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3화
“저희 봉봉이는 장사를 좋아하죠. 훗날 봉봉이에게 장가를 들려는 사람은 저 애 아버지처럼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줘야 할 거예요. 금언이는 자기 아버지처럼 대장군이 되고 싶다니까 현명하고 어진 부인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사앵앵이 완곡하게 기홍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는 건 다들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황실과의 혼사를 감히 올려다볼 수 없다는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기홍은 혹여 백천범이 마음에 담아둘까 봐 녹하에게 눈짓을 보낸 후에 자기 아들 얘기를 꺼냈다.
“저희 영안이는 성격이 워낙 차가워 훗날 어느 아가씨가 시집을 오려 할까 모르겠습니다.”
녹하가 놀리며 말했다.
“영 대인도 차가운 성격인데 너처럼 현모양처를 만났잖아?”
사앵앵이 영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침 청양이 영안 앞에 다가와 활짝 웃으며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앵앵이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공주께서는 영안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늘 영안과 함께 놀지 않습니까?”
기홍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두 아이는 함께 자란 동무지요. 저희 영안이 어찌 감히 공주 전하를 올려다보겠습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천범은 다들 청양 공주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역시… 귀신보다 더 무섭다는 소문이 퍼지니 모두들 청양이가 꺼려지는 것이겠지. 기홍은 자신이 한 말에 혹여 황후가 서운해할까 봐 서둘러 해명했다.
“마마, 다른 뜻은 없으니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시어요. 저희 영 대인은 이품 관우이니, 문벌을 따지면 공주 전하에 비해 저희가 너무 부족합니다.”
백천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분명 문벌을 따지지 않을 거라 했는데… 이는 너무 뻔한 변명이지 않은가. 녹하가 화제를 돌렸다.
“저희 난청이는 별로 걱정할 게 없습니다. 외모도 괜찮고 공부도 좋아하고요. 한림 대원사도 장래가 밝다고 할 정도이니, 부인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지요. 하지만 소타는 제 아비를 너무 똑 닮았습니다. 전병처럼 납대대한 얼굴로 시집을 가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백천범이 그녀를 위로했다.
“소타는 아직 어린걸요. 여자는 자라면서 열댓 번도 더 바뀐다잖아요. 좀 더 크면 얼굴이 활짝 필 거예요.”
녹하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변한다 한들 가 대인을 쏙 닮았는걸요. 제 아비가 아무리 예뻐 봤자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거나하게 취해 있던 가 대인은 녹하의 말에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못생겼으면 어째서 나한테 시집을 오려 한 거야?”
녹하가 말했다.
“애당초 눈이 멀었던 거지.”
“…….”
다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 * *
새해가 지난 뒤 금세 꽃피는 계절이 찾아왔다. 눈보라로 인해 강남에 발이 묶여 있던 원천림은 새해가 되어서야 화물을 한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주인어른, 영감님께서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주인어른께서 원하시던 물건은 금세 나가 아무도 구하지 못했는데, 영감님께서 나서시니 한 번에 구해졌습니다.”
“그럼요.”
사앵앵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칭송하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저희 아버지가 수성에서 장사하신 지 벌써 수십 년 인걸요. 온갖 풍파를 다 겪으셨으니 웬만한 일엔 다 방법이 있으실 겁니다.”
사실 원천림은 이번에 떼어 온 물건이 자꾸 신경 쓰였다. 사앵앵이 물건을 정리할 때 그가 물었다.
“주인어른, 왜 이렇게 잡다한 물건들을 구하셨는지요? 혹시 새로운 가게를 열려고 하십니까?”
사앵앵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상점을 열려고요!”
원천림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물건을 한데 모아 파는 것이죠.”
“하면 그저 잡화점을 열겠단 말씀입니까?”
“잡화점에 물건을 얼마나 놓을 수 있겠어요.”
사앵앵이 호기롭게 손을 내저었다.
“이왕 하려면 더 크게 해야죠. 다른 잡화점에서 파는 물건도 팔고, 팔지 않은 물건도 몽땅 팔아 보는 거예요. 앞으로 임안성 백성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걸 전부 다 우리 사기史記(옛날, 성이나 이름 뒤에 기記를 붙여 상호商號를 나타냄)에서 해결하게 될 거예요.”
원천림은 늘 사앵앵의 능력을 감탄해 마지않았기에 이번에도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주인어른, 역시 여장부답습니다. 전 무조건 주인어른을 따라갈 겁니다.”
사앵앵이 웃으며 말했다.
“원 관리는 애당초 부모님을 모시러 도성에 온 것인데, 저 때문에 다시 상대 일을 하게 됐으니 제가 참 미안할 따름이에요. 이번에도 눈보라 때문에 가족들과 새해를 보내지 못했잖아요.”
“주인어른, 어찌 그리 남처럼 말씀하십니까. 섣달그믐에는 주인어른께서 저희 부모님을 저택으로 모셔와 식사도 함께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비록 저는 곁에 없었지만, 저 대신 주인어른께서 제 부모님들을 보살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분께서 주인어른 칭찬을 얼마나 하시던지요.
전 말입니다. 주인장은 못 해 먹겠고, 관리도 그저 그렇고… 역시 상대가 가장 잘 맞습니다. 주인어른은 사람을 참 잘 쓰신다니까요.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시는 게 아주 탁월하십니다.”
사앵앵이 활짝 웃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우린 강남의 물건을 도성으로 가져오기도 하지만, 도성의 좋은 물건을 강남으로 가져가야 하죠. 작년에 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서 수성에 좋은 점포를 물색해 상점을 열라고 했어요. 그렇게 남북에서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며 ‘사기’라는 명칭을 널리 알리는 거죠. 양쪽을 자주 오가야 하니, 원 관리가 더 힘들어질 거예요.”
원천림이 웃으며 말했다.
“은자가 바람에 날아오는 것도 아닌데, 고생하지 않고 어찌 돈을 번단 말입니까?”
사앵앵은 물건을 정리하는 점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시작부터 제대로 보여 줍시다! 도성 백성들의 머리에 콱 박힐 수 있게요.”
* * *
원천림의 상대가 임안성에 왔을 때, 사정우의 사람도 사씨 저택에 돌아와 새로운 소식을 보고했다. 뜨거운 찻잔을 손에 든 채 보고를 듣던 사정우가 그에게 물었다.
“사앵앵의 상대가 이번엔 수십 종의 화물을 들여왔다?”
“예.”
사정우가 손을 내저었다.
“알겠으니 그만 물러나거라.”
그가 밖으로 나가자 사정우가 자신의 종복 주잠硃潜에게 물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주잠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 주인장은 자신의 가게에서 일정 금액을 쓰면 증정품을 자주 나눠 주지 않습니까? 혹 손님들에게 주려는 게 아닐까요?”
사정우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 많은 물건을 다 나눠 줄 수 있을 것 같더냐? 내가 봤을 땐 잡화점을 열려는 듯하구나.”
주잠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어찌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분명 잡화점을 열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팔아서 얼마나 벌겠습니까?”
“얼마를 벌든.”
사정우가 말했다.
“가게는 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리의 말씀은…….”
사정우가 그를 훑으며 말했다.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 주랴?”
“예, 예. 소인도 잘 알겠습니다.”
주잠은 활짝 웃는 낯으로 알랑거리며 말했다.
“나리, 걱정하지 마시고 이 일은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소인이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처리하는 일이라면 사정우도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주잠의 방식은 상관없었다. 그저 사앵앵이 잡화점을 열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순간, 그는 사앵앵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차가운 그녀의 얼굴이.
그는 여자를 밝혔다. 그의 눈에 여인들은 그저 상품에 지나치지 않았다.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여인만 조금 달리 대해 주었다. 두소진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그녀는 명문세가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부인은 그저 미인을 탐한 것뿐이었다.
그러한 것들은 전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유일하게 사앵앵에게 만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매번 그녀를 부숴야 할 순간엔 망설임이 앞섰다.
지금껏 이렇게 자신을 사로잡은 여인은 사앵앵이 처음이었고, 저를 노심초사하게 한 여인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를 정복하느냐, 아니면 무너뜨리느냐를 두고 그의 머릿속에선 늘 싸움이 일어났다.
그래도 사앵앵의 장사 규모가 커져선 안 된다는 것만큼은 명확했다. 그가 그녀를 정복할 수 없다고 해서 한낱 여인이 자신의 머리 꼭대기로 올라서게 할 수는 없었다.
* * *
사앵앵의 새로운 가게는 여의루의 왼쪽에 있었다. 두 점포를 연결한 가게인데 원래는 각각 향초와 연지를 팔던 가게였다. 사앵앵은 높은 가격에 두 점포를 사들여 커다란 가게로 새롭게 단장했다. 아직 내부 수리 중이라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사봉봉이 거대한 진열대를 바라보며 동경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우리 상점이 빨리 문을 열었으면 좋겠어요.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사앵앵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머니도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구나.”
고개를 치켜세우고 진열대의 층수를 세던 금천아가 절로 혀를 내둘렀다.
“부인, 이렇게 높은 곳까지 물건을 진열하면 나중에 어찌 꺼냅니까?”
아하가 옆에 놓인 사다리를 가리켰다.
“저거 안 보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되지.”
사앵앵이 말했다.
“아하가 생각해낸 방법이지. 기존 방식대로 진열했다면 물건을 얼마 두지 못했을 거다.”
아하는 주인어른의 칭찬에 멋쩍은 듯 웃었다. 금천아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제법이네, 자식.”
그녀의 가벼운 토닥임에도 몸이 푹 수그러진 아하는 일부러 씩 웃으며 말했다.
“천아 아가씨, 내 체면을 생각해서 앞으로는 날 치지 않으면 안 될까?”
금천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이렇게 널 치는 건 대단하게 여겨서 그런 거야. 호의를 무시하지 말라고.”
아하가 사정했다.
“그럼 날 계속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게 좋겠어.”
“너!”
금천아는 또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지켜보던 사앵앵도 웃음을 터뜨렸다.
“되었다. 가서 시장이나 구경하고 오자꾸나.”
꽃피는 봄이 되자 사앵앵은 사봉봉과 시장 구경을 즐겼다. 새로 나온 게 뭐가 있는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건 그녀에게 새로운 장사 기회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하천 근처에 닿았을 때쯤 사앵앵은 한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호기심 많은 금천아는 곧장 앞으로 달려갔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부인, 누군가 하천에서 익사했습니다.”
사앵앵이 말했다.
“가엾기도 해라, 대체 어쩌다 하천에 빠졌단 말이냐. 수심이 그리 깊은 곳도 아닌데.”
“아무래도 낯이 익습니다.”
금천아가 말했다.
“연말에 성 서쪽에서 만났던 남매 중에 남자아이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