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0화
원천림이 나가자 사앵앵이 사장풍을 힐끔 쳐다봤다.
“왜 당신이 차를 들고 들어와요? 천아는요?”
사장풍은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부인을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안 되오?”
사앵앵은 그의 손을 피했다.
“어서 가요, 치근덕대지 말고! 어서 당신 할 일이나 해요.”
그때 사장풍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어 당신을 찾은 거요. 지난번에 사정우가 선물로 준 그 옥패, 아직도 가지고 있소?”
“있어요. 왜요?”
“계속 사정우와 창륭 쌀집 간에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잖소? 생면부지인 아가씨를 구해서 그 옥패를 가지고 창륭 쌀집에 보내면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소?”
사앵앵은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창륭 쌀집의 사람이 그 옥패를 알아본다면 당연히 반응할 거라는 말이군요?”
“우리는 멀리서 지켜봅시다.”
“왠지 통할 것 같아요.”
“그런데 누굴 보내야 할까?”
사앵앵은 바로 적임자를 떠올렸다. 저택에 은환이라는 예쁘장한 시녀가 있는데, 머리도 기민해서 이 일에 딱 알맞았다.
그녀는 은환을 불러와 할 일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리곤 옷상자에서 밝은색 옷을 찾아 그녀에게 입히고 약간의 치장까지 더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꼭 어여쁜 새색시 같았다.
사앵앵은 일부러 그녀에게 선홍색의 허리띠를 매어 주었고, 그 허리띠에 옥패를 매달았다. 붉은 바탕에 푸른 옥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은환은 담이 크고 쉽게 겁먹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쌀 포대와 돈을 들고 담담하게 창륭 쌀집으로 갔다.
가마 안에 앉은 사앵앵과 사장풍은 멀리 떨어진 채 은환을 따라갔다. 창륭 쌀집에 도착한 은환이 포대를 건네며 쌀을 사려고 하자 쌀집 점원은 쌀을 퍼서 무게를 재어 보는 등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은환은 일부러 쌀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허리춤에 매달린 옥패가 그녀의 걸음걸이에 따라 달랑거렸고 계산대에 앉아 있던 장삼을 입은 한 남자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은환을 여러 번 훑어보는가 싶더니 점원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점원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은환에게 보인 태도가 급격히 달라진 것이다. 그는 훨씬 더 공손하고 살갑게 행동했고, 그녀의 쌀 포대도 터질 듯 채워 주었다.
문발을 살짝 든 사장풍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공간이 협소한 탓에 사앵앵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녀가 초조하게 물었다.
“어때요? 뭘 알아냈어요?”
“집에 돌아가서 쌀을 재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은환이 쌀 포대를 안고 창륭 쌀집을 나오기까지 사장풍과 사앵앵은 가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은환을 미행하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들은 은환의 뒤에 따라붙어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에 돌아와 쌀을 달아 보니 과연 훨씬 무거웠다. 쌀을 한 두斗나 더 담아준 것이다. 보통 쌀은 딱 한 두씩 담는 그릇으로 퍼주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담는 건 비정상적이었다.
이제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사장풍의 분석에 따르면, 점원이 그녀의 옥패를 알아 본 것이다. 분명 은환이 사정우와 내연 관계라고 생각해서 훗날 잘 보이려는 마음에 그녀에게 쌀 한 두를 더 얹어준 것이다.
만약 창륭 쌀집과 사정우가 관련이 있다면, 원래 창륭 쌀집의 주인이었던 도 주인장의 실종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사장풍은 사건의 진실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밤마다 사장풍이 사앵앵을 괴롭히는 건 사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사앵앵을 곯아떨어지게 만들곤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며칠째 염춘원 맞은편 건물 지붕에 엎드려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장풍은 적들이 마각을 드러낼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며칠간의 그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게 사실로 증명됐다. 하지만 그가 본 일은 당분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다. 사앵앵에게도 물론 말할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엔 너무도 위험했다. 사장풍은 준비가 될 때까지 조용히 움직이기로 했다.
* * *
사장풍의 삶은 요즘 너무 한가로워 보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에게 권법을 가르치고, 점심 식사 후에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여의루에 가서 사앵앵을 데리고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해가 서쪽으로 질 무렵에는 부부가 함께 장터 구경을 갔다.
사장풍은 사앵앵에게 설탕에 굴린 밤 한 봉지를 사 주었고,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먹으며 거리를 걸었다. 저잣거리에 있는 다른 부부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침 찻집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사정우는 사장풍과 사앵앵을 발견했다. 그들은 천천히 그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서로 은애하는 남녀를 보면서 그의 안색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사장풍은 군직에 있으면서도 주둔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바람에 사정우는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요즘 그는 사장풍과 사앵앵이 함께 있으면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그날 사앵앵이 손수건으로 사장풍의 입가를 닦아 주었던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눈빛, 다정한 태도, 그녀가 자신에게도 아리따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이런 상상이 떠오르니 사정우는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저택에 있는 여인 중 그 누구도 제 입가를 닦아 준 이는 없었다. 두소진조차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권문세가의 천금으로 자라서 사리에 밝고 단아하며 현명하게 행동했다. 얌전하지 못하게 능동적으로 호의를 표시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경망스러운 짓이었다.
그나마 다른 첩들은 침상 위에서 그와 시시덕거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그때가 전부였다. 침상에서 내려오면 함부로 그에게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사앵앵은 찻집 아래에서 껍질을 깐 밤을 계속 사장풍에게 먹여 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채신머리없이!
물론 여자가 그에게 음식을 먹여 준 적은 많았다. 손이든 입이든… 농지거리를 속삭이며, 은밀하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입에 음식을 넣어준 적은 없었다. 그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그는 정말 알고 싶었다.
저 부부가 함께 지내는 방법은 그에게 너무 생소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장군은 부인 앞에서 한없이 어린 아이 같이 굴었다. 부인이 입을 닦아 주고 음식을 먹여 주는 것을 내버려 두다니!
아니, 그뿐인가. 보통 부인들은 저택 대문을 넘지 않을뿐더러 중문도 밟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앵앵은 얼굴을 다 드러내고 바깥을 활보하며 외간 남자들과도 거리낌 없이 대화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부인을 사내보다 더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도록 두다니…….
그는 사장풍이 첩을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와 사앵앵은 밤마다 동침하고 있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뻗어 가자, 그는 벌레가 심장을 파먹는 것처럼 괴롭고 속이 답답했다.
사장풍과 사앵앵은 그가 있던 찻집을 지나 점점 멀어지더니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눈길을 거두고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류명풍은 정성스럽게 그에게 차를 따랐다.
“사 주인장, 마음 놓으십시오. 제가 반드시 사앵앵을 댁으로 보내겠습니다. 그 뒤론 사 주인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정우는 눈을 치켜떴다.
“사장풍이 사사로이 주둔지를 이탈했다고 하지 않았소? 왜 아직도 아무 일도 없는 거요?”
류명풍 역시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을 황제께 직접 보고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으십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엄명하신 황상께서는 벼슬아치가 제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데 말입니다. 주둔지 총수로서 매일 부지런히 훈련해야 할 사장풍이 열흘 넘도록 집에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다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혹시 가동이 황상 곁에서 그를 두둔하는 건 아니오?”
“가 대인은 사장풍과 동향입니다. 저번에 사장풍이 처자식과 함께 가 대인의 집을 방문한 걸 보니 사이가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공춘홍이 곳간 방화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가 대인께 청했는데 그땐 거절했단 말이죠. 그런 걸 보면 또 그리 깊은 관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 대인이 사 주인장과 두 승상의 관계를 알고 있기에 쉽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듯합니다.”
사정우는 차를 마시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사장풍이 주둔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일을 벌이기 어렵소.”
류명풍이 대답했다.
“사장풍이 해임되지 않은 이상 계속 주둔지로 돌아가지 않을 순 없을 겁니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더 쉽게 약점을 잡히는 법이지요. 어쩌면 황상께선 일부러 모른 체하고 그를 주시하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낙네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도성의 천하는 여전히 사 주인장의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사장풍이 떠나기만 하면 바로 사앵앵을 잡아 올 기회가 올 겁니다.”
“그리고 그 구문제독 공춘홍 말이오.”
사정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거추장스럽소. 만약 나를 위해 쓸 수 없다면 차라리…….”
그는 말없이 몸짓으로 뜻을 전했다. 그의 뜻을 이해한 류명풍의 가슴이 철렁했다.
“알겠습니다. 사 주인장.”
잠시 후, 그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사 주인장, 사앵앵이 어떤 수단과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도 같은 몸짓을 했다. 순간 사정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류명풍을 쏘아보며 낮게 말했다.
“나의 허락 없이는 절대 그녀를 건드리지 마시오.”
그 싸늘함에 류명풍은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사정우는 자신의 앞길에 피해를 주는 놈들은 십중팔구 다 죽였다. 그랬던 그가 사앵앵에게는 달랐다. 그 여자가 몇 번이고 그를 방해했음에도 그녀의 목숨을 거두진 않았다. 설마…….
사정우를 슬쩍 훑어본 류명풍은 그가 또 넋을 놓고 있는 걸 발견했다.
* * *
사앵앵과 사장풍은 집으로 돌아왔다. 금방 뒤따라 들어온 원천림이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인사를 건넸다.
“주인어른, 장군,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사앵앵이 물었다.
“뭘 가져왔어요?”
“큰아가씨께서 제 어머니가 담근 장아찌를 좋아한다고 하셔서요. 어머님이 직접 챙겨 주셨습니다.”
사앵앵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세심하기도 하셔라. 이렇게 살뜰히 챙겨 주시다니.”
“어머니께서 큰 아가씨와 도련님을 친손자처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사앵앵은 하녀에게 장아찌를 들고 들어가라 분부했다. 그녀는 원천림과 마주 앉은 뒤, 일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상대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사앵앵의 질문에 원천림이 곧장 대답했다.
“곧 도착합니다. 하루나 이틀이면 됩니다. 또 예전에 함께 다니던 형제들을 찾았습니다! 형제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하니, 다들 주인어른을 만난 적 있다며 흔쾌히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우선 그들은 단거리 상대로 보냈습니다. 나중에 인원이 다 모이면 그때 다시 조정하겠습니다.”
“좋아요. 그 부분은 원 관리인께서 알아서 하면 됩니다.”
원천림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참, 주인어른! 도 주인장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