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35)화 (734/1,192)

제735화

달빛도 자취를 감춘 스산한 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지붕 위에 엎드린 채 주위를 경계했다. 사방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그는 동료들을 향해 손짓했고, 곧 자신이 먼저 뛰어내렸다. 그 뒤로 두 번째 복면인이 따랐고 세 번째 복면인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뒤따랐다.

성 동쪽에 비해 서쪽은 한산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촛불 켠 집도 없어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들 비싼 초를 낭비하느니 빨리 잠자리에 들자는 식이었다.

세 명의 복면인은 몸놀림이 쏜살같았다. 마치 유령처럼 어둠 속을 질주했다. 그들에게 이곳은 매우 익숙한 곳임이 틀림없었다. 세 명의 복면인은 순식간에 작은 문으로 사라졌다.

문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보고하기 위해 우두머리를 찾았다. 그런데 바깥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관청에서 도둑놈을 잡으러 왔다. 빨리 문을 열어라!”

조용한 뒷마당엔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모두 순식간에 한 방향으로 사라졌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환한 것을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 같았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열었다. 그는 포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군사 나리, 이렇게 늦었는데 무슨 일…….”

“말이 많구나!”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포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들었느냐? 도둑놈을 잡으러 왔대도!”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군사 나리! 저희 저택에 어떻게 도둑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뒷마당엔 평소 드나드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들 앞마당으로 다니지요. 군사 나리께선 이렇게 늦게까지 고생하시는군요. 앞마당에서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군사 나리께서 피로를 풀 수 있도록 사람을 불러 노래 한 곡조 부르라고 하겠습니다.”

“여봐라!”

포졸은 큰소리로 외쳤다.

“이놈을 붙잡아라.”

두 병사가 앞으로 나와 관리인의 양팔을 비틀자 그는 돼지 멱따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군사 나리, 뭐 하러 소인을 잡아가십니까? 소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사람을 잡아가는 게 어디 있소? 엄연히 법이 있는데…….”

그가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앞마당에선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순간 관리인의 낯빛이 굳어졌다. 정신을 차린 그가 포졸들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군사 나리, 소인이 보니 못 뵙던 분 같은데 어디에서…….”

포졸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까짓 게 감히 본관이 어디서 일하는지를 묻는 것이냐?”

문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은 집 안팎을 샅샅이 수색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관리인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군사 나리, 소인이 계속 뒷마당을 지키고 있었지만 정말 이곳엔 쥐새끼 하나 없었습니다. 어쩌면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갔는지도 모릅니다. 군사 나리,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곳을 수색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포졸은 관리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추궁했다.

“이렇게 큰 뒷마당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네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이곳 관리인이 분명한데… 문지기는 어딜 가고?”

“이 뒷마당엔 지킬 것도 없는데 뭐 하러 문지기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소인 혼자…….”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나리, 여기 있습니다!”

그 외침에 낯빛이 굳어진 포졸은 도포 자락을 걷고 앞으로 달려갔다. 뒷마당 한가운데 우뚝 솟은 큰 나무 위에서 난데없이 새하얀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시 나무 밑으로 시선을 내리자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포졸이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빨리 쫓아가거라!”

횃불이 동굴 입구를 비추자 병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병사들을 본 관리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입술을 들썩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굴 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탁 트인 복도, 등불을 환하게 밝힌 석벽, 가지런하게 놓인 방들 그리고 사장풍이 한참이나 찾아다닌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그곳에 있었다.

한바탕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검은 옷의 괴한들은 맹렬히 반항했다. 좁은 복도 입구에 있는 포졸들은 쉽게 전진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괴한들 사이에 균열이 일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창을 거꾸로 들고 자기 동료들을 찔러 버린 것이다. 다만 창을 든 이는 매우 용맹하여 여러 명의 공격에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포졸들은 이 틈을 타 공격을 퍼부었다. 한동안 칼부림이 이어졌고, 이따금 검에 찔린 사람의 비명만이 들려왔다.

복도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방 안은 오히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십여 명의 처녀들이 몸을 웅크리고 한데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밖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우리를 구하러 왔나?”

그녀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의 눈에 희망이 서렸다. 그녀들은 너도나도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살려 주세요! 우리 좀 구해 주세요!”

그러나 싸우는 소리만 맹렬하게 들릴 뿐, 누구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아가씨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긴장된 눈빛을 교환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나쁜 사람들이 이긴다면, 자신들은……. 얼른 다시 구석에 가서 앉은 여자들은 마음을 졸이며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싸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곤 누군가 열쇠를 들고 와 방문을 열었다. 갑옷을 입고 구레나룻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

“두려워 마시오. 당신들을 구하러 왔소.”

* * *

이날 밤, 염춘원뿐만 아니라 묘수 도방, 금창 포목, 창륭 쌀집, 금정각 그리고 몇몇 상점 주인과 관리인이 붙잡혔다. 밤사이에 일어난 격변에 다들 연유도 모른 채 붙잡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한창 단잠에 빠져 있던 두 승상은 총관리인의 외침에 눈을 떴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작은 어르신께 큰일이 났습니다.”

두 승상은 잠결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냐?”

“관병들이 사가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듣자 하니… 작은 어르신 명의의 가게도 모두 압류했다고 합니다.”

두 승상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어째서 승상인 나에게 아무도 알리지 않았단 말인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사내가 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그 사내는 금군도 아니고 순포 오영 소속도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도 어느 소속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류 총령이 수하들을 데리고 급히 확인하러 가던 중에 얼른 나리께 고하라며 소인에게 알리셨습니다.”

두 승상은 급히 사람을 불러, 옷을 입고 가마를 준비하게 했다. 사정우가 일을 쳤다면 사전에 제게 언질이라도 줘야 했다. 승상 대인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다니! 그는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승상의 지위에 도전장을 내민단 말인가?

* * *

소식을 듣고 사부로 달려간 류명풍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사부에 도착하자마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빼곡히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심상치 않은 듯했다.

이들은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으로 사장풍 휘하에 있는 수하들이었다.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남자는 곽강霍剛이란 사람으로 사장풍의 부장이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도성에 들어왔는데 왜 아무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나둘 의문이 쌓일수록 마음속 불안은 점점 커졌다. 하지만 막다른 곳에 몰리기 전까지 그는 내색할 수 없었다. 류명풍은 굳은 얼굴로 곽강을 쏘아봤다.

“곽 장군, 황상의 밀명 없이는 주둔군이 입성할 수 없는 것 모르시오? 한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다니… 그 죄를 알고 있소?”

거친 무인인 곽강은 류명풍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 장군은 사 장군의 명령만 듣소. 장군께서 입성해 도둑놈들을 잡으라 하셨소. 다른 것은 모르오.”

류명풍이 주위를 둘러봤다.

“사 장군은 어디에 계시오?”

“장군님 일을 당신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소.”

“곽 장군!”

류명풍은 분노해 소리쳤다.

“하면 사부를 에워싸고 있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오? 설마 사 주인장이 도둑이라는 거요? 그가 두 승상의 매부라는 것은 알고 있소이까?”

류명풍은 특별히 사정우와 두 승상의 관계를 말해 곽강을 깨우치려 했다. 하지만 곽강은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그자가 바로 도둑놈이오.”

곽강과 류명풍이 사부 밖에서 실랑이할 때, 사장풍은 수하들을 데리고 사부 안을 수색하고 있었다. 사정우의 서재까지 들어간 그는 마침내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 그는 속으로 기뻐하며 수하들을 데리고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 안엔 밀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어슴푸레한 불빛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석벽엔 희미한 유등이 켜져 있었다. 어딘가로 통하는 복도를 찾은 것이다!

사장풍은 수하들을 데리고 굽어진 땅굴을 질주했다. 마침내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가 자세히 살펴보니 방금 전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염춘원 지하였다. 이제 보니 사정우 저택과 염춘원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밀도密道가 있었다. 어쩐지 사정우와 염춘원의 접점을 찾을 수 없더라니……. 그는 계속 밀도를 이용해 이곳에 드나든 것이다.

밀도에는 전투의 흔적이 선명했다. 방금 전엔 사앵앵을 구할 생각에 제대로 살피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밀도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고 넓었다. 사장풍이 확인한 곳은 수감된 처녀들의 방과 괴한들의 거처뿐이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방향의 밀도가 몇 개 더 있었다. 하나는 사부로 통하는 것이라면… 두 개는 어디로 이어진 것일까?

사장풍은 병사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각각 다른 밀도로 보냈다. 그가 향한 밀도는 길이 복잡했고 갈수록 어두워졌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다른 동굴 입구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이 어여쁘게 빛나고 있었다.

뜻밖에도 이곳은 도성 밖이었다. 임안성의 성문은 사정우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성문이 닫혔든 열렸든 그는 마음대로 나가고 들어올 수 있었다.

산비탈에 올라선 사장풍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캄캄한 읍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읍내는 유가진劉家鎮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임안성 근교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남북으로 통하는 대로가 모두 유가진을 지나간다. 만약 사정우가 사앵앵을 데리고 도망쳤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그녀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오랫동안 이 계획을 세웠다. 사정우의 둥지만 뒤지면 사앵앵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조심스레 뛰어왔는데, 결국 그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하늘에 걸린 밝은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앵앵,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요.”

그는 애타는 마음을 애써 숨겼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사장풍은 읍내에 병사들을 보내 객잔을 수색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갔다.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입을 비틀어 열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