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0화
이를 발견한 황제가 성 황자를 꾸짖었다.
“성아, 마마嬷嬷(유모나 나이 든 궁녀)가 널 어찌 가르친 것이냐? 새해를 맞을 땐 불길한 말을 해서도 안 되고 가족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지.”
성 황자는 억울한 목소리로 일러바쳤다.
“탁자 밑에서 청양이 절 발로 찼어요.”
청양 공주가 곧장 변명했다.
“아니에요. 제 발은 여기 가만히 있는걸요.”
그녀는 묵용성이 있는 오른쪽이 아닌 자신의 왼쪽 아래를 가리켰다. 황제가 말했다.
“청양의 발은 왼쪽에 가만히 있는데 어찌 널 차겠느냐?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밥이나 먹거라.”
황제의 꾸짖음에 성 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청양 공주는 승리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알을 굴리던 그녀가 서 태후에게 말했다.
“할마마마, 성아가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할마마마께서 용돈을 주시어 성아를 위로해 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서 태후가 어찌 아이의 마음을 모를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암요, 주고말고요. 우리 청양 공주는 필요 없습니까?”
청양 공주가 진지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동생인 성아에게 먼저 주시어요. 전 그다음에 받겠습니다.”
청양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문장을 힘주어 말하는 걸 보니 그게 핵심이었다.
* * *
사실 수세守歲엔 자신의 집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황제는 태자에게 임무를 맡겨 두고 자신은 황후와 어린 남매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 그렇게 황제의 네 식구는 학평관, 월규, 몇몇 암위까지 대동해 은밀히 가동의 저택으로 향했다.
홍등이 높이 내걸린 가동의 저택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여 명절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영구와 기홍은 영안을 데려왔고, 사장풍과 사앵앵도 사봉봉, 사금언을 데리고 진즉 와 있었다. 황제와 황후까지 도착하면 즐겁게 새해를 맞고자 다들 기다리던 참이었다.
마차에 달린 종은 이미 떼어 냈지만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마차는 어느새 궁 문 앞에 다다랐다. 보초병들은 마차의 크기를 보자마자 곧장 옆으로 다가왔다. 월규가 발을 반쯤 걷어 올리곤 보초병에게 말했다.
“황후 마마의 명으로 가 대인께 음식을 가져다주러 가야 하네.”
월규는 황후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자 평소에도 황후의 명을 받고 영 부인과 가 부인에게 종종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보초병들은 익숙한 듯 공손히 예를 갖추어 말했다.
“고고,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백천범은 출궁을 하는 게 가장 좋았다. 궁문을 나서는 순간 호흡마저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강남에서 지내던 나날이 그리웠다. 앞을 가로막는 단단한 문도 없고 번거로운 규율도 없는 그곳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묵용감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황궁에서 지내고 싶었다. 가끔 심경의 변화가 좀 생기긴 했지만…….
백천범을 끔찍이 아끼는 묵용감도 혹여 그녀가 답답해할까 봐 이따금 함께 궁 밖을 나왔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그녀는 새장을 나온 병아리처럼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백천범과 묵용청양, 두 모녀는 가마에 나란히 앉아서 밖을 살피며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황제는 서로 똑 닮은 표정을 짓고 있는 부인과 딸을 바라보며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백천범을 끔찍이 사랑하는 그는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으나 유일하게 이 부분에서만큼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황제였고 예로부터 황제는 반드시 황궁에서 지내야 했다. 황궁은 황권이 있는 곳이기에 황궁을 벗어나면 황제인 그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시간이 허락해 줄 때 부지런히 백천범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오늘 밤은 통금이 해제되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따금 어린아이들이 길에서 폭죽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보였는데,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깊은 밤하늘에 울려 퍼지며 명절 분위기를 더했다. 묵용 청양이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아랫입술을 할짝대며 황제에게 말했다.
“아버지, 가 대인 집에 가면 저도 폭죽을 터뜨릴래요!”
황제는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폭죽을 터뜨리는 건 노비들이 할 테니 넌 구경만 하면 된다.”
묵용청양이 입을 삐죽였다.
“제가 직접 하는 게 재미있단 말이에요.”
“그건 너무 위험하다. 손을 다칠 수도 있어.”
“노비들이 손을 다치는 건 걱정 안 되세요?”
“…….”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겁나지 않거든 직접 해 보렴. 성아도 해 볼래?”
묵용성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다 옷이 탈지도 몰라요. 성아는 안 할래요.”
묵용청양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그를 놀렸다.
‘겁.쟁.이.’
묵용성은 고개를 홱 돌리고 못 본 척했다. 황제는 묵용청양을 더 아꼈기에 그녀가 무얼 하든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결국 그는 공주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양쪽으로 말아 올린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주 해 주던 머리 모양이란다. 네 머리를 이렇게 빗겨 주었으니 솜씨가 녹슬지 않은 셈이지.”
청양 공주는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나중에 저도 머리를 빗겨 주는 부군한테 시집갈 거예요.”
성 황자는 황당한 소리라도 들은 양 코웃음을 쳤다.
“어린 애가 시집갈 생각부터 하다니… 넌 공주야. 좀 더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황제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공주이기 때문에 뭐든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하는 법이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까.”
황제가 다시 청양 공주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성 황자를 볼 때와는 다르게 눈빛에 사랑이 뚝뚝 흘러넘쳤다.
“청양아, 부마駙馬가 될 자는 이미 이 아버지가 몇 명 추려 놓았단다. 아직은 좀 이르니 몇 년 더 지켜보자꾸나. 넌 걱정 말거라. 네 일은 이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할 테니.”
“…….”
백천범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인 딸에게 신랑감을 찾아 준다니……. 묵용청양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두 눈이 초승달이 될 만큼 활짝 웃어 보였다.
“아주 좋은 부마로 골라 주셔야 해요. 그런데 아버지… 혼수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아버지가 지금부터 준비해 보마. 앞으로 십 년 동안 우리 공주의 혼수를 장만해야겠구나.”
질투심에 사로잡힌 묵용성이 결국 황제에게 물었다.
“아버지, 그럼 저는요?”
황제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네 부인의 혼수도 이 아버지가 준비해야 한단 말이냐?”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범과 월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도 덩달아 웃었지만, 별안간 가슴이 시큰거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을 어찌 남에게 시집보낸단 말인가. 천하에 자신의 공주와 걸맞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훗날 청양 공주가 다른 이의 집에서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니, 황제는 슬픔을 참을 길 없었다.
청양 공주가 물었다.
“아버지, 왜 기분이 안 좋으세요?”
황제가 말했다.
“십 년 동안 혼수를 준비하는 건 조금 부족할 듯하구나. 십오 년으로 해야겠다.”
묵용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안의 전 재산을 청양에게 몰아주려는 것이란 말인가? 하면 자신은 훗날 어찌 저택을 짓고 독립을 한단 말인가?
“아버지, 그럼 청양이를 시집보내지 않고 계속 아버지 곁에 있게 하는 게 어때요?”
안 그래도 황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성 황자를 바라본 뒤, 청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양이 어찌 대꾸하는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한편 묵용성은 모처럼 부황이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봐 주자 몸 둘 바를 모르며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천하는 태자 형님의 것이니 난 따로 저택을 짓고 독립해서 한가로이 노니는 부귀한 왕야가 되어야지. 청양은 궁에서 노처녀로 지내고… 음, 정말 완벽해!’
청양 공주가 목청을 높였다.
“아버지, 동월의 공주가 시집도 못 가다니요. 제 체면을 구기지 않겠어요?”
황제가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예부터 황제의 딸은 시집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청양이 시집을 가지 않는다면 만백성들의 입을 막지 못할 것이다. 역시나 청양 공주의 혼사는 황제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가동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가동이 머슴들을 데리고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곧장 발을 걷었다. 가장 먼저 황제가 청양 공주를 안고 가마에서 내렸고, 뒤이어 황후가 성 황자를 안고 내려왔다. 황제 일행은 가동의 친척인 척 조용히 대문에 들어섰다.
다들 안으로 들어오자 가동은 곧장 대문을 걸어 잠갔다. 대문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황제와 황후를 보자마자 곧장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백천범이 사앵앵을 일으켰다.
“바깥에선 이렇게 할 필요 없어. 강남에서처럼 편히 대하면 돼.”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사장풍을 바라보았다. 사장풍이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자 황제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사장풍이 제법 눈치 있게 굴었기 때문이다.
사장풍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눈꺼풀을 낮게 드리웠다. 예전엔 백천범의 목소리만 들으면 가슴에 파동이 일었는데 지금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수년간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다. 생김새 또한 예전 그대로 아름답겠지. 하지만 결국에는 다 지난 일이었다. 그는 평생 단 한 여자만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고, 끝내 백천범이 아닌 다른 여인을 택했다.
과거 그는 운명의 장난을 원망했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운명은 때로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무리 속에서 사앵앵의 손을 꼭 잡은 그는 어느 때보다 더없이 마음이 든든했다.
녹하는 묵용감 곁을 오랜 시간 지켰기 때문에 자신의 주인을 가장 잘 이해했다. 황제가 예전에 했던 말을 뒤엎고 백천범과 사장풍의 만남을 허락해 주었지만, 녹하가 보기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결국 그녀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방에서 손님 접대를 하기로 하고 문발을 걷어 냈다. 방 사이가 트여 있으니 서로 할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얼굴을 보고 싶을 땐 고개만 내밀면 되었다. 또 반대로 보고 싶지 않을 땐, 자연스레 시야에 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황제는 녹하가 준비한 방식이 퍽 마음에 들었다. 사내들은 한쪽 방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인들은 다른 방에 모여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대부호 집안에서 친척들을 불러 새해를 맞는 듯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