은 안간힘을 쓰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점점 힘이 빠져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질식을 당하는 고통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정우에게 죽는 것도 아니고 그의 측근 손에 죽다니. 그녀는 죽어라 목을 조르는 주잠의 팔을 꼬집고 손톱을 살에 박아 넣었다. 하지만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주잠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릿해져서 주잠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자신을 짓누르던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푹,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목을 조르던 주잠의 손에 힘이 스르륵 풀리고 그가 옆으로 쓰러졌다. 이어서 누군가 그녀를 안고 애타게 소리쳤다.
“앵앵, 앵앵, 놀라게 하지 말고 눈 뜨고 날 좀 보시오! 앵앵……!”
사앵앵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목구멍이 불에 탄 것처럼 따가웠다. 잠시 뒤 눈앞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땅에 널브러진 주잠의 등에는 검이 꽂혀 있었다. 그 검은 사정우가 줄곧 손에서 놓지 않았던 보검이었다.
사앵앵은 목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입을 열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살려 줘서… 고마워요.”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자, 어서 물을 좀.”
사정우는 물주머니를 가져와 그녀의 입가에 대줬다.
“내가 잘못했소. 하마터면 당신을 해칠 뻔했소. 이 짐승 같은 놈이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소. 내가 이놈을 믿는 게 아니었소.”
사앵앵은 물을 마시고 한숨 돌렸다.
“됐어요. 이미 죽었잖아요.”
그녀는 사정우의 행동이 다소 뜻밖이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가장 신임하는 주잠을 살해하다니. 사정우는 검을 빼서 주잠의 의포에 혈흔을 닦고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는 여전히 사앵앵이 넋을 놓고 있는 걸 보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허리를 굽힌 그는 따뜻한 음성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안심하시오. 내가 곁에 있는 한… 아무도 당신을 업신여기지 못할 거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목숨도 걸 수 있소.”
* * *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한 농가에서 숙박을 청했다. 북방에 사는 친척에게 가려다 길을 잃고 숲속에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농부는 그들이 부부인 줄 알고 방을 한 칸만 마련해 주었다. 산속의 밤은 매우 추웠지만 사정우는 여전히 땅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여전히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아침, 따가운 햇볕이 산안개를 뚫고 작은 농가를 비췄다.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 사정우는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어렴풋한 빛줄기가 방을 비추자 침상에 드리워진 장막 너머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눈을 비비던 그는 별안간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침인데 너무 조용했다.
농가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 바로 일을 시작한다. 장작을 패는 소리, 불을 지피는 소리, 물을 퍼내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솥에 찐빵을 찌는 소리, 기침 소리, 말소리, 심지어 새소리까지. 새벽부터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지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까치발로 창가에 다가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차가운 번뜩임은 분명히 보았다. 그의 심장이 순간 뚝 떨어지는 듯했다. 일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침상에 누워 있는 사앵앵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전혀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그동안 그녀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고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다만 말이 별로 없었다. 예전처럼 그를 모욕하지도 않았고 사 장군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돌아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와 함께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제게 마음의 문을 다 열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해가 뜬 후 방 안도 환해졌다. 사앵앵이 그제야 몸을 뒤척거렸다. 그는 조용히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앵앵, 깼소?”
사앵앵은 짧게 대답한 후 장막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바깥에 서 있던 사정우는 초조한 듯 두 손을 비비며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사앵앵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밖에 있소.”
“누구요?”
“잘 모르겠소.”
사정우가 주춤거리며 말했다.
“어쩌면 관병일지도 모르오.”
사앵앵은 잠자코 옷을 갈아입더니 잠시 후에 장막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할 거예요?”
사정우는 사실대로 말했다.
“어찌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소.”
그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시오. 당신을 보내 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