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9화
줄을 선 사람들은 걸인이 아니라 대부분 근처 마을의 일반 백성들이었다. 평소 배불리 먹지 못하니 죽 한 그릇이라도 더 먹으려 찾아온 것이었다. 사앵앵은 노점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창륭 쌀집의 주 주인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금정각의 건물 주인이라고 밝히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노점에는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뾰족한 입에 광대가 도드라진 게 조금 간사해 보이는 외모였다. 물론 외모로만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되었다. 어쨌든 저들은 선행을 베푸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점원 네다섯 명, 조리사 두 명이 있었고 나머지는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살갑게 손님을 맞았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사앵앵과 사장풍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노점 앞을 지나 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골목에 들어선 사앵앵이 사장풍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아요?”
“수상한 점은 없었소.”
“저도 딱히 이상한 점은 못 느꼈어요.”
사앵앵이 금천아와 아하에게 물었다.
“너희가 보기엔 어떠했느냐?”
금천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습니다.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 주는 건 엄청난 선행인걸요.”
하지만 아하의 생각은 달랐다.
“내일도 죽을 나눠 준다니까 좀 더 지켜보시지요.”
집으로 돌아온 사앵앵은 오래된 옷을 한바탕 뒤적거렸다. 또 류 어멈에게 사장풍의 솜옷으로 아이 옷을 만들어 보따리에 담아 두라고 분부했다. 오늘 만난 남매에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이튿날, 사앵앵은 찐빵과 간식을 준비해 함께 보따리에 담았다. 그리곤 금천아와 아하에게 어제 만난 남매에게 보따리를 전해 주고 오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금천아와 아하는 보따리를 그대로 들고 돌아왔다. 천막은 그대로 있는데 남매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사앵앵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섣달그믐이긴 해도 그 애들이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설마 친척들이 같이 새해를 보내려고 아이들을 데려간 것인가?”
금천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주변에 물어보았더니 그 아이들이 천막에 산지 반년이 넘었다더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아이들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그 애들 말로는 부모님이 이곳 사람도 아니고 친척도 없다고 했었대요. 친척이 있었다면 그리 걸인으로 살게 내버려 두었을까요?”
사앵앵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면 새해 전날 그 애들이 어딜 갈 수 있단 말이냐?”
아하가 말했다.
“부인, 아이들이 오늘 사라진 게 아니랍니다. 근처에 있던 사람 말이 어젯밤부터 돌아오지 않았대요.”
“대체 어젯밤 어디에 갔길래 돌아오지도 않은 거지?”
“죽을 받으러 갔을 겁니다.”
“…그래, 어제 여자아이가 그랬지. 사람이 적을 때 먹으러 갈 거라고. 날이 저물어야 사람도 적을 터. 하면 죽을 받으러 노점에 갔다가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추측은 그렇습니다.”
사앵앵은 잠시 망설이다 금천아에게 분부를 내렸다.
“어서 장군을 불러오너라.”
사앵앵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사장풍은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서성였다. 사앵앵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애들이 사라진 게 창륭 쌀집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사장풍은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뒤에 다시 한번 가 보는 게 좋겠소. 어쩌면 잠시 다른 곳에 갔다 오는 것일지도 모르잖소.”
사실 그저 사앵앵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그는 그녀가 편안히 새해를 맞길 원했다. 하지만 이 일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섣달그믐이 되자 백천범은 영구와 가동 부부를 궁에 불러, 다 함께 새해를 맞고 싶었다. 황제가 무심한 척 그녀에게 물었다.
“사장풍 부부는 부르지 않을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황상께서 그러셨잖아요. 죽을 때까지 사장풍을 만나지 말라고요. 알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어찌 초대할 수 있겠어요?”
“…쿨럭, 크흠, 그런 사소한 일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요. 내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오?”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고말고. 황제는 그녀를 끌어안아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
“올해 수세守歲(섣달그믐날 밤에 자지 않고 밤을 새워 새해를 맞이하는 것)는 궁 밖에서 보내는 게 어떻소?”
“정말요?”
늘 궁 밖의 삶을 꿈꿔온 백천범은 곧장 그의 목을 끌어안고 활짝 웃었다.
“황상, 어디에서 새해를 맞을 건데요?”
“가 대인 집에서.”
황제가 말했다.
“영구와 기홍도 부르고… 사앵앵 부부도 부르는 게 어떻소?”
“서방님은 정말 최고예요!”
황제의 목을 꼭 끌어안은 그녀는 눈이 감길 만큼 활짝 웃으며 입을 맞췄다. 황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 이게 다요?”
지난 약속도 깨고 사장풍을 만나게 해 주었건만… 고작 입맞춤 한 번이 다란 말인가? 결국 백천범은 다른 쪽 뺨에도 입을 맞춘 뒤,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흘겨보자 백천범은 배시시 웃으며 새끼 고양이처럼 그의 입술을 할짝댔다. 황제는 따스한 감촉에 마음이 일렁였다. 그가 어찌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까. 그는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황제는 근면 성실한 사람이다. 비록 그의 곁에는 황후 한 명뿐이었지만, 평소 정무가 바빠 황후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진 못했다. 새해를 맞아 모처럼 연휴를 만끽하던 황제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밖에서 내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태후 마마 납시오!”
황제는 그제야 뜨거운 입맞춤을 멈추었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숨을 헐떡이는 아내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도 어찌 이리 부끄러움이 많은 것이오.”
백천범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그럼 당신처럼 뻔뻔할 줄 알았어요?”
부인에게 꾸지람을 들은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황후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데, 황태후가 문턱을 넘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부부가 금슬이 이렇게나 좋다니요. 어머니인 나조차 샘이 날 정도군요.”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예를 갖췄다.
“노불야를 뵈옵니다.”
“되었어요, 되었어요. 가족끼리 편히 하세요. 새해를 맞아 온 식구가 한데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만큼 좋은 게 없지요.”
묵용감은 동월 역사상 최초로 후궁이 단 한 명도 없는 황제였다. 그에게는 황후와 두 황자, 공주 한 명이 다였다. 평범한 대부호 집안에서는 처첩을 서너 명이나 들여도 부족할 지경이었으니 다른 이들 눈엔 황제의 가족이 단출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 태후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세 왕조를 거쳐 수십 년간 궁에서 생활했다. 선황제는 자식이 많아 늘 떠들썩해 보이긴 했지만, 후궁에서는 교활한 계략이 끊이지 않았고 황자들끼리도 서로를 속이고 또 속였다. 심지어 서슬 퍼런 칼날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결국 남은 사람은 황제와 육왕야뿐이었다.
지금 궁 안에는 황제 일가뿐이지만, 서 태후는 오히려 이편이 진정으로 따뜻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원은 많지 않아도 규율은 제대로 갖춰야 했기에 용과 봉황이 조각된 커다란 원탁 위엔 오색술이 달린 붉은 탁상보가 깔렸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올 때면 오색술이 한들거리는 게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어선 시중을 드는 태감은 조심스레 청옥 사발을 옮겼다. 사발에는 머리카락처럼 가는 국수가 담겨 있었다. 전국의 산해진미를 넣고 끓여 낸 국물은 신선하면서 향긋했다.
황제와 황후는 특별히 제작된 기다란 은젓가락을 사용해 서 태후의 그릇에 국수를 덜어주었다.
“태후 노불야, 어선을 드시지요!”
서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황후는 정말 효심이 깊습니다.”
서 태후가 얇은 국수를 한 젓갈 집어 입에 넣은 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자 옆에 있던 태감이 목청을 높였다.
“파罷!”
태후에게 공경을 표하는 의식은 이로써 끝난 셈이었다. 뒤이어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상석에 앉았다. 국수 사발을 내어간 뒤에 또 다른 청옥 사발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그 안엔 백옥색 교자가 들어 있었다.
총 열두 개의 교자 중 여섯 개는 육지에서 난 채소와 고기로 만든 소가 채워져 있었고, 나머지 여섯 개는 해산물 소였다. 교자는 뜻을 이룬다는 걸 의미하는데, 각각 육지와 바다를 대표하는 소를 담아 천지를 다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번엔 태자가 황제와 황후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태자는 기다란 은젓가락으로 교자를 하나씩 꺼내 황제와 황후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황제와 황후는 젓가락으로 교자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짐은 고기가 든 교자를 먹었소.”
황후가 맛을 음미하며 말했다.
“전 해산물 소예요.”
이는 엄청난 길운을 뜻했다. 천지가 황제와 황후에게 귀속되어 그들이 진정으로 이 천하의 어버이인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모든 식구가 한데 앉아 편안히 식사를 즐겼다. 태감들은 음식을 줄줄이 내왔고, 상전들이 한두 젓가락 음식을 덜어 먹으면 곧장 그릇을 치우고 다른 음식을 내왔다.
백천범은 이런 방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음식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은 그녀가 아직 맛도 보기 전에 다시 내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부터 황제에게 이런 방식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지만, 황제는 자신이 이미 여러 방면에서 선조들의 관례를 깨트렸기에 그래도 몇 가지는 전통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다 바꾸었다가는 훗날 조상들의 얼굴을 어찌 뵌단 말인가?
하지만 백천범의 제안은 그 또한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결국 섣달그믐에 먹는 어선의 가짓수를 백팔 개에서 마흔아홉 개로 줄였고, 다시 내간 음식은 궁의 노비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렇게 하면 음식 낭비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양 공주는 서 태후 옆에 앉았다. 오늘 청양 공주는 머리를 양쪽으로 말아 올려 어느 때보다 귀여웠다. 여기에 새로 만든 도홍색 옷을 입어 유난히 더 활기 있어 보였다.
백천범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고 깔끔했기 때문이다. 청양 공주에게서 이런 단정함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새해인 만큼 얌전히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 옆엔 머리에 자금색 관을 쓴 묵용성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 앞으로 커다란 명주도 하나 내걸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장포에는 모란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진홍색 테를 둘러 우아해 보이면서도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나란히 앉은 두 남매는 키도 덩치도 비슷했다. 둘 다 새하얀 인형같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남매의 얌전한 모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성 황자가 옆에 앉은 청양 공주를 못마땅하게 흘겼다.